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제 네 짝을 찾아야 되지 않겠니? 평생 그렇게 독신으로 살면 회사는 어떻게 하려고..."
약 한 달 만에 가진 식사 자리에서 그가 꺼낸 말은 역시나 회사 걱정이었다. 대표 이사가 되기까 지 연애도 못해보고 일만 하며 살아온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결혼 얘기라니.
얼핏 들으면 아들을 걱정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결국은 회사 운영에 대한 걱정이었다. 별 다른 대답 없이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자 혀를 쯧- 차고는 10년 전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질 리지도 않는지 항상 같은 얘기를 하는 아버지에 작게 한숨을 쉬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13년 전 처음 회장 자리에 앉았을 때처럼 교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몇 년을 들어도 듣기 싫은 목소리에 골이 울려 식사를 끝내고 이 자리를 벗어 나고 싶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다 할 말이 끝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입는 모습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드디어 긴 식사가 끝났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먼저 식당 룸을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재킷을 팔에 걸치고 식당에서 나와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아버지 옆에 아무 말없이 서자 어깨를 두드리는 투박한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니 어깨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려 뒷 짐을 지고는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올라타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부탁이 있을 때 항상 어깨를 툭툭 치시고는 했다. 시야에서 차가 사라지자 한숨을 쉰 윤기가 재킷을 챙겨 입고 주차장 으로 걸어갔다.
Will you marry me?
열일곱,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새아버지가 자연스레 회장 자리에 올랐다. 처음 마주했던 새아버지, 이 회장은 제법 다정한 남편이자 가정적인 아버지 같았다. 친아버지와 다른 면이 많았지만 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고로 어수선했던 회사도 새아버지가 회장 자리를 맡게 되면서 다시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아버지의 모 습을 보여주었던 초반과는 달리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토를 달면 잔소리를 하거나 심할 때는 물건을 집어 던지고 폭력을 일삼는 등 난폭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나 술을 마시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와의 대화를 점점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화를 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회사와 경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해 회사에 입사하고 대표 이사가 된 지금까지 식사 자리에서 투자 얘기는 빠지지 않았다. 10년이 넘 도록 일상적인 대화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돈과 회사 얘기였기에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싶다 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피하게 되었고 대답도 간결하게 했다. 하지만 나이가 늘어나고 회사 직급이 올라가자 아버지의 설교도 점점 길어졌다. 그래서 아버지와 식사를 하는 날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녁 식사가 있었던 그 날 이후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결혼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2주에 한 번씩 본가에 모여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날, 평소에는 아무 말씀 없던 어머니가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 할 텐데...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니?"
"없으면 내가 한 명 소개해주마. 한솔그룹 알지? 김 회장 둘째 딸인데 스물 여덟에 예쁘고 참하니 까 한 번 만나봐라."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내는 아버지에 대충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서야- 먼저 가보겠다는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걸어가자 다 들 리라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잔소리를 해대는 아버지에 진절머리가 났다.
1년 전 누나인 윤지가 결혼에 대해 관여하는 아버지에 못 이겨 다른 기업의 부회장과 사랑 없는 보여주기식 결혼을 하는 걸 지켜본 윤기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 만 계속되는 아버지의 결혼 얘기에 저도 계약 결혼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결혼 문제가 코 앞으로 다가오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혼을 급하게 할 이유 가 없다는 생각이 컸지만 아버지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이 틀 무렵 눈을 뜬 윤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씻고 나와 정장을 입고,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맨 뒤 시계를 차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마다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먹 는 터라 회사에 출근하기 전 항상 가는 카페로 차를 몰고 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는 카페는 고요하기만 했다. 항상 사용하는 검은색 텀블러를 받 아 들고 카페를 나서자 서늘한 공기가 윤기를 반겼다. 회사에 도착해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 사실에 들어가 업무를 볼 준비를 하는데 핸드폰에서 띠링-하고 벨 소리가 울려 밝게 빛나는 화면 을 확인하니 아버지의 문자였다. 문자 내용을 읽은 윤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겼다.
'네 이름으로 스폰 몇 개 잡아뒀다. 자세한 건 정비서 통해서 보냈으니까 확인해보고 회장실로 직 접 오면 좋겠구나.'
3주간 결혼 얘기를 하더니 이제 제멋대로 제 이름으로 스폰 제의까지 하는 아버지의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유리로 된 책상에 소리가 나게 핸드폰을 내려놓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연 정 비서가 윤기의 앞으로 걸어가 서류를 건넸다. 검은색 서류철을 넘겨 프로필 사진과 이름, 나이 등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종이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정비서가 이사실을 나가 고 종이를 한 장씩 넘기던 윤기의 손이 멈췄다. 앳되어 보이는 사진과 별 다른 경력 없이 이름과 나이, 소속사만 적혀 있는 종이가 눈에 띄었다.
박지민 (22) HJ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출신
한참 사진을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 메일을 보내려다 종이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박지민씨 스폰 제의하려고 하는데요."
***
송월호텔 1703호... 매니저가 보낸 문자 메시지에 적혀있는 주소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 다. 연습생 생활을 하며 스폰을 받는 선배들을 많이 보았지만 직접 스폰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17층입니다- 안내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다고 생각하며 왔지 만 막상 호텔 방에 도착하니 긴장이 되었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후 카드키를 찍으려는 순 간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카드키를 떨어트릴 뻔했지만 허리를 숙여 인사 를 하고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지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윤기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쭈뼛쭈뼛 복도를 지나 앞서가는 윤기를 따라간 지 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앉아서 얘기할까요?"
윤기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다 머뭇거리며 소파에 앉자 빈 자리에 윤기가 앉았다. 아무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 윤기가 명함을 테이블 앞으로 내밀었다. 흰색 배경에 '민윤기' 석 자가 적힌 명함을 쳐다보다 말을 꺼내는 윤기에 고개를 들었다.
"기본적인 건 거기에 다 적혀있고, 전화번호는 따로 알려줄게요."
원래 이런 건가...? 스폰이 처음이었기에 이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될 지 몰라 괜히 명함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무 대답이 없는 지민에 어딘가 불편한 건가 생각을 하던 윤기는 소파에서 일어나 룸서비스를 시키기 위해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아침부터 오느라 배고프겠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나지막 이 물으며 명함만 만지작대는 지민을 쳐다보았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지민에게 정말 아무거나 시켜도 되냐고 묻자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 는 걸 보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이게다뭐야... 테이블을 가득 채운 접시에넋을 놓고 서 있던 지민이 앉으라는 말에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밑에서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자 지민의 맞은 편에 앉은 윤기가 포크를 지민 앞으로 내밀었다. 두 손으로 포크를 받아든 지민은 이내 고민되는 표정으로 포크를 손에 쥐고 있다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안으로 넣었다. 원래 이렇게... 편안한 건가? 식사를 하면서도 의문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하는 듯한 식사에 별 말없이 잘 먹는 지민이었다. 지민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던 윤기는 식사를 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물어보았다. 작은 입으로 우물대며 대답을 하던 지민을 보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말을 꺼냈다.
"나랑 결혼할래요? 진짜 결혼 말고 정략 결혼. 가수, 다시 할 수 있게 해줄게요."
"크흡, ᄂ, 네??"
물을 마시다 윤기의 말을 듣고 사레가 들려 콜록대는 지민에게 괜찮냐며 냅킨을 건네주었다. 그 새 얼굴이 발개져 냅킨을 손에 쥐고 연신 되묻자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계약서만 작성해주면 다른 건 신경 안 쓰고 1년 뒤에 이혼 처리 해줄게요. 어때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지민이 곰곰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가 수가 다시 하고 싶었지만 결혼, 그것도 정략이라니.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조용히 지민을 기다리 던 윤기가 테이블 위로 계약서와 만년필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당황스러울 거 아는데 별 건 없고 스케줄 없는 날 한 번씩 오늘처럼 식사 만 같이 해주면 되니까, 한 번 읽어 보고 원하는 거 있으면 적어줘요."
지민이 앞에 놓여있는 두 장의 계약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한 장은 윤기가 적어놓은 조건이 적 혀 있었고 한 장은 비어 있었다. 윤기의 조건은 누구든지 수락을 할 만한 좋은 조건이었지만 지 민은 고민이 되어 쉽게 적지 못했다. 한 편으로는 회의감도 들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래가 좋고 춤이 좋아서 가수를 하고 싶은 것뿐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만년필로 생각 나는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귀엽네. 작게 중얼거리며 계약서를 채워 나가는 지민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에 안 드시 는 거 있나,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던 윤기의 웃음에 걱정이 된 지민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윤기 를 쳐다보았다. 저... 다 썼는데...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하는 지민에 계약서 하단에 있는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다시 만년필을 들어 서명을 하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윤기까지 서명을 마치 고 계약서를 나눠 가졌다. 계약서 마지막 줄에는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절대 서로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짧지 않았던 식사를 끝내고 윤기가 키패드가 떠있는 핸드폰을 앞으로 내밀자 지민이 윤기를 쳐다 보았다.
"번호 찍어줘요. 회사에서 쓰는 거 말고 개인 폰."
두 손으로 핸드폰을 받아든 지민이 가족과 지인들만 알고 있는 번호를 입력했다. 다시 핸드폰을 건네받은 윤기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지민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번호 저장해놔요. 급할 때 연락해도 되고. 재킷을 챙겨 입으며 말하는 윤기를 쳐다 보던 지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한테 스폰... 하시는 거예요?"
지민의 말에 잠깐 멈칫한 윤기가 대답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는데. 회장님이 주신 명단에서 제일 눈에 띄었어요. 오늘 만나보니까 조금만 서포트해주면 잘할 것 같기도 하고. 궁금증이 좀 풀렸나?"
칭찬... 오랜만에 들어본다. 데뷔 초 이후로 제대로 된 칭찬을 받아보지 못해 기분이 묘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숙소까지 데려다준다는 윤기에게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 탈 건데 한 번 타보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외제차는 처음이라 신기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운전석에 앉은 윤기가 안전 띠부터 매라는 말을 하고 시동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숙소 앞에 도착해 차를 세우자 지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윤기가 쳐다 보고 있다 생각하니 걸음이 어색해져 걸음을 빨리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여서 계단으 로 숙소가 있는 2층으로 올라 가 회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문의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나고 신발을 벗은 뒤 거실로 들어가자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제법 오래 살긴 했지만 만족하며 생활해왔는데, 이사 갈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를 가기엔 금전적 여유가 없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다 문득 윤기 생각이 나 소파에 앉아 몇 시간 전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기업 관련된 일에는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윤기에 대한 소문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완벽주의자라 직원이 조금만 실수를 해도 잘라버린다는 등 좋지 않은 소문에 비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1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괜찮을 거라 믿기로 했다.
차에서 내려 빌라로 들어가는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가 건물 외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족히 20년 은 된 것 같은 허름한 건물에 숙소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상이긴 하지만 결혼을 한 사이이니 지민의 동의만 있다면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에서 함께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물음표를 던졌다. 혼자 살기에는 넓은 데다 방도 많아 서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어 괜찮은 조건이었다. 출퇴근하기에도 숙소보다 좋은 데다 어차피 2주에 한 번씩 만날 거 같이 사는 것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만남 때 얘기를 해봐야겠다 마음을 먹고 회사로 돌아갔다.
윤기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날 이후 2주 정도가 지나 연습실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윤기에 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음악을 멈추고 전화를 받자 저번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할 얘기가 있어서. 괜찮다는 지민의 대답에 윤기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자 지민이 거 울을 쳐다 보았다. 땀을 흘려 몰골이 말이 아닌 얼굴을 보고 숙소에 가서 준비를 하기 위해 연습 실을 나섰다.
숙소에 도착해 머리를 감고 샤워까지 한 뒤 몇 벌 없는 옷장을 보며 고민을 했다.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준비에 공을 들이는 제 모습이 조금 웃겼다. 그 사람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 쓰 는 건지. 저녁 약속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아 깔끔하게 검정 슬랙스에 니트를 입고 평소 에 하지도 않던 고데기까지 하고는 숙소 밖으로 나와 윤기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정 차가 숙소 앞에 멈췄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긴장이 되어서 조수석에 앉아 아무 말없 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지냈냐는 윤기의 물음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대화가 끊기 자 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5분 정도가 지나 한정식 집에 도착한 둘은 아무 말없이 예약된 룸 으로 들어갔다. 뭘 좋아할 지 몰라서, 한정식 좋아해요? 윤기가 건네주는 메뉴판을 받아들고는 윤 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지민이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메뉴를 골라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별 다른 대화 없이 기다리다 윤기가 말을 꺼냈다.
"혹시, 이사 갈 생각 없어요? 지금 사는 데 오래됐기도 하고 서류상이긴 해도 결혼한 사이니까... 같이 사는 건 어떤가 싶어서. 집은 넓어서 마주칠 일 많이 없으니까 혼자 살 때랑 별로 다를 거 없어요."
"...제가 이사님 집에서 산다구요?"
"난 거의 침실이나 서재에 있으니까 다른 건 자유롭게 써도 돼요. 부담스러우면 집 알아봐 줄게요."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요... 이사를 가고 싶다 생각은 했지만 생각지 못한 윤기의 제안에 고민이 되었다. 고민되는 얼굴을 하는 지민을 본 윤기가 뒤이어 말을 이었다.
"아니면 한 번 와서 보고 결정할래요?"
고민을 하던 찰나에 윤기의 말을 들은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이어 음식이 나왔다. 행복한 표 정으로 식사를 하는 지민을 보던 윤기가 식사를 이어 나갔다.
우와... 진짜 넓네. 식사를 마치고 윤기가 사는 오피스텔에 온 지민은 집에 들어서자 감탄사를 내 뱉으며 어린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화에서 볼 법한 넓은 거실과 큰 티비에 넋을 놓은 채 바라보는 지민에 윤기가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잘 됐다는 생각을 한 윤기는 지민이 쓸 만한 방으로 걸어갔다. 저 진짜 여기서 살아도 돼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로 윤기에게 물은 지민이 방 앞에 도착해 아까와 같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숙소 거실과 옷방을 합친 크기와 맞먹을 만큼 넓은 방에 쉽게 말을 잇 지 못하자 입구에 기대 선 윤기가 말했다.
"이 방 쓸래요? 짐은 퇴근하고 같이 가서 챙겨 와요. "
침대도 손으로 눌러 보고 커튼도 만져보던 지민이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잘 웃 는 지 몰랐네. 시계를 확인하자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침에 새 잠옷이 있나 생각을 하며 지민에 게 다시 물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자고 갈래요? 잠옷 새것 줄게요. 화장실에 샴푸랑 다 있으니까 쓰면 돼요."
"그래도 돼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봐요. 잠옷 가져다줄게요."
이렇게 좋은 집에 한 번쯤은 살고 싶었었는데.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지민이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다 잠옷 한 벌을 들고 오는 윤기에 잠옷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서는 윤기를 뒤로 하고 잠옷과 함께 받은 가운을 챙겨 욕실로 갔다. 언제 준비해둔 건지 욕실에 들어가자 새 칫솔과 스킨 케어 제품들이 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네, 생각을 하기도 잠시 피곤함이 몰려와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갔다.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 입은 뒤 침대에 몸을 눕히자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포근한 이불에 잠이 쏟아졌다. 밤마다 서너시 간을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드는 게 일상이었던 지민은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떴다. 항상 찌푸둥했던 몸이 오늘따라 가벼운 느낌이 들어 몸 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덕에 아침마다 뭉치는 어깨도 아프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멍을 때리다 이불 밖으로 나와 커튼을 걷자 햇살이 내리쬐어 눈이 부셨다. 이불 정 리를 하고는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긴 복도를 걸어 거실 로 가던 지민은 윤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 식탁에 놓여 있는 작은 쪽지와 검정색 카드를 발 견하고 식탁 앞으로 갔다.
먼저 출근하니까 일어나서 배고프면 먹고 싶은 거 사 먹어요
난생 처음 보는 블랙카드에 눈을 동그랗게 뜬 지민이 쪽지를 읽고는 이내 행복한 표정으로 배달 어플을 켰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떡볶이를 시킨 지민은 배달이 오자 세팅을 하고는 수저를 들다 가 문득 윤기에게 잘 먹겠다는 문자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떡볶이 사진과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맛있게 먹어요
(사진) 떡볶이 시켰어요! 잘 먹겠습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10분 정도가 지나서 윤기에게 답장이 왔다.
이런 거 안 좋아하시나... 윤기의 문자 메시지를 읽고 괜히 보냈나 걱정을 하던 지민이 이내 다시 밝은 표정으로 떡볶이를 입 안에 넣었다.
한 편, 업무를 보던 중 지민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윤기는 사진과 텍스트만 봐도 지민인 게 느 껴지는 문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락은 용건만 간단히 하는 편이라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을 하다 짧게 답장을 보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이 나빴을 문자도 지민이 보내면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곧장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한 윤기는 자꾸만 지민의 생각이 나 애써 잊으려고 했지만 잊혀지지 않아 한숨을 쉬었다. 사랑이란 걸 해보지 못해 그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란 걸 깨닫지 못한 윤기는 그저 지민을 지인 정도로 생각을 했다.
퇴근을 하고 지민과 함께 숙소에 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넓지 않은 방을 정리하며 추억을 회상하던 지민이 빈 박스에 그다지 많지 않은 옷가지와 물품들을 집어넣었다. 언제 얘기를 해둔 건지 소속사에서는 주소 이전을 하라는 문자를 보내왔고 남은 것들은 폐기를 한다는 말에 필요한 짐들만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트렁크에 짐을 실은 윤기가 운전석에 올라타며 조수석에 앉은 채 로 밖을 쳐다보고 있는 지민에게 물었다. 아쉽거나 그러진 않아요? 윤기의 질문에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선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았거든요. 그래서 별로 아쉽지는 않아요."
지민의 말을 듣고 아무 말없이 시동을 건 윤기가 부드럽게 차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
금방 적응을 했지만 어색해하던 동거 생활도 두 달 정도가 지나자 익숙해진 지민이 좀 늦을 것 같다는 윤기의 문자에 티비로 영화를 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 지만 한 번씩 구미가 당길 때 혼자 마시고는 했다. 윤기를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 았던 지민은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안주도 없이 계속 해서 술을 마셨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 만취 상태가 되어 얼굴이 발개진 채로 소파에 드러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띠리릭- 평소보다 늦게 퇴근을 한 윤기가 집에 들어와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지민을 발견 했다. 얇게 입고 있어서 추운 건지 웅크린 채로 누워 있는 지민에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자 뒤척 이며 웅얼대는 소리를 낵던 지민이 눈을 슬며시 떴다. 융기씨네에~ 말 끝을 늘리며 웃는 지민을 바라보자 숨을 내뱉고는 웃음기가 빠진 얼굴로 얘기하는 지민에 아무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요 춤이 좋아서 여기 왔는데에... 그게 맘대로 안 됐다? 그래서 마지막이다- 하고 오디션을 본 데가 붙어서 되게 좋아했거등요? 근데 회사에서는 막 매니저도 안 붙여주고 어, 활동해도 인기도 없고 그래서 해체를 했단 말이에여. 회사에서는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아무것도 안해 주니까 다른 애들은 회사 나가서 막, 솔로도 하고 그러는데 난 봐주는 사람도 없고 능력도 없구... 그래서 연습생 때처럼 맨날 연습만 했다? 그랬더니 막 스폰 들어왔다고 하면서 윤기씨를 만나라 는 거예여. 처음에 윤기씨 보고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는데에... 막 나한테 뭐 먹을 거냐고 물어보고 막, 잘해주고 그러니까 내가 자꾸 헷갈려서어... 난, 난, 윤기씨 좋아하는데, 나 안 좋아할 테, 니까..."
말을 하다 울먹이는 지민에 어쩔 줄 몰라하던 윤기가 마지막 말을 듣고 지민에게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감정에 티가 나지 않은 편이었기에 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자신은 지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되새겨보았다.
차를 타거나 할 때면 말을 걸고 싶고 무언가에 집중을 하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 짓는 표정이 귀 엽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게 사랑임을 이제서야 깨달은 윤기는 우선 훌쩍이고 있는 지민을 달랬다. 우는 모습이 마치 찐빵 같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박한 손으로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자 진정이 된 건지 지민이 숨을 고르며 윤기를 쳐다보았다. 필름이 끊기지 않아 다음날 아침 모든 게 기억이 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윤기에게 한 말은 후회가 되지 않았다. 안아 달라며 팔을 벌리는 지민을 품에 안은 윤기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일 아침에 아까 한 얘기 한 번 더 말해줘요."
아으 머리야-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자 방문이 열렸다. 허공을 응시하다 윤기에게로 시선을 옮긴 지민이 전날 밤 윤기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며 이불 속 으로 숨었다. 속은, 괜찮아요? 입동굴을 보이게 웃던 윤기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물었다. 부끄러우니까 오지 마요오... 이불에 고개를 파묻고 얘기를 한 지민이 방을 나서는 윤기를 따라 주방으로 갔다. 아직 발간 얼굴로 의자에 앉자 식탁에 직접 끓인 콩나물국을 올린 윤기가 지민의 맞 은 편에 앉았다. 국물을 한 입 떠먹은 지민이 괜찮냐는 윤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계속 해서 국을 떠먹었다. 그런 지민을 바라보다 진지한 표정을 한 윤기가 말을 꺼냈다.
"우리 진짜 결혼할까요?"
아무 생각 없이 윤기를 보고 있다 윤기의 말에 지민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드도 없고 뜬금없다 생각할 텐데... 나 지민씨, 사랑해요."
이어지는 윤기의 말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이내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났다. 대답을 기다 리다 눈물을 흘리는 지민에 윤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지민의 옆으로 갔다. 얼굴을 두 손에 파묻 고 있던 지민이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는 나, 만 윤기씨 좋, 아하는 줄, 알고 왜 얘기도, 안 하고, "
말 끝을 흐리다 다시 눈물을 흘리는 지민에 윤기가 두 손으로 양 볼을 조심스럽게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지민씨 두 번이나 울리고, 내가 잘못했네. 어제처럼 눈물을 닦아주자 조금 진정이 된 지민이 윤기를 끌어안았다.
"나 윤기씨랑 결혼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