짝사랑은 원래 지독하다. 겪어온 바에 따르면 정말 단 한 차례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그 대로 그 루트를 탄다. 그 짝사랑이 이뤄질 리 없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 포기도 못하고 고 백도 못하는 무한한 길 위를 걷게 된다. 그 길엔 아주 캄캄한 터널뿐이며 간혹 희망처럼 빛이 번쩍하지만 그게 출구는 아니다. 출구라 여기고 기대한 찰나가 몇차례 오고 나면 그 이후에는 더 짙은 어둠이 후회처럼 밀려와서 자괴감이 자존감을 갉아먹으며 자라난다. 나는 그런 루트 를 몇 년째 밟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들은 연애를 몇 십번 할 시간에 나는 그 흔한 연 애 한 번 못하고 이렇게 짝사랑으로 물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남과 여. 흔히들 연애를 칭할 때 시작되는 사람들이다. 성별이 남과 여로 시작되는 연애는 생 각보다 순탄하다. 짝사랑도 고백도 사실 이상한 건 아니니까. 그게 성별 하나가 달라지면 이상 한 사람이 되기 쉽다. 사회적 편견은 아직 굳건하고 나 역시도 그런 편견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못하니까. 심지어 내가 같은 성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너무나도 괴로워서 그 일을 만일이라도 그 사람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도 했다.
나는 남자,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남자다. 뭐 이걸로 성공 가능성은 반타작 났다고 봐도 이상 한 일이 아닌데, 거기다가 상대는 나와 같은 팀을 하고 있는 형이다. 같은 팀. 소속된 그 팀. 내가 아주 꼬맹이 일 때부터 함께해온 사람. 그래서 난 확신 할 수 있었다. 이 형은 나를 같 은 성인으로 보고 연애를 할 마음 따위는 죽어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그건 성별 때문은 아닐 거다. 그냥, 나는 그 형이 말하는 그 연애 대상에도 들지 못하는 자격 박탈, 자격 미달 뭐 그런 거니까.
연습생을 시작할 때, 처음 마주한 형의 눈빛이 좋아서.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포근 한 말을 해주는 이상하고 묘한 텐션. 나랑 키는 그렇게 차이 나지 않으면서 나를 아주 꼬맹이 취급하는 모습이, 고작 두 살 차이인데 나보다 훨씬 큰 사람처럼 보이는 그 성격이 좋았다. 허연 팔뚝이 내 어깨에 턱 하고 올려져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면 난 그걸로 잠을 며칠이나 못 자고는 했다. 짝사랑은 단순하게도 그렇게 시작됐다. 잠결에 형 이름을 부르다가 입술을 막 때 리면서 일어난 적도 있다. 멤버들이 잠귀가 어두워 정말 다행이었다.
빌어먹게도 가장 잔인한 건 형이 나에게 유달리 다정하다는 것이었다. 나와 동갑인 태형이도 있고, 나보다 어린 정국이도 있는데. 형은 유난히 나를 찾았다. 무인도에 데려가는 것도 나, 같이 밥 먹을 때도 심지어는 무언가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무조건 나였다. 옆에 꼭 앉혀두고 나는 능숙하게 무언가를 하는 타입도 아닌데 항상 그랬다. 이십 대 초반에는 그게 얼마나 떨렸는지 죽을 맛이었는데 짝사랑 기간이 길어지니 그것도 좀 무던해..지기는 개뿔 떨 리는 건 똑같다. 빌어먹을!
"그래서, 진짜 같이 복학하려고?"
"응, 같이 다님 좋지 뭘..."
형이 재활을 시작하면서 학교를 복학 하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3개월은 넘게 쉬게 될 테 니, 활동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결정이 나면서 다들 어떤 일을 할지 늘어놓았는데, 작업을 하 겠다는 말도 나오고 믹스테잎을 준비하겠다는 말도 나왔었다. 나도 곡을 좀 쓸까 싶었는데.. 형은 의외다 싶은 말을 했다. '나 복학 하려고.' 그 말에 멤버들 대다수가 놀랐었다. 근데 이해 가 됐다, 형도 아마 평범한 일상을 좀 누리고 싶었던 듯했다. 대학이라는 곳에서 지금과 다른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얻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나는 스물이 됐을 때 형을 따라 같은 학 교 같은 학과에 입학했었다. 참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짝사랑 상대 때문에 같은 학과에 덥석 들어가는 게..
여전히 그 마음 하나 접지 못한 나는 이 나이 먹고도 형의 복학을 따라 학교에 다시 가기로 했다. 제대로 가수가 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적잖이 알려지고 나서 학교에 평범하게 다니는건 사실 무리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형이랑 평범한 선후배 형, 동생 으로 학교를 걷게 된 다는 것 그거 하나로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이 지긋지 긋하고 빌어먹게 좋았던 짝사랑을 쫑내보려고 한다. 그래, 이런 환기되는 일을 통해 형과 내 사이에 내가 만든 벽을 없애버리는 거다. 쫑내자 그리고 나도 이제, 미안함과 죄책감 없이 형 을 마주해보자. 그런 포부를 가지고 복학을 선언했다.
"나는 푹 쉬면서 재활만 해도 모자랄 텐데 새로운 도전하겠다는 형도 이상하고, 그거 따라서 복학 하겠다는 보호자 같은 너도 이상하다."
"혼자 다니면 아싸 될 것 같아서 그래. 타이밍 좋지 뭐..."
"그래 원래도 너랑 윤기형 많이 붙어 다녔으니까 뭐."
이제부터 시작하면 된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이십 대 초반에는 감정을 주체못해서 차마 시도도 못했던 일. 중반에는 키워온 감정이 아깝고 슬퍼서 못했던 일. 후반에 도달하고 나서야 형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죄책감을 지워 낼 수 있었는데.. 포기를 시작하는 거다. 새로운 일과 함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거다. 그리고 새로운 감정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는 거다. 그게 된 다면 그걸로 복학을 하는 이유와 목적으로 충분하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태형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차마 이 지독한 8년여의 짝사랑을 끝내러 간다고 할 수 없어서.
절대로 절대, 진짜로 형이 재활하며 혼자 복학하는 게 걱정돼서 따라가는 건 아니다. 절대!
포기 선언!
뽀민 / 방송연예과
조용하게 다니고 이번 학기만 잘 마무리 해야겠다. 자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 목 적은 사실 졸업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뭔가 환기 할 요소가 필요했고, 그걸로 내 숙명 같은 이 짝사랑을 포기 할 기회가 필요했다. 꿈뻑 꿈뻑, 눈이 너무 맑아서 기분이 묘했다. 잠이 안 오더라고, 지독하게도. 포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내 사랑이 좀 불쌍하기도 했다. 고백 한번 못 해보고 끝나는 내 오랜 사랑이.... 그래도 괜찮았다. 8년이나 겪어봤으니 사실 이런 거로 눈물 짜기도 좀 애매했으니까.
11시에 눈을 감았는데 잠 못 들고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든 게 5시.... 교수님과 만나야 할 일 이 있어서 7시에는 일어나야 했으니까 2시간 밖에 잠을 못 잤다. 석진이 형은 또 맏형 답게 학교 간다고 비척비척 일어나서 밥을 차려줬다. 7시에 일어났는데 미리 일어난 건지 밍숭맹숭 한 내 짝사랑 상대는 퉁퉁 부어있는 얼굴로 밥을 먼저 먹고 있었다. 그 얼굴도 또 좋아서 사 실 좀 마음이 뒤숭숭했다. 저 얼굴을 마주하면서 내가 포기를 할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새로운 사람들과 엮여가며 형이란 사람의 존재를 좀 희석하고 싶었는데, 사실 더 소중해져 버 리면 나는 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잘 다녀와, 너희 또 사고 치지 말고."
"무슨 사고를 쳐 내가."
"야, 너희 연예인이거든? 여튼... 웬만하면 조심하라고."
멤버들이 다 달려 나와 걱정을 늘어놓고는 사라졌다. 학교에 가는 내내 쏟아지는 잠을 이 겨 낼 수 없었다. 차에 있는 시간이 워낙 많으니 차가 움직이며 나는 소음조차 이젠 편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두시간 밖에 못 자고 고민하고 뒤척였더니 잠이 자꾸 왔다. 멤버들 없이 조용한 차 안이 어색해서, 잠이 오려다 자꾸 무의식적으로 잠을 깨웠다. 덜컥 거리는 차의 소 음이 점점 잦아드는 기분이 들었고, 손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눈이 감기고 지민의 고개가 꾸벅거리다가 창문에 부딪혔다. 이제 완전히 잠에 빠진듯 미동도 없는 지민의 모습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윤기가 슬쩍 몸을 옆으로 밀어 지민에게 붙더니 무심 하게 손으로 지민의 머리를 끌어와 자신의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했다. 덜컥 거리는 차의 감각이 느껴질 때마다 윤기는 지민이 깰까 봐 자세를 바르게 바짝 세워 가장 편한 각도를 만들었 다. 윤기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스케줄을 확인했다. 요 몇 년간 이렇게 텅 비어있는 스케줄러를 본 적이 있었나.
윤기가 먼저 매니저에게 말을 꺼냈다. '지민이 일부로 나랑 같이 복학한다고 그런 거지?' 매니 저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깨 재활하면서 학교 복학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걱정했어, 너 이제 일반인 아니고 연예인이니까. 거기다가 솔직히 너 그냥 연예인도 아니야. 너 방탄이 야.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는데 덜컥 그러겠다고 하니까....
"태형이가 물어봤대. 왜 갑자기 따라서 복학 하냐고."
"그랬더니 뭐래요?"
"말로는 그냥 아싸되기 싫고 자기도 그냥 이런 김에 학교 다니려고 한 거라 하는데...."
"...변명도 참 자기같이 했네."
"지민이 너 수술한다고 했을 때, 온갖 자료들 다 쓸어모아서 이런 건 어떠냐 저런 건 어떠 냐....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냐 아주 그냥 사람들 쥐잡듯이 잡았던 거 알지?"
매니저의 말에 윤기는 말없이 잠들어있는 지민을 힐끔 바라봤다. 유난히 널 잘 따르던 놈 이잖아, 연습생 때도 너한테 의지 많이 했고.... 매니저의 말을 듣던 윤기는 꽤 깊숙한 생각에 빠졌다. 지민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얼굴이었더라. 통통한 양 볼에 두 눈에는 가득 열정이 담겨있었다. 재밌는 애였다. 시키는 건 뭐든 열심히 했고, 연습하는 것이 거의 혹사에 가까울 정도였다. 살을 빼면서도 나쁜 말 한번 안 하던 순둥이. 오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마음을 두 지 않겠다 결심했던 스스로가 우스워질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든 마음을 다 주려던 지 민의 어린 모습은 윤기에게 처음 마주한 순수함이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이 자신을 따르는 게 어떨 때는 무섭기도 했었다. 무섭도록 비슷하게 흡수하는 그 모습이 자신의 치부까지 들여다 볼까 봐.
윤기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중얼거렸다. '...알지, 박지민이 어떤 앤데.' 그런 변명이 먹힐 리 없었다. 딱봐도 재활치료와 학교생활을 병행 할 윤기 걱정에 복학 선언을 한 게 분명했다. 지 민은 그런 애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윤기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잠에 빠진 지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고 등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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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이어지는 꽤 흥미로운 내용의 수업에 윤기는 한껏 진지하게 집 중 한 듯 했다. 지민은 힐끔 윤기를 바라보다가 애써 집중하려 애를 썼다. 윤기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다가를 반복하면서 집중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겨내려 온 갖 방법을 다쓰고 있었는데 윤기는 어느새 지민을 보고는 집중하라며 손등을 두어번 쳐주었 다. 괜히 이런 간질간질한 스킨십에 얼굴이 달아오를 시기는 아닌데, 지민은 새로운 상황에 도 달해서 그런가 애써 아닌 척 했다.
윤기와 함께 학교를 다니기로 하면서 다짐했던 궁극적인 목표는 짝사랑 포기. 매번 같은 숙소 에서 같은 사람들과 생활하며 쉴 새 없이 부딪혀야 하는 사람이니까 포기하기가 더 힘든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 상황을 환기하면 포기하는 게 좀 더 쉬워지리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학교를 다니려니 조심하게 되는 것도 있었 고, 좀 낯설어 삐걱거리는 것도 있었는데 그런 상황은 원래도 윤기에게 꽤 마음을 의지하던 지민을 더 의지하게 만들었다.
윤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항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하게 되면 언제나 지민을 등 뒤에 놓고 자신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꽉 차면 자신을 가둬놓듯 안전하게 틀을 만 드는 사람이었다. 지민이 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언제나 보호본능이 꽉 들어차 있는 사람 이었기에... 지민은 문득 자신이 학교에 다니며 낯선 상황에 놓였을 때 윤기의 보호 본능안에 놓인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이럴수록 더 윤기를 포기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잠들기 전 가장 솔직할 때 지민은 간혹 그런 생각을 하게 됐었다. 만약 우리가 같은 팀 안에 서 같은 멤버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냥 이런 대학교 선후배로 아주 낯선 상황에서 만나게 됐 다면... 난형에게그저동생이아닌아주찰나라도애정상대로여겨질수있었을까?그럴 리가 없을까? 형은 나처럼 같은 성별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포기와 기대를 반복하던 예 전과 다를 바가 없어서 지민은 절망했다. 아 제기랄... 이러면 내가 포기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복학한 의미가 없는데....
"박지민."
진짜 의미가 1도 없는데....
"지민아."
이 형은 왜 하필 나를 이렇게 예뻐했을까?
"야, 박지민."
"응?"
"뭐해. 수업 끝났잖아. 너 여태까지 뭐 했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수업이 끝나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도는 강의실을 보고 지 민이 정신을 차린 듯 아랫입술을 씹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아... 어, 좀 딴생각 했어요. 윤기는 싱겁다는 듯 웃으며 지민의 가방을 들어 책을 친히 넣어주었다. 거봐, 이 형 나를 아주 애취 급 하고 있잖아. 지민이 윤기의 손에 들린 가방을 뺏으며 윤기의 가방까지 끌어당겼다. 이리 줘요, 형. 재활하는 사람이 무거운 거 들면 안되거든요. 그 말에 윤기가 됐다는 듯 손을 저었 다. 지민이 힘을 주어 가방을 당기자 윤기가 픽 웃으며 지민에게 가방을 주었다. 그래, 네 맘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마치 아이에게 진 것마냥 시늉해주는 어른 같아서 지민은 심통이 났다. 이 형은 왜 나를 이렇게 애마냥 보고 애처럼 대할까.
가방 두 개를 들고 걸어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던 윤기가 느릿하게 팔을 잡아 오며 말했다. 안 무겁냐? 하나 그냥 줘, 어깨 아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 말에 지민이 앞만 보며 답했 다. 어깨 아프다고 죽는 거 아닌데, 아프면 불편하잖아요. 형 몸이 형 거예요? 우리 팀건데. 걱정이 돼서, 아프지 않았음해서 언제나 온갖 신경이 다 윤기에게 쏠려있는 지민이면서 애처 럼 자신을 대하는 윤기가 좀 야속해서 퍽 사납게 쏘아댄 지민이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 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너는 뭐 걱정 된다는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너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 의미 아니라는 것 알아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 오해하기 쉽다. 윤기의 말에 지민은 괜히 입술을 삐쭉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늘은 사람이 꽤 없었다. 교내 까페에서 커피를 두어잔 사고, 팬이라는 분께 사인까지 야무지 게 해드렸다. 평소에는 교내 까페를 이용하기가 좀 그랬었는데 (어그로 끌기 딱 좋은 포지션 에 있는 곳이었다.) 오늘은 진짜 평범한 학생마냥 교내 까페에서 커피도 사고, 느릿하게 교내 를 걸어가며 대화도 하고 있었다. 지민은 괜히 윤기와 함께 걸어가는 지금이 묘하게 설레서, 괜히 다른 관계가 된 기분이라서 조금 들뜨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윤기가 휴 대폰을 들고 고개를 들더니 주변을 돌아보더라. 지민이 무슨 일이냐는 듯 물어보려는 순간, 윤 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슬쩍 들자 다가오는 무리에 지민이 당황해 급하게 마스크를 쓰 자 윤기가 지민의 정수리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연락하던 동기들, 인사한다고 왔어. 안 놀라 도 돼. 그 말에 지민이 다시 슬쩍 마스크를 벗었다.
잘 지냈냐? 와 월드스타 실물 보기 엄청 힘들다? 장난치는 친구의 말에 윤기가 웃으며 어깨 를 밀었다. 하지 마라, 너 평소에는 게임을 할 때 사람 취급도 안 해주면서. 지민이 어색하게 서 있자 윤기가 먼저 지민의 어깨를 끌어와 안듯이 하며 말했다. 인사해, 나랑 같이 복학했어. 내 보호자다, 보호자. 그 말에 지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하는 지민을 보 고 친구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와 윤기랑 다르게 지민씨는 완전 연예인 같다. 그 말에 지민이 웃자 윤기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야, 나도 연예인이거든.
윤기와 친한 동기는 진석, 진석의 여자친구 수진은 윤기와 퍽 가까워 보였다. 연락하고 지내는 동기라고는 둘이라 하더니 이 둘은 윤기를 대하는 게 편안해 보였다. 진석은 지민이 신기한지 몇번이나 얼굴을 바라보고는 했다. 윤기는 평소에 연락할 때 연예인이라는 생각을 잘 못 해서 그런지 지민을 보고 나서야 진짜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라고 했다. 진석은 되게 재밌는 사람이 었다. 말도 재밌고, 불편함 없이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성격이라서 지민은 좀 낯을 가렸었지만 그런 진석 덕분에 별 불편함이 없었다.
지민은 윤기의 지인을 이렇게 마주한 적이 많지 않아서 낯선 기분이 들었다. 윤기와 함께한 지 꽤 오래됐는데... 윤기의 지인을 본 건 사실 손에 꼽을 정도였다. 윤기의 집에 갔을 때는 윤 기와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모여있으니까 그런 낯선 느낌은 없었는데, 지금은 정말 낯선 기분이었다. 윤기와 닮지 않은 윤기의 사람들. 윤기의 바운더리안에 항상 들어와 있던 지민은 지금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는 느낌에 기분이 이상한듯 했다. 자신이 아는 윤기의 모습이 윤기 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윤기에서 낯선 느낌이 들때 좀 무서웠다. 아마도 나랑 멀어 지는 기분이 들어서겠지? 지민은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윤기를 바라보다가 괜히 좀 마음 이 시무룩해져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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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을 하겠다는건 잘못된 선택 이었을까? 지민은 혼자 바쁘게 수업을 이어가는 교수님 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라면 연습실에 콕 박혀 끊임없이 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 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가며 소모하는 체력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을 텐데. 요즘은 유 난히 생각이 많아졌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시간을 보내다 보면 결국 마지막 에 이르는 생각은 윤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열심히 해 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현대 사회의 사랑이라는 교양과목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각자 다른 형태를 가진 사랑과 의미 변화된 형태의 시작 등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지민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마다 자신 옆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윤기의 얼굴만 바라보게 됐다. 괜히 복잡하고 어수선한 마음만 들쑤시는 기분에 감정은 푹푹 가라앉는 늪 같았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교수님의 목소 리는 꼭 길게 늘어지는 테이프 속 배경음악 같았다. 멍하니 앉아서 생각에 빠져있던 지민이 자신의 시선안에 들어온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윤기의 동기 진석과 친하다던 동생. 현수는 재밌는 애였다. 지민보다 한살 어린 친구였는데, 얼굴도 또래보다 어려 보여 귀여웠고 성격도 참 친근하게 사람을 잘 대했다. 진석과 함께 있 을 때 먼저 인사를 하러 와 알게 된 사이였는데 지민은 워낙 낯을 가려 쉽게 다가가질 못 했다.
윤기에게 퍽 잘 치대던 현수의 모습에 지민은 괜히 마음이 자꾸 이상해서 그날 말을 거의 잃다시피 하며 집으로 왔었다. 그 이후로 같은 과라서 더 친해진 건지 윤기는 현수와 연락을이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가끔 방에 가보면 현수와 통화를 하며 게임을 하고 있고는 했고, 그런 윤기를 힐끔 보다가 윤기가 같이할래? 하고 물으면 됐다며 손사래를 치고 방으로 돌아 와 혼자 땅굴을 파고는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현수도 윤기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될 일이지만 정말 만약에 현수도 윤기를 좋아한다면, 자신과는 달리 팀과 멤버로 엮 여있지 않으니까 현수가 조금 더 유리하지 않을까? 지민은 가만히 있으면 그런 생각이 자꾸 자신을 잡아먹는걸 알면서도 윤기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무기력해 져서 그냥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 함께 다니기 시작하면서 무기력해진 지민의 모습을 보고 태형과 호석이 걱정스러운 말을 몇 번 던졌지만 지민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뭐라고 해 멤버들한테 민윤기가 딴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우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수업이 끝났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고정했던 현수의 뒷모습이 휙 앞모습으로 돌아서자 지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 씨...이렇게 우울하면 안 되는데, 나 포기하려고 복학까지 한 건데. 뭐 하는 거야 나.... 윤기의 앞에 다가온 현수가 지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지민이 대 강 인사를 하고는 짐을 챙겼다. 윤기와 현수의 대화는 꽤 익숙하고 편안해 보였다. 진짜 질투 가 나도록 말이다. 윤기는 사실 멤버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정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 서 더 질투가 났는지도 모른다. 정을 줘도 다 우리랑 관련되어있는 사람들 이었는데....
"같이 술이나 한잔해요 형!"
"안 돼요! 아...어... 윤기형 재활 중이라서 술은 안 되는데...."
"아, 맞아 나 술 못 마셔."
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의식중 블로킹을 한 지민이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보 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윤기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편을 들어주듯 말 했다. 응, 나 술 못 마셔. 현수의 표정을 가만히 보던 지민이 어색하게 가방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윤기의 가방까지 끌어와 잡았다. 형 둘이서 식사라도 해요, 저는 도서관 가서 구경도 해보고 하려고요.... 지민이 윤기의 가방을 끌어당기자 윤기가 지민의 손을 겹쳐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너 무거워. 그 말에 지민이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형 어깨 아파요, 어 차피 도서관에 있을 거라 괜찮아요.
질투가 나는걸 감추려했지만 표정이 굳어지는 게 자신도 너무 잘 느껴져서 지민은 얼른 이 자 리를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기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가방 두 개를 어깨에 턱턱 들고 고개만 대강 꾸벅거린 지민이 윤기가 부르는데 모른척하며 강의실 을 빠져나왔다. 마스크를 꾹꾹 올려 쓰고 주변을 한번 돌아보다가 사람이 없어진 것 같아서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활동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철벽이던 윤기가 자신 친구의 지인이라서 훅 벽을 낮춰 버린 모습을 보니까 괜히 입술이 삐쭉삐쭉 나오고 기분이 푹푹 가라앉아버린다. 별로 무겁지 도 않은 가방이 왜 이리 물먹은 솜마냥 무겁게 느껴지는지... 지민이 터덜터덜 걸어 도서관 쪽 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커피나 하나 사 마시고 갈까.... 친구들과 모여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 람들을 보면서 지민은 괜히 혼자 있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거 기 껴서 밥을 먹을 자신은 정말로 없었단 말이다. 자존심이 있지 거기서 질투 난다고 쏙 껴서 밥까지 먹으면... 사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체해서 내내 고생할게 뻔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면 좀 덜 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놈의 짝사랑은 가라앉지를 않는다. 치기 어린 스물 초반이라면 질투 나고 그런 거 그런갑다 한다고, 근데 이 나이 먹고 자꾸 이 렇게 질투하면 스스로 너무 작고 치졸해 보이잖아. 지민은 한숨만 푹푹 나오는 상황에 머리를 쓸어넘기며 까페로 향했다. 그래, 인정을 하자 인정을 해.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질투는 나는 거잖아? 형만 모르면 되는 거 아닌가.
중얼거리던 지민의 옆에 선 누군가가 어깨를 덥석 잡았다. 놀라서 무의식중에 반사적으로 경 계태세를 취한 지민이 씩 웃고 있는 수진과 진석을 보고 안도하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지민의 인사에 진석이 웃으며 윤기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안녕, 뭐야 민윤기 이 새끼는 어디 가고 혼 자 있어? 월드스타가 교내 까페 앞에서 이렇게 혼자 있음 안 되는 거 아냐? 진석의 말에 수 진이 공감하듯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무슨 웹드 찍는 줄 알았어요 혼자 완전 튄다. 지민 은 진석과 수진의 말에 기분이 좀 좋아져 마스크를 내리고 웃었다. 형 오늘 현수씨랑 밥 먹는 다고 갔어요. 지민의 말에 진석이 윤기의 가방을 대신 메고는 말했다. 현수랑? 걔네 좀 잘 맞 나? 웬일이야. 지민씨는 밥 먹었어요?
진석과 수진이 밥을 먹자 해준 덕에 지민은 셋이서 밥을 먹게 됐다. 학교 근처에 술도 한잔하 고 밥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길래 쫄래쫄래 따라간 지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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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아 밥 먹었어? >>나 밥 다 먹었어 >>아직 도서관이야?
>>매니저 형한테 연락했어? >>지민아
>>너 어디야?
전화도 톡도 받지 않는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상 사람이 몰리면 혼자 뭘 할 수 없는걸 알 면서도 학교에 몇 번 오다 보니 이젠 익숙해진 분위기 탓에 그걸 살짝 간과하고 있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지민이 정말로 도서관에 가려고 그 자리를 피했을 리가 없었다. 현수가 낯설고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던 게 분명한데, 순간 너무 안심을 해버린듯 했다. 윤기가 내내 휴대폰을 붙잡고 서 있자 커피를 산 현수가 다가왔다. 아직도 연락 없으세요? 그 말에 윤기가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알아서 숙소 잘 가지 않으셨을까요? 현수의 말에 윤기 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같이 가려고 기다렸을 거야, 같이 왔잖아.
지민은 윤기에게 항상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다. 동생들 중에 가장 노력파였고, 그래서 였을 까 더 스스로에게 각박하고 차갑고 싸늘했다. 남들에게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모만 보이던 지민은 왜 거울 속 스스로에게 그렇게 차갑고 날이 서 있었는지 윤기는 늦었지만 알 수 있었 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더 채찍질 해야 했던 연습생 생활이 지민을 그렇게 만들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지민의 날 선 순간들이 윤기는 어딘가 마음이 쓰일 만큼 좋았다. 잘해주고 싶었고, 의지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민이 윤기에게 더 의지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근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당황스러운 순간에 마주해서 서로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을 때. 오히려 스스로가 지민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라는 당혹스러운 생 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너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라는 미묘한 확신과 뒤섞인 낯선 감정들. 그건 사실 어떤 단어로는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윤기는 휴대폰 채팅방 속 사라지지 않는 1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래, 받을 때까지 해보지 뭐....
-엉, 민윤기
"뭐야, 양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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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술 되게 잘 드시네여..."
"어, 나 말술이야. 신입생때는 진짜 상자째로 먹었어."
"와...쩐다...."
분명 밥 먹으면서 반주만 하기로 해놓고, 진석은 벌써 세병째. 지민은 이미 조금 취한 듯 얼굴이 붉게 변해있었다. 혀도 살짝 풀어진 게 이쯤에서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은데. 진석이 슬쩍 지민의 잔을 뺏으려 하자 지민이 양손으로 덥석 진석의 손을 잡았다. 아, 형 저 아직 안 취했어여. 진석은 아직 완전히 친하지 않아서 나오려던 말을 눌렀다. 이새끼야 너 취했어.... 수 진은 일찍이 포기를 하고 진석의 옷을 덮은 채 잠에 들어있었다. 친해지는데 술자리만 한 게 없으니 밥 먹으며 한잔하고 어색함도 풀고 그러려고 했는데 이렇게 취해버릴 줄이야. 느릿하 게 눈을 꿈뻑거리는 모습이 딱 봐도 취한 얼굴이라서 진석은 괜히 말을 크게 하며 정신없게 한 뒤 술잔에 물을 그득 채워주었다. 자! 우리 둘 다 막잔이다 막잔!
윤기에게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고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건지.... 진석은 이미 다 쫄아버린 부대찌개를 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지민을 바라봤다. 얘 무슨 속상한 일 있었나. 윤기에게 들은 지민은 낯도 많이 가리고 사람이 불편하면 술도 잘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 었는데. 아님 내가 편해진 건가. 진석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지민에게 성큼 다가가 술잔을 슬쩍 밀어내고는 말했다. 근데, 오늘 술 많이 마신다 너. 그 말에 지민이 혼자 생각하는 듯 느릿하 게 눈을 꿈뻑이다가 배시시 웃었다. 아, 그런가여...오늘 쫌 술이 잘 들어갔어여....
'되게 솔직해, 그래서 미운 구석도 없어. 자기 자신한테도 솔직하고. 스스로한테 너무 각박해 서 더 챙겨주고 싶어. 여튼 그런 애야, 좋은 애고.' 윤기가 했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솔직했다, 얼굴에서 티가 날 만큼 퍽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는. 진석은 가만히 지민을 바라보다가 이 십 대 초반 처음 친해졌을 때 윤기의 얼굴이 보여서 웃음이 났다. 푹 찌르면 바로 티가 나는 그런 얼굴. 왜 예뻐하고 좋아하는지 알겠네. 진석이 중얼거리자 지민이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뭐라구여? 형? 저 못 들었어여.... 말꼬리가 죽죽 늘어지자 진석이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별 얘기 안 했어.
"얘 왜 안 오냐?"
"누구..."
"민윤기, 너 밥 먹었냐고 하길래 나랑 술 먹는다고 했더니 자기가 오겠다 그러더라고"
윤기의 이름을 말하자 눈에 확 보일 정도로 어두워지는 지민을 보고는 진석이 무언가 캐 치한듯 몸을 앞으로 하며 지민에게 말했다. 너 윤기랑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긴 뭘 아니야 완전 있는 것 같은데. 진석이 가만히 지민을 보다가 슬쩍 소주 한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윤기가 너 힘들게 해? 뭐 팀 생활이 다 그 렇기는 하지만.... 진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민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윤기 형이 뭘 힘들게 해여, 그런 거 전혀 없어여.... 그냥... 제가 좀.... 지민이 말을 아끼자 진석이 턱을 괴 며 말했다. 뭔가 각이 좀 보이는데....
현수랑 밥 먹기 싫었어? 진석의 말에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뇨, 그런 게 아 니라여... 말끝이 흐려지다가 지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진석이 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꽤 한참을 머뭇거리던 지민이 겨우 말을 꺼냈다.
"윤기 형은 뭔가...그냥 제 생각인데요, 저희 팀...그러니까 우리만의 형 같은 느낌이라서...." "아, 뭐 섭섭하다?"
"아뇨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요."
왜 친구 뺏긴 기분 그런 거요. 저 되게 웃긴 거 아는데...그냥 최근에 그런 기분이 들더라 고요. 지민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내가 형을 8년 동안 좋아했고, 질투가 나는데 포기 하기로 다짐한 이상 그걸 막 표현하고 혼자 인정하는 것 조차 좀 치졸하 게 느껴져서 괴롭다고. 지민은 돌려 말하며 소주가 가득 따라진 잔을 만지작 거렸다. 가만히 지민을 보던 진석이 픽 웃고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윤기가 좀 곁을 안 주는 편이기는 하지.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라 더 그런 감정이 들 수도 있 겠다.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뭐... 깊게 사람사이 관계를 따져보면 그게 당연한 거지. 거기다 가 내가 민윤기한테 들어봤을 때 제일 예뻐하는 동생이 너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었으니까 그 동안 윤기가 너한테 곁을 얼마나 내줬는지는 나도 어렴풋이 알겠고 말이야.... 진석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지민은 고개를 들고 진석을 바라봤다. 윤기가 제일 예뻐하는 동생. 예뻐하는...동생.
우울함이 들이닥쳤다. 감당 할 수 없이 막 몰아치는 감정에 지민이 마른세수를 하다가 울컥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울면 안된다. 이상하잖아 내 꼴이. 예뻐하는 동생이라 는데 여기서 울어버리면 정말 이상해져. 지민은 겨우 눈물을 참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형이 저 를 많이 예뻐하고는 했죠. 알아요, 저도.... 술이 확 깨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독하게 취하고 싶었는데, 취해도 사실 마음대로 말 하나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문밖 에서 들렸다. 윤기 왔나보다. 진석의 말에 지민은 몰래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비틀거리며 가방을 찾았다. 제가 오늘 살게요, 형! 친해진 기념으로요. 지민의 미소를 보던 진석이 말했다.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그리고 월드 스타한테 부대찌개로 고작 퉁 칠 생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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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은 진석과의 술자리 이후 급격히 윤기와 말을 섞는 시간을 줄여버렸다. 학교를 같이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커피를 마시고 같이 이동하는 차 안에서 쫑알쫑 알 먼저 말을 걸었을 지민인데, 유난히 말수가 적어진 지민이 좀 걱정이 됐는지 이젠 윤기가 먼저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윤기는 지민의 가라앉은 텐션이 오를 생 각을 하지 않자 신경이 쓰이는 듯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도 교양을 들으러 가는 차 안에 서 지민은 말없이 멍하게 앉아 창밖만 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꺼냈을 지민인데.
진석과의 술자리 이후 복잡한 마음이 더 복잡해져 차마 윤기에게 어떤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활하러 간 윤기를 언제나처럼 기다리고 나오면 짐을 들어주고, 평소처럼 함께 다니 는 건 같은데 지민의 표정과 말투가 온전히 예전 같지 않았다. 예뻐하는 동생. 그 여섯글자가 가진 무게는 너무 무거워서 지민을 짓누르다 못해 지민이 눌려 없어질 판이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포기를 다짐했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사실은 아직도 쉽사리 포기를 하지 못한 자신이 우습고 한심해서. 지민은 침대에 누워 애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찔끔 눈물도 흘렸다. 차라리 어렸을 때 포기했다면, 차라리 어렸을 때 고백하고 어린 날의 치기로 그 뜨거움으로 넘겼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 텐데....
'현대 사회에서 크게 표현하는 사랑이라는 것에 형태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교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지민은 이젠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고 동시에 포기를 떠올렸다. 이젠 정말 지쳐서 포 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기에게 자신의 진짜 아끼는 동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과 언제든 그 아끼는 동생 자리는 새로운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서 였다. 그래도 어느 한 구석에서는 안심하고 있었나보다 윤기에게 자신은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될 것이 라는 그런 확신이 있어서. 파내고 나면 사라지지 않는 흉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사실 나는 그냥... 채워질 수 있는 빈자리였던 것 같아서 지민은 윤기에게 무어라 답을 원하기도 애매하고 답을 해주기도 한심한 상태가 되어버린듯 했다.
아마도, 윤기는 이 수업이 끝나면 현수와 밥을 먹을 것이다. 지민은 그걸 알고 있어서 오늘은 먼저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현수와 마주하는 게 좀 미안해서였다. 자기 혼자 현수를 질투하고 무의식중에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먼저 가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윤기가 지민의 팔을 붙잡았다.
"형이랑 밥 먹자 지민아."
"응? 아, 현수님이랑 밥 먹는 거 아니었어요?"
"할 말이 있어서. 아님 잠깐 얘기 좀 하자."
작업실로 가는 내내 지민도 윤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지민은 눈을 감은 채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척을 했고, 윤기는 귀에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들었다. 지민은 덜컹거리는 차소음을 들으며 혼자 울렁거리는 마음을 정리했다. 윤기를 따라갔던 수많은 시간이 주마 등 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 이렇게 혼자 독단적으로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지민을 보면서 윤기는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겠지. 지민은 윤기가 화났을 거라고 확신했다. 대화도 없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윤기가 싫어하는 표현 방식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지민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작업실에 들어와 커피 한잔을 내려준 윤기가 컴퓨터 의자를 끌어와 쇼파에 앉은 지민과 마주 봤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윤기의 표정을 보고 지민은 말없이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무서웠다. 진심으로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철렁했다. 처음 윤기를 좋아하고 그걸 깨닫고 받아 들여서 겨우 인정했을 때, 그땐 윤기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매일 윤기의 작업 실에 들이닥쳤었다. 그땐 혼자 쓰는 작업실도 아니었는데 거의 매일 드나들며 윤기에게 가이드 필요하지 않냐 노래를 불렀었다. 네 목소리가 취향이라는 윤기의 말에 밤낮 할 것 없이 매 일 작업실에 가 가이드를 해주던 나날들이 스쳤다.
복학 후 함께 다니게 된 대학은 정말 많은걸 변화시켰다. 윤기와 지민의 관계를 어쩌면 악화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지민은 이제 더이상 일어날 힘도 없었으니까. 윤기와의 관계가 이젠 어 떻게 망가지던지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까지 왔다. 윤기와 형 동생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마 주해 새로운 환경에 있으면 포기가 쉬워질지도 모른다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생각은 더 많 은걸 잃고 또는 얻게 했다. 얻은 건 현실 자각이었고 잃은 건 윤기와의 가까웠던 관계였다. 윤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가만히 지민을 바라보다가 윤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서운한 거 있어?" "...아뇨."
"있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어서 물어보는 거야. 말을 해야 알아. 네가 말을 안 해주니까 나는 모르고."
"네."
답답했겠지. 그래, 가장 예뻐하는 동생이 갑자기 이렇게 변하면 답답 할 거야. 너 이렇게 형이랑 계속 지낼 거 아니잖아. 어차피 팀 생활 계속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쁘게 굴면 더 답답하잖아. 죄송하다고 해. 그리고 그냥 요즘 우울해서 그랬다고 해. 지민은 속으로 그렇게 말 하면서도 자꾸 곪아가는 속이 아파서, 다 토해내고 내 속 좀 달래달라고, 나 한 번만 그냥 안 아주고 모른 척 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을 때 자꾸 시선이 가는데 그걸 누르는 것도, 형이 나한테 지민아 하고 다른 사람을 부를 때와 다른 목소 리를 낼 때도, 평범한 대학생처럼 학교를 걸으면서 날 바라볼 때도 그 순간마다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누르는 것도 정말 나를 갉아먹는 고통이라고. 차라리 이 깊은 수렁에서 날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만약 형에게 차이고 이 관계에서 멀어지는 거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지민은 할 수 없는 말을 눌러대다가 겨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냥... 요즘 좀 우울해서.
결국 꺼낸 말이 이거였다. 아니면서, 그냥 그런 게 아니면서. 지민의 말을 듣던 윤기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물었다. 정말 그게 끝이야? 그 물음에 지민은 다시 꾸역꾸역 답했다. 네. 그게 전부라서... 죄송해요 신경 쓰이게 해서. 그 대답이 얼마나 비상식적이었는지 지민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도 설명 되지 않을 답변. 지민의 행동이 그게 아니란 걸 말해주고 있는데 지민은 꾸역꾸역 거짓을 뱉었다. 윤기의 표정은 읽을 수 없이 굳어있었고, 지민은 그걸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윤기는 커피를 내려놓더니 지민의 팔을 끌어와 팔뚝을 잡고는 눈을 맞추며 달래듯 말했다.
"나 너한테 거짓말 듣기 싫다."
"...네?"
"아닌 거 알아, 내가 너한테 뭐 서운하게 했다면 말을 해줘."
"그런 거 아니에요 형."
"지민아, 내가 너 얼마나..."
빌어먹게도 다정하다. 끝을 내야 하는 순간이 왔는데. 참아내야 하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 질 일이었나. 저 다정하게 잡은 팔이, 거짓말 듣기 싫다는 그 목소리가 나를 끝까지 몰아댄다. 이제 결국 벼랑까지 몰렸다. 지민은 가만히 윤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꾸역꾸역 말을 누르다 가.... 반복하던 지민은 윤기가 얼마나 아끼는 줄 아냐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눈을 맞추고 참았던 말을 꺼냈다.
"좋아해요."
"...."
"형이 좋아요, 사랑해요."
서운한거없어요. 형이싫었던적도 미웠던적도없어요. 그냥요,이건서운한게아니 라 저 혼자 실망 한 거예요. 저 혼자 오래 묵혀둔 감정이 그러니까 그게 조절이 되지를 않아서요, 이게 차마 혼자 끝내지지가 않아서요...그러니까....
눈물이 났다. 울면서 이 마음을 고백하리라고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언젠가 이 마음을 전하리 라 생각해 본 기억도 없다. 그냥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혼자 이 관계를 정리하고 혼자 묻어버리려고 했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백하고 나면 지금 같은 형 동생 관계도 못될 건데. 형한테 좋은 동생으로 남지도 좋은 멤버로 남지도 못할 텐데. 그건 정말로 싫었는데. 지민은 윤기에게 잡혔던 팔을 겨우 빼내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박 박 문질러 닦았다. 윤기의 표정이 굳어있는 게 보여서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착하고 차 분하게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이상 이 관계가 망가지지 않으려면 그래야 하니까.
"받아달라고 하는 말 아니에요."
"...."
"그냥, 참기가 힘들어서요. 제가 알아서 정리할게요 형. 불편하게 안 해요. 그냥 저는 이 감정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하고요, 형은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시면 돼요."
"지민아."
너 그 감정 얼마나 생각해 본 거야? 윤기의 물음에 지민은 굳어버렸다. 윤기의 입에서 거 절이 아닌 다른 말이 나와서 였다. 당황했다고 이러지 말라고 그런 뉘앙스의 말이 아니라서, 지민은 서서 뒤통수를 맞은 듯 윤기를 바라봤다. 윤기의 말은 차분했고, 또 다정했다. 지민은 윤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8년이요. 그 말에 윤기는 지민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다시 앉아볼래, 우리 차분히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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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동안 혼자 삭히고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 형도 너한테 그런 감정 그런 느낌 안 받고 안 느낀거 아니었고. 근데, 나는 그게 그런 감정인지 확신을 못해서 묻어뒀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형도 다시 한번 생각 해볼게. 우리가 서로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지 냈던건지, 나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러니까 형한테도 시간을 좀 줘. 네 마 음 어떤지 알아들었고, 지금 거절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윤기의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엉엉 숨이 넘어가라 울고 애처럼 윤기의 품 안에 서 더 울었다. 하루만 시간을 달라는 윤기의 말에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밤에 잠도 못 이 뤘다. 밤을 꼴딱 지새고 퉁퉁 부어있는 눈으로 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알람도 못 들었고 그 덕에 윤기는 혼자 먼저 오전 재활을 간 뒤였다. 오후 수업이었던 지민은 눈 부기를 빼기 위해 얼음찜질을 하고 혼자 택시를 타고 학교로 왔었다. 기대하면 안 되는데, 아직 거절이 아닌 건데. 만나자고 확답을 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학교로 가는 길 이 들뜨고 좋던지. 지민은 택시 안에서 내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 리 노래가 나오자 윤기 파트에서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듯 뛰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업 끝나고 까페 앞에서 보자.
오늘은 각자 다른 수업을 듣는 날이라서, 당장 만날 수 없는데. 저 문자 한 통에 발걸음이 유 난히 가벼웠다. 수업을 듣는 내내 지민은 멍하니 윤기의 말만 떠올렸다. 나도 그런 감정 그런 느낌 안 받고 안 느낀거 아니라는 말. 그 말이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형도 언젠가 나와 비 슷한 감정을 느껴 이 감정을 고민했다는 것 그 자체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벅찬 일이었다. 8 년간의 내 감정과 내 행동들이 결코 혼자 가진 가벼운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 수업이 끝나자 마자 얼른 짐을 챙겨 들고 마스크를 쓴 채 까페로 달려갔다. 발걸음이 너무 가벼워서, 그리고 마음이 너무 급해서. 걷는다고 걸은 건데 뛰는 것 만큼 속도가 붙었다.
익숙한 뒤통수가 보인다. 사람들이 볼까 봐 마스크를 쓰고 꽁꽁 가린 얼굴인데, 왜 이렇게 다 보이는 걸까. 지민이 얼른 뛰어가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윤기의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 보는 윤기의 얼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을 본 윤기가 슬쩍 웃으며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들어, 잠깐 걷자. 이젠 좀 걸어봤다고 사람이 없는 뒤쪽 길을 루틴처럼 걷는다. 지민은 마스크를 슬쩍 내리고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달달한 바닐라 라떼가 입안에 들어오자 기분이 오늘 아침처럼 들떴다. 말없이 내내 걷기만 하 는 윤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이렇게 죄책감 없이 편할 일인가. 마음껏 윤기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혹여 들킬까 훔쳐보던 지난 날과는 달라서 그게 너무 좋았다.
천천히 걷던 윤기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옆을 돌아보는 윤기, 까만 머리가 바람에 마구 흔들렸다. 지민은 잔뜩 붉게 올라온 볼을 하고 윤기를 바라봤다. 누가 알아보면 어쩌지, 얼굴 을 가려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이미 멀리 떨어진듯 했다.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내가 생각 해봤는데."
"...."
"형도 너 좋아하는 것 같다 지민아."
재활하는 내내 밖에서 기다리는 네 얼굴이 왜 그렇게 떠올랐는지, 오늘도 수업듣는 내내 네 생각만 했는지. 멋모르는 20대 초반에 왜 그렇게 네게 형 노릇을 하고 싶었는지... 그런 거 하나하나 되짚어보고 생각해봤는데. 진짜 멋모르던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어. 나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증명을 할 자신도 없고. 그리고... 그 고백 듣는 순간 너보다 내가 먼저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내가 더 먼저였겠다.
패기 넘치던 스물 초반에는 겪어도 몰랐던 감정. 윤기에게 지민은 그냥 동생이 아니었다는걸 이제 와 돌이켜보니 아주 생생하고 또렷했다. 유난히 눈이 가던 네게 나는 그걸 그저 관심이 라 여겼었나. 윤기는 울며 고백하던 지민의 얼굴이 꼭 연습실에서 울며 서러워하던 어린 지민 같아서 그날 왜 지민을 안아줬는지 그날 왜 그렇게 품 안에서 지민을 떼어놓기 싫었는지 깨달 았다. 그건 사랑이었고, 또 애정이었다. 윤기의 말에 지민은 커피를 양손에 들고 눈물을 꾸역 꾸역 참다가 웃었다. 때마침 거짓말처럼 시원하게 바람이 불었고, 저 먼 곳에서는 학생들의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평범과는 아주 먼 관계였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진 우리. 같은 팀, 멤버, 같은 성별. 남들 보다는 더 특이한 관계였는데. 이렇게 평범하다 못해 남들에게는 지루할 장면 속에서 클라이 맥스 같은 관계를 틔워냈다. 윤기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터져 나온 그 순간, 기다렸던 꽃이 팝콘처럼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이 환하게 변하고 감정은 아득해지며 사랑은 깊어 졌다. 윤기는 지민의 손을 끌어와 가볍게 잡았다. 커다란 손이 언제나처럼 위로하듯 지민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우린 이제 다른 관계인걸. 지민이 눈을 접어 웃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지자 윤기가 중얼거린다.
"...학교 복학하길 잘했네."
"나 형 포기하려고 복학 한 건데요."
근데, 포기 안됐어요. 포기 못 할 운명이었나 봐요 나. 지민이 웃는다. 포기 못해서 그렇 게 괴로워 하던 지민은 결국 웃어버렸다. 폐 속이 가득 원망으로 들어차 숨조차 크게 못 쉬던 시간들은 결국 원망을 토해내고 나니 가벼워졌다. 날아갈 듯 부풀어버리는 폐가 이젠 가득 애정을 마신다. 지민의 눈물을 윤기는 가볍게 닦아주었다. 울려서 형이 미안하다, 나쁘네 나. 윤기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리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