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관계
作. 톨주
너랑 나랑 무슨 관계냐고 묻길래
별 관계 아니라고 했더니 그가 심각한 얼굴로 묻는다.
너랑 별 관계가 되려면
별 몇 개가 필요해?
; 여경희, 별관계
만물은 상스러운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 대개 사랑이다.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은 분명 아프오, 하지만 필시 목숨 걸게 될지어다. 사랑 궤도에 들어선 자는 앞을 보지 못한다. 고요한 절규는 눈먼 자의 목을 깊숙이 긋는다. 신은 말한다. 나의 은총이 간절하다면 목숨을 걸어라. 너의 목숨 값이 곧 나의 은총이며 새하얀 길이 될 지어니. 따라서, 나는 기꺼이 목을 내놓았다.
別關係
“교수님, 지금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실험체에서 이상 반응이 있는데 *셔던 같아서요. 그리고 실험체 코드가 J1013입니다···." (*셔던[Sherden] : 실험체에게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의 한 종류로, 감염 시 30-31일 이내로 사망하고 눈동자가 푸르게 변하는 것이 특징이며 때때로 환각 증세가 심함. 밝혀지지 않은 경로로 증세가 시작되고 전염성은 띠지 않음.)
꽉 찬 강의실에서 받은 전화는 급하게 끊겼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져 있음에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날카롭게 변한 눈이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알렸다. 전화를 다시 걸었다. 학생들은 제 눈을 피했다. 어차피 곧 끝날 수업을 어느새에 끝낸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유난히 짧은 마무리를 하고 인사도 없이 강의실을 나섰다.
캠퍼스를 걷는 긴 다리가 바삐 움직인다. 화창하게 비추는 햇살이 창백한 피부를 극대화한다. 저에게 인사하는 형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눈앞엔 그저 작은 소년 하나가 있다.
“지금 내 연구실로 옮기고 출입 금지해. 적어도 나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들여서는 안 돼. 실험체 출입 보고서에는 눈치껏 대충 쓰고. 책임은 다 내가 져.”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밝은 밖과는 반대되는 색을 한 곳에 도착했다. 극소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 여러 절차를 밟고 수여 개의 문을 열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여기까지가 교내이다. 비밀을 품은 곳은 조용하고 어둡다. 복잡한 출입 과정을 거쳐 들어가는 내내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맴돌아 반 미칠 지경에 다다라서야 개인 연구실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 마주한 실험체는 푸른 눈을 하고 목을 긁고 있었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지 쇳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데, 그게 꼭 살려달라는 말 같아서 품 안 가득 안아 주었다. 안은 몸이 너무 말라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저 작은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 관계를 정의 짓는 것은 이렇듯 매번 어렵게 흘러간다. 처음에는 호기심, 그저 여느 날처럼 감정 없이 마주하던 실험체를 처음으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가늘고 여린 몸과 선이 예쁜 얼굴형, 작고 귀여운 코, 쌍꺼풀 없이 큰 눈, 가진 것 중에 가장 붉은 입술,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 같은 것들. 그리고는 사랑하게 됐다. 흑백 세상에 작은 아이가 칠해질 때마다 행복한 기분에 꼬박 며칠을 시달렸다. 떠오르는 해는 별안간 희망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그 아이였다. 희망이었다.
"많이 아파? 괜찮아, 괜찮아..."
"기다렸는데. 기다렸는데 당신이 안 왔어요. 나 눈이 파랗게 변했는데. 바다가 푸르러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가 변했어."
지민아, 우리의 바다가 푸르러질 때까지.
약속은 또 볼 사이에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약속'을 한 건 지민과 처음이었다. 노을 진 바다에 파도가 잔잔해지면, 물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기로 약속했다. 비밀이 없는 곳. 자유롭게 유영하며 나누는 키스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바닷물은 짤 텐데 상상으로는 달콤했다. 입술이 닿기 전에 살포시 웃는 눈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면 폭신한 감촉과 함께 느껴지는 체리 맛은 깊은 바다로 잠기게 했다. 우리는 떠다니길 바랐으나 항상 가라앉으며 끝나는 꿈은 어쩌면 현실에 의해 도태된 허황이다.
상황은 빠르게 흘러가나 사고 회로는 그대로 멈췄다. 아이를 꺼내야 해. 무작정 어디든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나 오래 못 사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교수님이 소원 하나만 들어 주세요. 나 죽으면 *후컨 이라고 해 주세요. 시체마저 헤집어지는 거 싫어... 죽어서도 괴로울 것 같아요." (*후컨[Hooken] : 과다한 약물을 복용하거나 투여받은 실험체에게 나타나는 심신 쇠약병. 장 기와 뇌가 썩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후컨인 실험체는 사후[死後], 실험체를 이용한 해부 실험에서 배제됨.)
"여기서 나가자. 내가 꺼내줄게. 멀리 가다가, 멀리 헤엄치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하게 해 줘."
아픈 건 지민인데 더 아픈 소리를 내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에 숨이 막혔다. 바투 다가서 안은 몸에 힘이 빠질수록 더 세게 붙잡았다. 지민에게서는 항상 달콤한 체향이 묻어났는데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숨을 쉬어도 소독약 냄새만 났다. 죽어가는 몸 같다. 냄새 없이,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질까 봐 자꾸 확인하려 목이며 턱이며 볼이며 할 것 없이 입을 맞추고 온도를 확인했다. 안정제를 투여하는 동안 잠든 아이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모골이 송연했다. 물도 없이 두통약 하나를 삼키는 순간에도 시선은 숨을 쉬느라 조금씩 움직이는 흉부를 향해 있다. 지민을 확인한 지 한 시간 쯤 되었을 때야 조금씩 생각이 돌아왔는데, 제일 처음은 자책이었다.
"내가 어떻게 지민이 아픈 것도 모르고."
"맨날 바쁘니까. 사랑할 새도 없이."
끼어든 건 석진이었다. 놀라 자빠질 뻔했다. 이 새끼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니까...! 내가 믿음 가는 스타일인가 봐. 네가 연락해서 왔다니까 바로 비키던데. 잘생긴 얼굴이 히죽 웃으면서 하는 농담에 삐쭉 섰던 털이 가라앉는 듯했다. 지민을 살피던 석진의 안색이 별안간 파래졌다. 눈동자를 본 모양이다.
되도 않는 로맨틱한 말을 꺼내 보고 싶어서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명언 하나를 지민에게 말해 준 적이 있다. 물론 의도를 가지고 검색을 통해 얻은 명언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꽤 오랫동안 곱씹은 말이다. 푸른 바다에서 한 사람을 바라보며 산다는 건 살아왔던 이래로 가장 어리석은 짓일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다. 파도는 우리를 덮쳐 간지럽힐 테고 바람은 머리칼을 흔들어 시야를 가려버리며 내리쬐는 태양은 목이 타들어가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의 몸을 긁어 주고 눈이 보이도록 앞머리를 넘겨 주며 입술을 맞대 입을 축이기로 한 것은 잠들지 않는 밤 자장가로 써먹는 흔한 시나리오였다.
"하늘이 어디서나 푸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전 세계를 여행할 필요는 없어. 눈만 감고 너를 그렸을 때 물에 떠다니며 네가 웃고 있으면 난 그게 흙탕물이래도 행복할 거야."
"당신을 그렸을 때 난 항상 울고 있어요. 울고 있는 내가 미워서 도망가는데, 당신은 나를 따라와요. 오지 말라구, 보지도 말라구 소리치면 날 안아 주는 당신 때문에 난 그제야 눈물이 멎어요. 그냥 나는 무서운가 봐요. 나 때문에 교수님이 위험해질까 봐 항상 내가 대신 죽는 걸 그리며 살아요. 그러지 말라고는 하지 마세요. 어차피 그리기만 하는 거니까요."
자신을 좀먹는 짓. 보이지 않는 아이의 내면은 온통 상처 투성이다. 자책을 하며, 끝없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갉아먹는 것이 익숙해진다는 건, 아이에게 운명으로 다가온 것이다. 아니야.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푸른 바다야.
'교수님, 오늘 휴강 문자 보냈습니다. 빠른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울리는 소리에 흘끔 쳐다보고는 대답도 않았다. 지민의 셔던이 진행된 지 6일째다. 막막하던 계획에 점차 틀이 잡히면서 지민을 꺼낼 방법을 정한 상태에 이르렀다. 두 달마다 병명이 확실하지 않거나 전염성 질병에 걸린 실험체를 연구소 본사로 데려간다. 후자는 전염성 질병이라는 이유로 따로 격리 조치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일단 지민은 전자를 선택할 예정이다. 연구소장의 승인이 떨어져야만 갈 수 있지만 그건 대부분 그의 아들인 석진의 몫이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 한 가지 제일 큰 문제는 지민의 눈동자가 푸른색이라는 것이다. 수업을 며칠이나 빼먹어서 이미 소문은 소문대로 도는 중이라 아프다는 핑계가 언제까지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이틀 뒤가 계획한 날이라 그런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서클 렌즈를 준비하긴 했으나 지민에게 눈동자를 숨겨야 된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중이다. 얌전히 앉아 창밖을 보는 뒷모습이 고양이 같다. 진갈색이었던 머리가 밝고 옅은 노란 색으로 바뀌어 있다. 그대로 뒤에서 껴안았다.
"나가고 싶어."
"응, 나가자."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돌린 지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푸른 눈이 예뻐서 저의 눈은 깜빡일 생각도 못하고 빤히 쳐다봤다. 불쌍한 작은 아이.
다들 한 번쯤 간절히 신을 찾은 적이 있지 않은가. 신은 뭐든지 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지민은 무신론자였던 저의 평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앙심을 자극했다. 현실에서 벗어난 것들은 보통 신적인 걸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기적 같은 것들. 기적을 바랄 때 신을 그렇게들 찾아대니 실상 기적은 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에도 우린 신을 숭배한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저인데, 무엇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무용한 것들을 숭배하게 됐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역시 지민이었다. 저의 삶에 지민이 없다면 무용한 것들은 그저 무용한 것에서 그친다.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은 지민이고, 모든 것이 바뀐 것은 저이다.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게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맞잡은 손을 놓고 하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민아, 네 눈 안에 우리가 가고 싶던 바다가 있어. 푸른 바다에 물이 가득 차오른다. 흘러 흘러 넘치는 물이 넘실, 저의 손가락에 닿으면 어찌할 바 모르고 쓸어 담는다. 흐르는 물이 아까워 급하게 입이라도 맞춘다. 꼭 정말 바닷물을 들이켜는 맛이다.
"밖은 실험체가 살 수 있는 데가 있어요? 그럼 짐승만도 못한 감염자들이 살 수 있는 데는? 나는 어디서 살 수 있는 거예요. 도대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은 어디예요."
"우리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벗어나는 거지. 이곳이 아닌 더 나은 곳을 찾아서. 어디든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는 답지 않은 낭만을 가지고 최대한 멀리, 빨리. 네가 행복할 수 있는 데가 우리의 목적지가 될 건데, 그래서 말인데···."
너 혼자라도 내일 당장 여기서 나가야 돼. 우리는 더는 울 수 없다. 울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임을 직시해야 했으나 이미 많이 울어버린 후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작은 손을 저의 가슴에 얹어 심장의 박동을 느끼게 했다. 나는 살아 있어. 그렇기에 나는 너를 지킬 수 있어.
멀리 떠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별. 천천히 준비 중인 우리의 마지막 이 최대한 아름답고 찬란하기를 바라기에 사랑한다고 외치며 별을 세던 밤. 잠을 포기한 지는 오래다. 커피는 물만큼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물은 샷을 세 번쯤 추가한 아메리카노보다 쓰게 느껴질 때야 정신을 잃었다. 지민아, 내 꿈에도 네가 나오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생각만 했다. 아이가 제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떠나며 오지 말라고 소리치더란다. 덜컥 겁이 나서 정말 그대로 굳어 있다가 생각난 말, '날 안아 주는 당신 때문에 난 그제야 눈물이 멎어요.' 숨이 차 폐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자 손에 아이의 손목이 잡혔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제 것이었다.
생생한 꿈에서 벗어난 현실은 되려 꿈같이 느껴진다. 허공에 퍼지는 깊은 한숨 소리에 화들짝 놀란 작은 등. 더 자라고 토닥여도 기어코 일어나 작은 손으로 저를 만진다. 괜찮냐며 안겨오는 아이는 내가 아는 것 중 가장 따뜻하다.
"지민아, 내일이야. 할 수 있지?"
"네."
"다른 실험체들이 가는 반대 방향 복도로 가면 돼. 그럼 끝까지 뛰어서 문을 열고 담 넘자마자 보이는 검은 차로 바로 달려가기만 하면 돼. 담 넘어도 산이 보이기 전까지는 캠퍼스 안이라서 최대한 빨리 뛰어야 해. 넘어져도 그때 한 번은 꾹 참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차로 뛰어. 나랑은 공항에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괜히 코끝이 시렸다. 지민이는 평생을 연구소에만 있어서 더위에 약할 텐데. 정말 한 시도 멈추지 말고 뛰어야 할 텐데. 내가 없어도 불안하지 않아야 할 텐데.
불안과 갈증으로 물든 노을은 생각보다 빨리 졌다. 우리의 바다가 푸르러지는 소리.
지민에게 저의 첫인상을 물었을 때였다. 아마 둘이 처음 키스를 한 날이었는데, 지민의 붉어진 볼을 보자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다. 착한 아이는 매사에 진심이고 신중해서 부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응. 지민이 다운 질문에 웃음이 터졌다. 무서웠어요. 그리구 잘생겼었어요. 품 안의 작은 몸이 키득거리며 웃는 사이 느꼈던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던 때. 그때로 돌아가라 하면, 지금의 기억을 안고도 기꺼이 돌아갈 것 같다. 더 빨리 사랑할걸, 더 많이 사랑할걸.
눈은 감고 있지만 둘 다 자지 않았다. 잘 수 없었다.
지민의 손을 세게 쥐었다 놓은 다음 깊은 눈동자를 봤다. 검은 눈동자가 저를 본다. 바다를 잠시 가려놓았을 뿐인데 사막을 보는 기분이었다.
別關係
심장이 배꼽까지 떨어지는 느낌이다. 실패할 경우를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름의 차선책도 있었지만 지민이 쓰러질 줄은 몰랐다. 저는 여전히 작은 아이가 아직 단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어진 찬 몸을 옮겨 눕히자마자 메스 하나를 집어 들어 저의 팔 어딘가를 베었다. 기겁하는 석진을 보며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던 것은,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은 때론 너무 아플 때 표정이 없기 때문이고 정말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센 물결이 빗겨나갈 여지없이 바삐 움직이는 저를 조롱이라도 하듯 강타했다. 폐쇄된 복도가 아닌 연구소 밖에서 쓰러졌다면 이건 실패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도 쓰러지길 반복하는데, 지민이 깨어났다.
눈을 꾹 감고 우는 아이의 절망은 제가 낸 상처를 헤집는 것 같았다. 갑자기 팔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에 얼굴이 구겨졌다. 뭐든 제가 생각한 것과 가까이 있을 거라는 착각. 정말 아프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자존심. 저의 성급함과 어리석은 판단으로 일어난 일인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앞이 핑 돌더니···. 죄송해요. 달리려고 했는데. 뒤도 안 보고 뛰려고 했는데 너무 어지러워서...”
"지민 씨 잘못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방법은 또 있을 거야."
흐르는 혈을 보고 놀란 지민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지민에게 대신 대답해 준 석진이 급히 상처를 치료하려 했다.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거야, 미친 새끼야. 진짜 정신 줄 을 놓았냐며 버럭 화를 내는 석진의 성화에 못 이겨 간단한 응급 처치만 했다. 치료 내내 지켜보는 지민을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옅은 숨을 뱉으면 아이는 꼭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입꼬리를 올리느라 얼굴 근육에 힘을 줘서 그런지 울지 않으려 애쓰던 노력이 무색하게 시야가 뿌예졌다. 당신의 눈에도 나의 바다가 있어요. 고요한 세상에 아이의 목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얼굴을 찡그리고 오열하고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 미로는 더 복잡해져 빠져나갈 구멍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 희망이 있는 곳엔 절망도 있다고 배웠다. 그럼 절망의 세계엔 과연 희망이 있냐는 말이다. 희망은 다시 말하자면 절망이지만 절망은 다시 보아도 절망이다. 적어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그렇다. 지민이의 손은 닿는 얼굴의 모든 부분을 뜨겁게 했고 장맛비는 우리가 흘린 눈물만큼 내릴 작정인지 멈출 줄을 몰랐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한다. 시간은 가고 있는데 제자리걸음인 것에, 저의 능력이 여기까지인 것에 목이 막혔다. 아이에게는 큰 바다로 가자고 말했지만 사실 작은 호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민이만 있다면 그곳이 바다이고, 호수는 파도가 없으니까. 어쩌면 아이는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그린 게 아니라 안전한 여행을 꿈꾸는 것을. 아니다. 아이는 알고 있던 거였다.
"윤기야. 아버지가 아시는 것 같아."
"내일이에요. 그때까지만... 제발 모른 척만 해 줘요. 고마워요, 형."
한참을 끊지 않고 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석진은 생각이 많은 타입이라, 생각할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다. 행복해라. 이 한 마디를 이렇게 고민했나 싶다.
감은 눈을 뜨고 뜬 눈을 감았다. 깊은 밤, 하늘에 널린 사치스러운 별은 상상일 뿐 그저 텁텁한 색만 보인다. 지민에게 파고들 듯 안기자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린다. 잊고 있었다. 저의 별은 그 흔한 것들이 아닌 이 아이다. 절망의 세계에 희망이라는 미련을 남겨 준 아이. 저의 무너짐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일러 주던 아이. 움츠러든 등이 펴질 줄 모르고 굽어 있길래 몇 번 두드려 본 게 전부이다. 작은 노크 몇 번에 아이는 고개를 들고 날개를 폈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남는 법이다. 우연이든 인연이든 서로의 기억에 남아 한 켠에 자리를 만든다. 사랑할수록, 그리워할수록 기억에 의존한다. 지민이를 처음 봤을 때, 사랑하게 됐음을 깨달았을 때, 뜨겁게 몸을 섞었을 때의 기억과 감정을 민망함도 없이 뱉었다. 새벽이 다 가기 전에 떠나야 할 이곳에서의 우리를 잊고 싶지 않다.
항상 개인 연구실에 오면 지민의 자리는 저의 의자였다. 전담 연구원이라는 명목으로 지민을 저의 방으로 끌여들여, 쉽게 말하자면 혜택을 주었다. 다른 실험체보다 더 적은 통제를 받았고 저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민이 저의 방에 왔을 때 저의 자리는 항상 책상이었더란다. 책상에 앉아 지민을 내려다보면, 순한 눈이 저를 올려다봤다. 그게 좋아 일부러 부담스럽다고 소파에 앉으려던 지민을 부득불 저의 의자에 앉혔다. 아이의 눈을 가장 많이 쳐다봤던 건 저라고 단언한다. 그런데도 그 푸른 바다를 알아보지 못했다. 부끄러운 기분에 아이의 바다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면 그냥 다..."
"제가 더 미안해요. 교수님 이렇게 위험하게 만들어서. 내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당신은 살았으면 좋겠어요. 난 죽더라도 당신만은 살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너 없이 어떻게 내 행복을 바라. 난 하루하루가 지옥일 거야. 난 네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돼서 숨을 쉬어도 답답할 거고 웃어도 우는 기분일 거야."
아이가 슬픈 눈을 했다. 작은 코를 만지면 말랑거리는 감촉이 손에 감긴다. 슬퍼하지 마. 난 네가 행복하면 행복하고 네가 슬프면 슬퍼. 그렇게 말하는 저의 입을 막는 손에도 뽀뽀했다. 누가 아프면 청춘이랬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청춘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걸까. 혹은 다 져버린 청춘을 맨발로 뛰고 뛰어 붙잡아놓는 것인가. 상처는 아물지 않고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추태는 아스라이 사라지는 청춘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저의 청춘은 저의 목숨, 지민이다.
해가 뜨기 전 새벽의 고요함을 빌려 신을 찾는다. 지민을 등에 업고 걷는 검은 새벽, 끊임없이 이유를 대며 구원을 바란다. 연구실과 이어진 복도의 제일 끝에서 두 번째 문을 열면, 교내의 가장 작은 실험실이 있다는 것은 아마 저와 석진, 석진의 아버지만 알고 있을 테다. 이미 이 도망은 들켰고 저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해도 멈추지 않았다. 멈출 거였다면 시작도 안 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려 업힌 아이의 체온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외부와 가까운 이 실험실을 통해 캠퍼스의 뒷문으로 빠져 대기하고 있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 한국을 뜰 것이다. 공항까지만이다. 공항까지 가기만 한다면 한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국가에서 비밀 리에 하는 업무를 맡는 연구원이라는 직함이 아직은 유효하여 공항 내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비행장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전용기를 사 버렸다. 말하자면 복잡한데, 처음으로 돈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무한한 안전과 행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아이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봤자 20일 남짓일 것이고, 아이가 죽은 후의 저의 삶 따위 안중에도 없다. 아주 짧고 달콤한 마지막을 꿈꾼다.
실험실의 문을 열었을 때는, 투명인간이었으면 했다. 세상에 우리가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민 교수님?“
"여기서 뭐 합니까."
"오늘 실험실에서 하는 날이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조교님께서 핫씨, 제 친형인데 저 보고 하라고 해서... 근데 교수님은 뭐 하고 계십니까?"
지금 본 거, 적어도 딱 두 시간만 비밀로 합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수업 못 합니다. 예? 업힌 아이가 바들바들 떨고 있어서 말소리도 크게 못 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못하게 될 수업의 학생이 큰 눈으로 지민을 봤다. 미쳤는지, 끄덕이는 순한 얼굴이 못 미덥지 않아 몇 걸음 더 옮겨 뒷문 손잡이를 당겼다. 손 위로 타투가 있는 손이 올려졌다. 대체 무얼 하느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지민이 실험체인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교수님. 저는 말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봐버렸어요. 죄송해요."
"애만, 이 애만 내보낼 거야. 책임은 시발, 내가 지니까 넌 좀. 손 놔."
그 순간, 암흑이다. 연구실, 실험실, 아니 캠퍼스의 모든 전력이 일순간 다운됐다. 전기가 없는 캠퍼스는 죽은 건물 덩어리에 불과하다. 실험체와 여러 연구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멈춘다면 피해는 막심할 것이다. 시체는 썩을 것이고 정보는 빠져나갈 것이다. 실험체를 소유한 연구소는 전기가 끊기더라도 국가에서 지원하는 에너지를 배터리식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간으로 버틸 수 있다. 급하게 주머니에서 꺼낸 폰으로 연구실 cctv를 켜 보았으나 역시 전기가 나간 상태라 오류가 났다. 연구실 전력까지 아예 다운되게 하는 것은 미치광이 연구소장이나 할 수 있는 짓이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이곳의 연구소장은 원리원칙주의자인 데다 누구보다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은 딱 한 명이다. 김석진. 연구소의 고유 코드를 이용한 시스템 정지 방식을 알아내 저를 도울 사람. 어안이 벙벙한지 어버버거리고 있는 학생을 지나쳐 그대로 밖의 땅을 밟았다.
10분을 걸어 산과 이어진 담만 넘으면 된다. 전화가 온다. 화면에 뜨는 김석진 석 자에 고마 움의 눈물이 났다.
"윤기야!!!"
"형이 그런 거죠. 전력,"
"그게 아니야. 얼른 다시 들어가. 밖에 있으면 안 돼. 미안해... 제발 내 말 듣고 일단 다시 들어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걸음이 빨라졌다. 멈추라고 할수록 다리는 달리고 있었고 돌아오라는 소리에 더욱이 벗어나고 있었다. 윤기야, 제발. 거의 읍소하는 듯한 음성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업힌 지민을 내려 손을 잡았다. 이제 죽을 힘을 다해 뛸 차례야. 달리려 했으나 아이의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미치기 직전이었다. 아이가 가리켠 저의 심장 부근이 빨갛다. 빨간 점이 표적임을 알렸다. 아이도, 저도 차마 울 힘도 남지 않아 눈만 마주칠 뿐이었다. 해 는 뜬다. 죽어가는 청춘 앞에, 없는 별을 세던 우리의 낭만을 뒤로 한채로 타오르는 태양은 어둠을 뚫고 나온다. 애원하듯 지민의 손을 끌어당겼다. 역시 꿈쩍도 않는 작은 몸이 원망스러웠다. 다급하게 저를 껴안은 지민을 밀쳐낼 겨를 없이 총성이 울렸다.
작은 소망이자 전부였던 아이는 저의 지루한 나날을 덮쳐온 따뜻한 파도였다. 거센 해류에 쓸려내려가듯 아이를 잃을까 몇 년 동안이나 준비했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대도 아무렇지 않았다. 시련의 절정 속에 아이와 함께라면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다. 무너지는 명성, 까짓것 진즉에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다. 너덜너덜해진 저의 마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품에서 쿨럭쿨럭 붉은 것을 뱉는 지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지민아. 지민아. 잠시만... 지민아. 이렇게, 안 돼. 가지 마. 지민아, 박지민.“
어는 날 박지민이 그랬다. 우리는 무슨 관계냐고. 대답을 망설이자 아이가 말하길, 별 관계 아니라고 해 봐요. 별 관계 아니야. 싱긋 웃더니 짐짓 잠잠해진 표정으로, "당신과 별 관계가 되려면 별이 몇 개나 필요해요?" 묻더라니까.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며 그런 숨소리를 내던 박지민은 끝내 캠퍼스 밖의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다.
別關係 : 星關係, 우리의 관계를 정의한다. 별 관계, 별관계.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사랑했지 않은가. 비록 축복받지 못하는 애달픈 사랑이었지만 우린 목숨을 걸었다. 그저 푸르른 바다를 그리며 잔잔한 파도와 싱그러운 고백 같은 것을 바랐던 우리에게 너무 잔인하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 바다이며 파도이고 사랑이었나 보다. 별이 몇 개인지, 있기는 한 건지 중요하지 않다. 바다는 별도 품고 있다. 물에 빠져 익사를 바란다. 지민아, 우리의 바다가 푸르러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