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외계인이 존재할 것 같냐고 묻는다면, 윤기는
"우주가 이렇게 넓은데 어딘가에 있긴 있겠지."
라고 말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가까운 미래에 외계인이 발견될 것 같냐고 묻는다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고 답할 것이었다.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빨리 외계인을 만나게 될 줄은.
: 노란 우주
01, 봄날
박지민을 외계인으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대학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힘든 환경에서 장학금으로 다니는 사람, 아버지가 어느 기업 이사라는 사람, 벌써 취업 준비를 하는 사람, 대학 합격했다고 공부는 내팽개치고 놀기만 하는 사람, 기타등등. 낯선 사람, 낯선 환경, 낯선 나이 앞자리 숫자, 낯선 기분 속에서도 제법 잘 녹아들었다. 생전 처음 타 본 지하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졌고,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사람과도 그럭저럭 괜찮게 지냈다.
대학 생활 일 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될 때까지 윤기가 유일하게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민이었다. 지민은 같은 과 동기에 제법 많은 강의가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알 수가 없는 애였다. 특별히 행동이나 모습이 남들과 다르다기보다는 그냥, 느낌이 달랐다. 이 세상에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 마치 지표면과 닿지 않는 구름 같았다. 흔히 특이한 사람을 보고 외계인 같다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윤기에게 지민은 진짜로 외계인 같았다.
사건의 원인은 술이었다. 그날따라 과음한 윤기가 밖으로 나왔고, 마침 벤치에 지민이 앉아 있었다. 윤기는 지민과 조금 떨어져 앉았고, 몽롱한 기분에 별 생각 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
"너, 외계인이지."
무슨 소리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을 것을 예상하고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지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지민이 앉아 있던 자리에 조그만 꽃 한 송이만이 남아 있었다. 부드러운 노란색을 띠는 꽃은 보는 각도에 따라 은은한 금빛으로 빛났다. 윤기는 꽃을 조심스레 가방 안에 넣었다.
방 안을 환히 밝히는 아침 햇살에 윤기는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아, 암막커튼 치고 자는 것도 까먹었네. 좀 적당히 마실 걸. 해장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러 찬장 문을 여는데 싱크대 위에 있는 종잇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만져보니 종이컵 재질이었다. 종이컵... 그러고 보니 어제 집에 들어와서 소주잔 종이컵을 꺼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했지? 이렇게 된 걸 보니 찢었나? 아니, 아무리 취했다 해도 굳이 종이컵을 꺼내서 찢는 미친놈이 어딨어.
맞다, 꽃 넣어뒀었지. 박지민이 앉았던 자리에 있던 꽃. 작은 종이컵에 물을 담아 넣어놓았는데, 종이컵은 찢겨 있고 물은 증발한 것 같았다. 집에 쥐가 있나? 쥐가 꽃을 물어간 걸까?
"저기..."
윤기는 반사적으로 식탁 의자를 꽉 잡아 살짝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거실 책장 뒤에서 걸어 나왔다.
"많이 당황스럽겠지만, 그래, 넌 뭐 이미 다 아니까..."
"박지민?"
"다 알잖아, 내가 지구인이 아닌 거."
"...뭐?"
"네가 어제 그랬잖아, 내가 외계인이라고. 맞아, 나 외계인이야." "말도 안 돼... 그럼 우리 집에는 어떻게 들어온 건데?"
"네가 데리고 왔잖아. 저 가방 안에 곱게 넣어서."
"무슨 소리야, 네가 어떻게 가방 안에..."
"꽃."
"...?"
"내가 꽃이야."
"...외계인은 꽃으로 변신도 해?"
"그보다 먼저, 내가 지구인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어... 방금 알았는데? 네가 말해줘서."
"그럼 어제 한 말은 뭔데?"
"그건 그냥 네가 특이해서..."
지민의 눈이 커졌다. 제 입으로 모든 것을 발설해버린 이 상황을 부정하려는 듯이 시선은 사방으로 흔들렸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
"신경 쓰지 마. 나 입 무거워."
"..."
"그냥 지구에 친구 한 명 생겼다고 생각해.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줄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면서 윤기는 평소와 다른 자신에 놀랐다. 윤기는 좀처럼 남의 일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여느 때라면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며 굳이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지민과 같은 공간에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자신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약속해."
"응, 약속."
한참 동안 거실에는 적막한 공기만이 흘렀다. 둘 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라 어색하게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저... 여기 앉아서 얘기하자. 넌 어디서 왔어?"
"아직 지구에서 발견되지 않은 행성. 여기서 일억 광년 정도 떨어져 있어."
"일억 광년? 잠깐만, 그럼 너 나이가..."
"떠날 때 우리 행성 나이로 열일곱이었어. 아마 지구랑 공전 주기가 비슷할 거야. 내가 타고 온 우주선이 빛의 속도로 갔으니까 일억 년이 걸렸고, 주로 냉동상태로 지냈는데 삼 년 동안은 깨어 있었고 일 년을 여기서 살았으니까 신체 나이는 너랑 똑같이 스물한 살."
"어... 아 그렇구나... 그러면 너 꽃으로 변하는 거, 그건 뭐야?"
"우리 행성 사람들은 꽃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어.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꽃으로 지낼 때는 잘 없는데, 죽을 때는 보통 꽃으로 시들어 죽어. 어제처럼 놀랐을 때 꽃으로 변하기도 하고."
"꼭 요정 같다. 외계인이 아니라."
"나한테는 네가 외계인이야."
"우주에 다른 외계인들도 있어?"
"아니, 적어도 내가 떠났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어. 아마 내가 우리 행성 사람들 중에 최초로 외계인을 눈으로 봤을 걸. 지구인 말이야."
"그런데 일억 년 전에는 지구에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았잖아. 그럼 왜 온 거야?"
지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고개를 떨구며 한숨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 후로 둘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윤기를 완전히 믿지 못하던 지민도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윤기는 지민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아니 지구에서 유일하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이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다가도, 그냥 친구와 얘기할 때와는 다른 미묘한 느낌에 때때로 생각이 많아졌다. 윤기 또한 지민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지민과 같이 밥을 먹고, 캠퍼스를 거닐고, 강의실 옆자리에 앉으면 낯선 기분과 익숙한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봄이라 그런지, 옆에 있는 그 누군가가 특별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게 지민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코끝을 간질이는 봄바람에 괜히 웃음이 잦았다.
02, 여름날
"아, 더워. 너희 집에는 왜 에어컨이 없냐?"
"지는 선풍기도 없어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우리 집 와 있으면서."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선풍기를 사냐."
윤기와 지민은 동시에 푸스스,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여름, 습하고 더운 계절을 이겨내려 선풍기를 틀고, 부채를 부치고 얼음도 씹어먹어 보았지만 더위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지민아, 공포영화나 볼래?"
"뭐 볼 건데?"
"이거 어때? 얼마 전에 나온 건데 꽤 재밌다는데."
"그래, 그거 보자. 나 얼음 더 가져온다."
지민은 커다란 그릇에 얼음을 가득 담아와 윤기 옆에 앉았다. 이미 창밖은 밤인 데다가 불까지 끄니 텔레비전 화면을 빼고는 칠흑 같은 어둠 뿐이었다.
"근데 너, 공포영화 잘 봐?"
"지구 영화는 본 적이 없지만 우리 행성 영화들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봤지, 뭐. 너는 잘 봐?"
당연하지, 하고 윤기가 답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지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보기는 무슨,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도 움찔거렸고 조금만 잔인한 장면이 나와도 눈을 질끈 감는데. 잔뜩 긴장한 채로 주먹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흐르는 채로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영화의 주인공은 꼭 그렇게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누가 봐도 열면 안 될 것 같은 문을 열었다. 덜컥, 하고 문고리를 돌리자 나무 문을 여는 것 같은 높고 소름 끼치는 굉음이 났고, 이윽고 화면이 검게 변하며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지민은 비명을 듣지 못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을 감고 귀를 막았지만 고작 귀를 막는 것으로는 소리가 안 들릴 리가 없었다. 비명을 삼킨 것은 지민 옆에 앉은 누군가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꼭 감았던 눈을 살짝 떠 보니, 윤기가 지민을 안다시피 한 자세로 지민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몸이 굳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심장은 왜 이리도 빨리 뛰는지, 처음 느껴보는 찌릿찌릿한 느낌에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야, 민윤기... 무서운 거 잘 본다며."
"못 봐. 다 구라야."
"사실 나도 못 봐. 그냥... 허세 부린 거야. 다른 영화 볼래?"
삼십 분이 넘도록 볼 영화를 찾았지만 뭘 봐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영화를 정하기 전에 지민이 먼저 잠들어 버렸다. 맨바닥에 누워 곤히 자는 지민을 건드리기가 조심스러워 얇은 담요만 덮어주었다. 조금 딱딱하더라도 더운 방보다는 거실이 나을 것 같았다. 윤기는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자신 쪽을 보고 잠든 지민을 바라보았다. 살포시 감긴 눈, 홍조끼가 도는 볼, 도톰하고 말랑해 보이는 입술... 입술. 윤기의 시선이 지민의 입술에 멈추었다. 왜일까, 갑자기 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한 건. 어지러운 머릿속에 고개를 돌려 천장만 바라보았다. 미쳤나 봐. 좋아하는 건가? 박지민을?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망했다. 망해도 단단히 망했다. 윤기는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마주 보고 잠에 들었다.
03, 가을날
중간고사가 끝난 날, 윤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단풍이 든 캠퍼스 길을 걷고 있었다. 뒤에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윤기는 직감적으로 지민임을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 어깨를 톡, 치며 지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험 잘 봤어?"
"잘 봤겠냐?"
"괜찮아, 나도 망쳤어. 밥 먹으러 갈래?"
"콜. 뭐 먹을까?"
"치킨? 맥주랑 같이."
"오케이, 우리 집에서 배달시켜서 먹자."
그날은 지민이 유난히 일찍 취한 날이었다. 지민의 집은 윤기의 자취방에서 결코 가깝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택시를 타고 가기는 애매한 거리였기 때문에 잔뜩 취한 지민을 집에 데려다주는 것보다는 윤기의 집에서 재우는 편이 나았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자꾸만 헤실헤실 웃는 지민을 보며 윤기도 같이 웃었다. 취기 때문이었는지 지민은 금세 잠에 빠졌다. 여름 같았으면 거실에서 자도 괜찮았지만 이제는 틀림없이 추울 것 같았기에 윤기는 지민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방을 내어주고 나가려 하는데, 지민이 윤기의 손목을 잡았다. 가까이 오라는 듯 끌어당기는 지민에 못 이기는 척, 떨리는 가슴을 숨기고 다가갔다. 지민이 아주 작은 소리로 무언가 속삭였다. 윤기는 그 말을 들으려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이었다.
촉,
지민의 입술이 윤기의 입술에 짧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민은 곧바로 잠에 들었다. 잠에 든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진짜로 자는 것 같아 윤기는 방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지민의 촉촉한 입술이 닿았던 제 입술을 만졌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첫 뽀뽀를 뺏겼다. 지민이 취했을 때처럼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첫 뽀뽀, 첫 키스, 사랑의 모든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진 저 아름다운 외계인에 제대로 홀린 제가, 그를 만나기 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04, 겨울날
12 월 24 일, 디데이. 윤기는 달력에 별을 큼지막하게 그렸다. 계획만은 완벽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지민과 영화를 보고, 시내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고백할 것이었다. 마침 일기예보에도 그날 눈이 온다고 나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흰 눈을 맞으며 하는 고백.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는 없었다.
윤기의 디데이는 조금은 이상할 정도로 순탄하게 흘러갔다. 날씨도 아주 춥지는 않아 저녁때가 되면 눈이 내릴 것 같았고, 지민과 같이 본 영화도 비극적이기는 했지만 좋았다. 영화관 건물 밖으로 나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광장에 다다를 때쯤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곧 트리의 불을 켤 것 같았다. 윤기와 지민은 트리 근처의 한산한 곳에 섰다. 알록달록한 전구들에 불이 들어와 반짝거렸다.
"지민아."
"으응, 윤기야.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어?"
"좋아해."
이건 계획에 없었다. 차이거나 받아주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지, 지민이 직접 고백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말을 멋있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말만큼은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좋아해, 민윤기."
너는 정말 한결같이 남들과는 다르구나. 처음에는 네가 외계인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네 고향 사람들 중에도 너와 같은 사람은 없을 것 같네.
"나도 네가 좋아. 그냥 너라서, 박지민이라서. 다른 멋있는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것만큼 정확한 건 없더라. 사실 나도 오늘 고백하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선수 쳐버렸네. 좋아해, 박지민."
말을 끝내자마자 윤기는 지민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얀 눈송이가 둘의 머리와 어깨 위에 앉았다. 첫 키스의 맛은 서툴지만 달콤하고 따듯했다. 한참이나 혀를 섞다가 숨이 찬 지민이 입술을 떼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숨을 고르고 윤기를 보려 시선을 돌리는 그 순간, 지민의 몸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자극 때문이었던 건지 꽃으로 변해버렸다.
윤기는 제 시야에서 지민이 사라지자 꽃으로 변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채고,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노란 꽃을 재빨리 주웠다. 누가 봤으면 어떡하지... 초조한 마음으로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기는 침대 위에 살포시 꽃을 내려놓고 지민이 다시 사람으로, 아니 외계인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지민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내가 알게 됐을 때 이후로 이런 적 없었잖아."
"야, 민윤기. 너 때문이야. 네가 너무 키스를 잘 해서 그래."
"...?"
"첫 키스 때 그러니까, 어... 너무 막 자극... 을 받으면 꽃으로 변하는 케이스가 종종 있대..."
"그런 거였어...? 근데 아까 누가 너 변하는 거 봤으면 어떡해?"
"괜찮아, 내가 이미 다 해결했어.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날 본 기억이 없게 조작해놨어."
"너 기억 조작도 할 수 있어?"
"꼭 필요할 때 조금만? 문서 조작도 가능해. 안 그랬으면 난 지금 불법체류자야."
아아, 너 외계인이었지. 지민이 워낙 지구에 잘 적응해 살다 보니 가끔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까먹을 때가 있었다.
"근데, 우리 아까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지민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기도 못 말린다는 식으로 웃으며 답했다.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날 밤은 유난히 별이 밝게 빛났고, 유난히 길었다.
05, 다시 봄날
겨우내 늘 붙어 있던 둘에게 다시 봄이 찾아왔고, 윤기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이제 곧 군대를 가야 하는데, 이미 갔다 온 친구 얘기를 들어 보니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나. 여태껏 지민이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딱히 무슨 임무를 수행하려고 온 것 같지도 않고, 평범한 대학 생활 외에는 하는 게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갑자기 불안해진 윤기는 며칠 뒤 지민의 집에 갔을 때 슬쩍 말을 건넸다.
"있잖아, 전에 네가 지구에 온 이유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그랬던 거, 혹시 지금은 알려줄 수 있어?"
"아, 응. 어머니가 정부에서 좀 높은 자리에 계셨는데, 어머니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문서가 봐서는 안 될 문서였나 봐. 아직도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결국 추방당했어. 당시에 우리 행성에는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어서 그냥 죽으라는 말이랑 다름없었는데, 와 보니 일억 년 사이에 살 수 있는 곳이 되어 있더라고."
"그러면 돌아가지는 않는 거야...?"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 그리고 우리 행성 사람들 수명도 지구인이랑 똑같아. 돌아가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텐데 뭐. 어어, 너 울어?"
"아니... 너무 슬프잖아..."
"하나도 안 슬퍼. 난 지금이 제일 행복해. 네가 있는데 어떻게 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겠어. 이거 진짜 운명, 그런 것 같네. 내가 지구로 향하는 우주선에 탔을 때는 인류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도착하니 네가 있다는 게. 꼭 우주가 우릴 위해 움직인 것만 같잖아."
윤기는 살풋 미소를 짓고 지민을 끌어안아 입을 맞췄다. 평생토록, 어쩌면 다음 생에도 사랑할 것이 분명했다. 우주를 가로질러 나에게 온 운명을, 빛나는 노란 꽃을, 나의 노란 우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