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틸버스를 배경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민윤기의 어린 날을 장식하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마 당이 있고, 별채가 달린 아주 예뻤던 한옥. 그날의 기억 탓에 민윤기는 기억 속의 공간과 똑같이 생긴 집에서 사는 꿈을 꾸게 되었다. 연못엔 붉은 금붕어를 두어 마리 정도를 풀어놓고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창밖 풍경이 달라질 수 있도록 많은 꽃을 심을 수 있는 그런 곳. 그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이 파도 앞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전까지, 그는 그런 꿈을 꿨다.
유난히 더 발광하던 가로등과 끝을 알 수 없는 이명, 눈앞에서 흔들리는 플래시와 계속해서 민윤 기의 이름을 부르던 낯선 이들. 물에 빠진 스피커처럼 먹먹하던 주변 소리가 한순간에 증폭되는 순 간 그를 태운 구급차의 문이 굳게 닫혔다.
삭막한 공간이 주는 공허함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에 윤기의 정신이 번쩍 들었 다. 금이 가 붕대로 팔을 칭칭 감고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그는 이곳에서 도망치 고 싶어졌다. 삼 일 내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던 윤기의 눈엔 어느새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더 나빠진 컨디션 탓일까, 몸 전체에 퍼진 열꽃에 윤기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삼 일 내내 끙끙 앓았다.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잠들 때마다 그는 늘 푸른 꽃밭에서 눈을 떴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 은 색채의 선명함이 두려워 도망칠 때마다 늘 넝쿨에 걸려 넘어졌다. 파란 장미 위로 엎어진 민윤 기는 꿈에서 기절할 듯이 울었다. 깰 때마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윤기는 문득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열여덟의 나이에 찾아온 스테먼의 첫 각성이란 걸 윤기는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장 엊그제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단 것은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중인 윤기에게 너무나도 큰 공포이자, 태어나 처음 겪은 허탈함이었다. 바 짝 메마른 입술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날, 짐을 챙기던 윤기의 뒤로 누군가가 그를 와락 안고선 그동안 자신이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억하겠 냐는 말에 윤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낯선 이를 경계하던 그는 순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제 어머니의 아주 오래전 친구였다던 사람에게 거둬졌다. 그는 윤기에게 ‘당장은 힘 들겠지만, 다시 시작해보자 윤기야. 새로운 곳에서. 응?’ 이라 말하고는 퉁퉁 부은 민윤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윤기야, 기억나? 어릴 때 네가 이모 집에 있는 꽃들을 좋아했었는데. 그리고 또 금붕어도. 가족을 잃은 열여덟 살을 달래기엔 부족한 말이었음에도 윤기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옛 기억 속의 집 이 점점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윤기의 얼굴이 수척했다. 지친 듯 몸을 둥글게 말고 아직도 남아있는 열기에 윤기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차 안에서 또다시 꿈을 꾸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의 장미를 한 아름 받아든 윤기가 꽃다발 대신 그들의 손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정신없이 제 가족을 부르던 윤기가 끝내 눈을 뜨자 그의 앞에 이제 막 젖살이 빠진 듯한 낯선 아이가 젖은 수건을 툭 떨구고는 놀란 눈으로 그와 마주했다.
TRAUMA 윤기 X 지민
맑은 종소리 아래, 마루에 앉아 연못을 헤엄치는 금붕어를 멍하니 구경하던 윤기가 인기척을 느 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자신이 사는 별채 옆의 나무 기둥만 바라보았 다. 잠시 뒤 작은 손 하나가 기둥 뒤에서 튀어나왔다.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낸 아이는 잔뜩 상기된 볼로 윤기를 힐끔거리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은 없고 바람결에 자개가 달린 종만 바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번 겨울이면 중학교를 졸업한다기에 키와 덩치가 자신과 비슷할 줄 알았으나 그 아이는 윤기 보다 조금 작고 덩치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았다. 품이 큰 조끼 밑단만 만지작거리던 아이의 가슴팍 에 노란 실로 박지민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이름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는 윤기 자 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곤 문 앞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지민도 그를 따라가기 위해 한쪽 어깨에만 메고 있던 가방을 똑바로 메고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제 인생에 나 타난 사람인데도 경계하지 않고 졸졸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꼭 사람 손을 잘 타는 새끼 고양이 같 다고, 윤기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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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교에서의 첫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개학식이 있는 3월이 지났기도 하였고 이학년 이 되고 나서야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윤기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붙었다. 전에 있던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던가, 앞뒤가 맞지도 않는 엉터리 말들이었지만 윤기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차가운 인상에 잘 웃지도 않고,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꼭 그와 얘 기를 해본 척을 하며 소문을 부풀리기 바빴다. 하지만 다행히 그 소문은 금방 가라앉았다. 강당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는 어떤 학생의 이야기가 민윤기의 꾸며진 과거 이야기보다 더 자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반의 걔에서 단 며칠 만에 ‘그 피스틸’이라고 불리게 된 학생의 이야기는 민윤기에게도 들려 왔다. 날개뼈까지 뻗어있는 나뭇가지를 보기 위해 반 앞은 늘 북적거렸고, 일찍이 각성한 스테먼들 이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있는 구조여서 지민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도 종종 민윤기의 눈에 띄었다.
그날따라 일찍 끝난 종례에 윤기가 서둘러 복도를 나서던 중이었다. 그러다 그는 현재 이곳의 유명인사가 된 학생의 반 앞에 모인 학생들 사이에서 웃고 있지 않은 지민을 발견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온 지민은 현재 상황이 그다지 즐겁지 않은 듯했다.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눈 치를 보는 것이 혹여나 누군가와 마주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민윤기는 멀리서 지민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박지민.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 온 목소리에 놀라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낯선 목소리에 복도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미간을 찌푸 린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윤기와 눈이 마주친 지민의 표정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안 가?”
그 말에 자신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있던 친구를 황급히 뿌리친 지민이 윤기의 뒤를 쫓았다. 내일이면 또 다른 소문이 붙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윤기는 처음으로 지민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늘 자신의 앞으로만 걷던 윤기의 행동이 어색해 지민은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지민이 놀란 듯 말을 더듬거리며 윤기에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까는 친구가 끌고 간 거라. 제가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
“.......”
“...덥다. 다음 주부터 방학이라 다행이에요. 그죠.”
방학으로 화제를 돌리는 지민의 말에 윤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응, 다행이네. 제 말 한 마 디에 잔뜩 긴장되어있던 표정이 사르르 풀어지는 지민을 보니 윤기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무시 받는 느낌 들었으려나. 그런 생각에 윤기의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그것도 모르고 바닥만 보며 걷던 지민이 제 옆에 윤기가 없단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뒤늦게 몸을 돌렸다.
제 키보다 높은 담벼락이 시작되는 곳, 그 옆에서 윤기에게 말 대신 표정으로 무슨 일이 있냐며 묻는 지민의 얼굴 가까이에 파랗고, 하얀 야생화들이 담벼락을 타고 활짝 피어있었다. 그때 윤기는 그날 꾸었던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저것보단 더 크고, 진한 색의 장미였음을 그는 정확하게 기억하 고 있었다.
“형, 안 가요?”
“...너.”
“네?”
“너 뭐 좋아해.”
빨개졌다. 지민의 모습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햇빛 아래에 오래 있어 금세 타버린 것인지 붉은 볼을 띈 지민이 놀란 듯 딸꾹질을 시작했다.
**
집으로 가는 동안 윤기가 알게 된 지민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 보다는 집에 있는 연못에서 금붕어를 구경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참 많은 아이라고,
윤기는 제 옆에서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지민을 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어찌 참은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느덧 도착한 집 앞에서 윤기를 멈춰 세운 지민이 아까와는 달리 비장한 모습으로 그 에게 말했다. 다음번에는 형 얘기 들려줘요. 그리고는 덧붙여 아까 너무 자기만 이야기한 것 같아 민망했다며 지민은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계절이 지났다. 중학생이었던 지민은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윤기는 대학 생이 되어 있었다. 지민은 윤기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다녔다. 이제는 노란 실이 아닌 플라스틱 명찰에 박아넣은, 아직도 새것의 티를 내는 지민의 명찰을 빤히 보던 윤기가 장난기 가득 한 미소를 지으며 말도 없이 지민의 머리를 흩트렸다. 윤기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지민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같은 학교를 따라다녀봤자 형은 늘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게 싫다며 지민은 윤기의 옆에 엎어진 채로 누워 발만 동동 굴렀다. 개학 전에 하고 싶었던 염색을 전부 해보겠다던 지민은 어느새 다시 검정으로 덮인 제 머리를 무척이나 아까워했다. 잘 어울리는데 왜. 윤기가 다정하게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만져주니 지민은 고개를 제 팔에 스르륵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형만 그렇게 생각해요.
또 빨개졌다. 손 틈새를 스치며 떨어지는 지민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만지던 윤기의 시선이 지 민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튼 채 옆으로 자신을 보던 지민과 눈이 마주치고 나 서야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근데 형은 어떤 꽃 좋아해요.”
“갑자기?”
“아니, 그냥 궁금해서어....”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너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꽃이 뭐냐면.”
형의 꽃이라면 그게 뭐든 다 좋지 않을까, 라는 말을 지민은 속으로만 삼켰다. 아직 각성도 하지 않은 케일릭인 지민은 차라리 자신이 스테먼이든 피스틸이든 상관없이 무언가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보았던 고등학교 친구의 어깨 위에 활짝 피어있던 동백꽃을 떠올린 지민의 심장 한 부근이 바늘에 찔린 듯이 아팠다.
일찌감치 민윤기가 스테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몸살이라는 문자와 함께 자신의 중학교 졸 업식에 오지 못했던 윤기의 열병이 자그마치 보름이나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몸살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죽을 듯이 이불 속에서 소리를 내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윤기가 지내는 별채 앞에 서 한참 동안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던 지민은 잔뜩 날이 선 윤기가 문을 열고 나오자 쏜살같이 나 무 뒤로 숨었다. 지민은 윤기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음을 확인하곤 급히 그의 목 뒤를 살폈다. 평 소보다 무거워 보이는 윤기의 어깨와 목에 나뭇가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지민의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언젠가 윤기가 자신의 형질을 말해주겠거니 생각하던 지민은 한참이 지나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윤기에게 제법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는지, 뭘 했는지 얘기라도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지민의 마음을 통 알아차리질 못한 것인지 윤기는 지금까지 도 지민에게 자신이 스테먼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잔뜩 토라진 지민을 이해할 수 없 다는 듯이 웃으면서 왜 그러냐 묻는 윤기에게 지민 역시 제 자존심 탓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야, 같은 학원 다니는 애가 알려줬는데, 걔 사촌 애인이 베놈 스테먼이라서 완전 난리였대.”
“그게 뭐야.”
“주로 독 있는 꽃 가진 사람들. 잘못 걸리면 평생 다른 사람도 못 만나고 그렇대. 죽을 수도 있
고.”
“...케일릭도?”
“그건 모르겠는데 케일릭은 괜찮지 않나.”
걔들은 꽃이 안 피잖아. 친구의 말에 밥을 먹던 지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깨작깨작 젓가락질하던 지민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자신이 언제부터 민윤기의 꽃에 이렇게 집착하게 됐 는지 지민은 알 수 없었다. 다 먹은 식판을 들고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을 툭툭 치며 운동장으로 나 오라던 친구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터덜터덜 운동장으로 나오자 공을 옆구리에 낀 채로 지민의 앞을 막아선 친구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듯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살피자 작년 윤기 와 같은 농구부에 있었던 선배들 몇 명과 윤기가 농구장에 모여있었다. 그가 올 줄 몰랐던 지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한테 연락도 없었으면서. 입술을 삐죽이던 지민은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 늘 밑에 있는 벤치로 향했다.
고작 2학년이 선배들에게 어떻게 경기장을 빌려달라 할 수 있겠냐. 그 말을 끝으로 나란히 앉아 있던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며 집중하는 지민을 슬쩍 보던 친구의 표정이 짓궂게 변해갔다. 저 형 너랑 살지? 그 말에 지민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유명했잖아. 우리 중학생 때 저 형이 너 불러서 다들 뭔가 했을걸.”
“근데 같이 사는 건 어떻게 알아?”
“작년 졸업식 때 스친 적 있었거든. 그때 지나쳐가는데 너랑 같은 향 나길래.” “뭐래. 그런 걸로 어떻게 알아.”
다 그런 게 있어-. 지민의 어깨 근처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친구의 행동에 기겁하며 몸을 뒤 로 뺀 지민의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어떤 향수를 쓰길래 향이 이렇게 진하냐며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어색하게 웃던 지민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멍하니 자신과 친 구를 바라보던 민윤기의 모습에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우, 우리 이제 가자. 말을 버벅거리며 황급히 자리를 뜨는 지민의 뒷모습에 윤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연애해?”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 민윤기의 말에 지민이 눈동자를 굴렸다. 죄 없는 과일만 포크로 쿡쿡 찌르던 윤기는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 알려주던 지민이었 는데 처음 보는 애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행동했으면서, 자신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가 버렸던 것이 자꾸 윤기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냥 친군데.”
“.......”
“걔 그냥 학교 친구예요.”
“그래.”
“진짠데....”
윤기의 눈치를 보며 사과를 오물거리던 지민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형은 연애해요? 벽에 기댄 채로 앉아 금붕어들을 구경하던 윤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했으면 좋겠어? 여유롭게 발을 까딱거리며 웃고 있는 윤기의 모습에 지민은 제 심장이 콕콕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입이 삐 죽 튀어나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통한 표정으로 윤기를 따라 애꿎은 과일만 포크로 괴롭혔다. 그런 지민의 입술에 사과 하나가 툭 닿았다.
“나는 더 나중에 하지 않을까. 아예 안 할 수도 있고.”
“왜요....”
“나 스테먼이거든.”
피스틸과 스테먼이 관계를 맺으면 스테먼이 가진 고유의 꽃이 피스틸의 등에 새겨진 가지를 따 라 핀다. 더 이상 꽃이 피어날 공간이 없거나 일정 수의 꽃이 피면 생명에 지장을 준다. 지민은 그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윤기의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손해는 모두 피스틸에게 가니까 그것이 무섭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말을 이어가던 윤기가 혀를 찼다.
“그니까, 형이 스테먼이라는 거죠?”
“너 알고 있잖아.”
그날 너 봤거든. 그리고 다 들려. 너 도망가는 소리. 그는 태연하게 접시에 남아있던 마지막 과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웃었다. 당혹스러움에 지민이 발을 동동 굴렀다. 또, 뭐 알고 있어요...? 왠지 모르게 초조한 듯한 지민의 물음에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꽤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지민을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였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반은 장난, 반은 호기심. 지민은 그런 윤기에게 답은 주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또 빨개졌으려 나. 윤기의 시선을 읽은 지민이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지민은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도망쳤다. 지민이 머물다 간 곳엔 더운 바람만 맴 돌았다. 윤기의 머리 위로 달려있던 종과 그 밑의 자개들이 시끄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마루 위를 툭툭 손가락으로 치던 윤기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
하루아침 사이에 달라진 계절 탓에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달고 깨어난 지민이 어제보다 무거워 진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서서는 혹시라도 자는 사이에 각성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까 싶은 마음에 몸을 돌려 등을 확인한 지민은 기대와 달리 말끔한 피부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빠르게 교복을 입고 현관문 앞의 거울 앞에서 일부러 쭈뼛거리다 윤기가 나가는 소리가 들 리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지민의 발소리에 윤기가 걸음을 멈췄다. 왠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표정에 무슨 일이 있나 물으려던 윤기의 옆으로 누군가가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민과 윤기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학교에 가냐는 말과 함께 윤기에게 가까이 붙은 남자는 왠지 모르게 지민과 비슷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었다. 지민이 윤기의 옷소매를 당기자 윤기가 뒤늦게 그를 소개했다. 이름은 지원. 작 년 같은 반을 다니다 우연히 또 같은 대학교에 가게 된 친구라고 말하는 윤기의 시야에 그를 불편 해하는 듯한 지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강의실에서 보자며 윤기의 어깨를 툭 치고 가는 지원이 활짝 웃자 동시에 지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상치도 못한 친구의 등장에 어쩐지 자꾸만 지민의 눈치가 보였다. 끝나고 후문 앞에서 기다릴 까? 나 오후 수업 일찍 끝날 텐데. 윤기의 물음에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지민은 아까 전 지원의 목 부근에서 언뜻 보인 나뭇가지를 떠올리고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자신을 지나쳐 먼저 정류장으 로 향하는 지민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윤기의 표정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학교에 도착한 지민은 제 친구들이 던지는 장난도 받아줄 수 없을 정도로 심란했다. 자신과 윤기 가 같이 사는 것을 아는 친구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어도 지민은 책상에 엎드려 대답을 피했다. 작년부터 꽤 친했던 것 같은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지민은 새로운 게 없는 인스타그램 피드만 내 렸다. 점점 느려지던 손가락은 어느새 지원의 이름을 치고 있었다. 넘쳐나는 지원들 중 윤기와 같은 대학교를 프로필에 올려놓은 사람의 피드에 들어간 지민이 그곳에서 윤기와 그가 찍은 셀카를 발견 하곤 얼어붙었다. 동아리실 쇼파에 누워 자는 윤기 옆에 가까이 붙어 찍은 사진에서 지민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 고민하던 지민이 서둘러 윤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축제 해요?] 오전 10시 13분
[말해주려고 그랬는데. 다음 주에 해. 올래?] 오전 10시 13분 [친구랑 같이 가도 돼요?] 오전 10시 14분
[마음대로 해. 맛있는 거 사줄게] 오전 10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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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고 해서 왔더니만. 지민은 제 앞에서 자신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얘기하기 바쁜 윤기와 그 옆의 지원을 보며 맛도 없는 떡볶이나 씹었다. 친구는 무대를 보러 간다며 헤어진 지 오래고 지원 은 윤기 옆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슬쩍 보이는 지원의 나뭇가지에 지민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는 그들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주병 사이에 사이다 한 캔을 쿵 내려놓은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기에게 말했다. 형 학교 구경 좀 시켜주면 안 돼요? 술 때문에 빨개진 볼의 윤기가 멍하니 지민을 올려다보다가 망설임 없 이 제 폰과 지갑을 챙겨 지민을 따라 일어섰다. 테이블에 혼자 남은 지원과 시끄러운 분위기를 등 지고 한적한 캠퍼스 안으로 향하던 지민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쿵쿵 울리던 음악 소리가 그들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신이 난 듯 잔디밭 위를 가볍게 걷던 지민 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지민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던 윤기는 푸른색 꽃이 잔뜩 달린 화단 앞에 서 있는 지민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잘 어울린다. 윤기가 말했다. 알딸딸한 기분에 자기 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지민은 다 알면서도 그에게 되물었다. 나랑 어떤 거요? 지민의 물음에 손끝으로 꽃을 가리키던 윤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형은 파란 꽃 진짜 좋아하나 봐.”
“왜?”
“맨날 보고 있잖아요.”
“내 꽃이 파란색이라서 그런가. 자꾸 보게 돼.”
생각지도 못한 답에 지민이 움찔했다. 그게 정말이냐고 묻는 그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던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는 그의 대답을 들은 지민이 갑자기 잔디 위에 있던 파란 꽃을 주워 제 손에 모았다.
그럼 내가 형의 꽃을 달고 있으면 더 봐주려나. 지민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폭죽이 캠퍼스 위로 크게 터지기 시작했다. 눈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고 허둥대던 지민의 목과 귀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지민은 지금이 밤이라서 윤기가 제 빨개진 얼굴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형형색색의 폭죽 아래에서 윤기와 지민이 서로를 마주한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못 들었겠지. 아쉬움에 지민이 애써 밝게 웃었다. 다른 곳도 구경시켜 주면 안 돼요? 지민의 말에 윤기가 뒤늦게 반응했다. 꽤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던 윤기가 때마침 제게 걸려온 전화를 받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지민아. 나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심각한 건 아니고, 잠깐 도와달라네.”
“...지원 형이에요?”
“응. 그래도 얼마 안 걸릴 것 같은데. 기다릴래?”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속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먼저 가겠다며 윤기에게 손사래를 치던 지민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정말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냐는 말에 지민은 알 수 없는 미 소를 지었다. 윤기는 가만히 지민을 바라보다 결국 발을 돌려 지원에게로 향했고, 지민은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마자 제 입술을 꾹 깨물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아주 세게.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가 잡으면 형은 내게 잡혀줄까. 서늘한 바람이 지민의 등 뒤에서부터 불어 오기 시작했다. 그가 쥐고 있던 파란 꽃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 안이 텁텁했다. 지민은 점이 되어가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결국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 었다. 한참을 걸어 정문을 지나 버스에 올라탄 지민의 옆으로 구급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창에 기대 어 아무도 없는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지민이 속상함에 눈을 감았다.
몇 시간 후 지민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윤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가만히 실눈을 뜬 채 로 시간을 확인한 지민은 지금이 새벽 세 시라는 걸 알고는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은 지민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어디요? 다급히 지갑을 찾아 손 에 쥐고는 지원이 알려준 곳으로 향한 지민은 제 눈앞에 적힌 응급실이라는 세 글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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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나쁜 소독약 냄새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민은 그 속에서 윤기를 찾았다. 저 멀리 놀 란 표정의 지원을 보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었으나 그 옆에서 잠들어있는 윤기를 보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안.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그리고 크,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갑자기 내 옆으로 차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윤기는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가세요.”
“......뭐?”
“꺼지라고.”
지민의 검고 무엇도 담겨있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지원이 간이 침대에 있던 짐을 챙겨 달아나듯 떠났다. 그가 있던 자리에서부터 심한 알코올 향이 지민에게로 훅 끼쳐왔다. 인상을 찌푸린 지민이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알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지민에 게 민윤기와 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차트 위에 적힌 민윤기라는 이름과 그 옆 칸의 공백을 발견한 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동생이요.
“동생 분이시면 민윤기 씨 형질은 아시겠네요.”
“스테먼이라는 건 알아요.”
“꽤 희귀 케이스인 것도 알아요? 안티 스테먼이라고 정말 몇 퍼센트 안 되는 형질이에요. 아까 먼저 온 친구한테 설명해드리긴 했는데, 그래도 가족이니까 알고 계시는 게 좋아요.”
“먼저 말해주셨다고요....”
“그리고 환자분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조심해서 다니세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네? 누가 그렇게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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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 잠에서 깨어난 후 마주한 것은 차가운 표정의 지민이었다. 그의 뒤로 들어오는 햇빛에 인 상을 찌푸린 윤기가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듯한 말투에 지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세히 보니 지민의 눈가가 붉었다.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것처럼 입을 앙다물고 윤기를 내려다보던 지민이 크게 한숨 쉬었다. 윤기의 짐을 대신 챙겨 나가는 지민의 뒷모습에 윤기의 표정 이 당혹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지민은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난 사람처럼 얼굴 이 울긋불긋했다. 윤기는 차고 있는 깁스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그런 윤기에게 지민 이 말했다. 계속 움직이면 빨리 낫지 않을 거라고. 동시에 차가 멈췄다. 먼저 내린 지민을 보고는 기사에게 카드를 건네받은 윤기가 그의 뒤를 서둘러 따랐다. 윤기가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두어 번 을 불러도 미동이 없던 지민이 걸음을 멈추고 그와 마주했다.
“걔가 널 불렀어?”
“...어제 전화 왔었어.”
“그러면 너 학교는 어쩌고. 걔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
“그렇게 할 말이 없어? 와줘서 고맙다든가,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든가. 어제 어쩌다 그런 거고,
나는 괜찮다. 이런 말도 많잖아.”
“야, 지민아.”
그 새벽까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냐고 캐묻고 싶었다. 내가 따라갔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 란 생각이 들자 지민은 모든 게 제 잘못인 것 같았다. 윤기에게 은은하게 묻어있는 지원의 향수 냄 새도 싫었다. 그는 병원에서 윤기가 깨어나기 전까지 계속 지원의 등에 윤기의 꽃이 피어나는 상상 을 했다. 자신을 붙잡는 윤기를 밀친 지민이 하려던 말을 꾹 참고 방으로 향했다. 피곤함이 몰려와 도 지민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윤기는 그날부터 계속 지민과 마주칠 수 없었다. 늘 제 뒤에 있던 지민을 이제는 그가 뒤에서 보게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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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은 어느새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달았다. 잔뜩 예민한 얼굴로 윤기의 별채를 지나 학교를 나서는 지민은 늘 일부러 그 앞에선 발소리를 크게 내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민은 자꾸만 윤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때 화낼 것까진 아니었는데. 책상에 엎드려있던 지민의 표 정이 꽤 침울했다.
종례 후 가방을 챙기던 그의 앞으로 회장이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희망 학교랑 학과 적어서 내 래. 설문지를 받아든 지민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윤기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의 이름을 적고 는 대충 회장에게 내밀었다.
“야.”
“...냈잖아.”
“너 전화 와. 민윤기라는데.”
지민은 망설였다. 괜히 그에게 더 큰 짜증만 내지 않을까 걱정됐다. 크게 심호흡을 한 지민이 조 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인지 전화 너머 윤기의 꽤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 렸다. 곧이어 윤기가 지민의 이름을 불렀고 지민이 대답했다.
“지금 학교 끝났어?”
“네.”
“그러면 진짜 미안한데 나 물건 하나만 갖다줄 수 있을까. 네가 갈 수 있다고 하면 친구한테 말
해둘게. 받아서 학교로 올 수 있어?”
“...15분 정도 걸려요.”
전화를 끊은 윤기가 강의실에서 나와 자신의 동아리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형. 제게 인사하는 과 후배들에게 손 인사를 하던 윤기의 가방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그가 뒤를 돌자 사고가 있고 나 서 한참을 안 보이던 지원이 서 있었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주변을 살피며 옷 을 더 여미던 지원이 윤기를 끌고 빈 강의실을 찾아 해매기 시작했다.
이유를 물어볼 틈도 없이 지원을 따라가던 윤기가 그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돌아오 는 대답이 없었다. 뒤에서 본 지원의 목 주변이 울긋불긋했고, 윤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너 왜 이래? 지원의 앞을 막아선 윤기가 목소리를 높이자 지원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윤기를 마주했다.
예전과 달리 더 탁하고 까만 눈동자가 초점 없이 윤기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할 말이 있다며 윤기 와 함께 구석의 빈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다짜고짜 윤기를 책상으로 밀어 앉히고는 제 외투를 벗으며 어딘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애원하기 시작했다. 나 한 번만 살려주라 윤기야. 제발. 민윤기는 지원의 목에 피어있는 꽃을 발견하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시각 윤기의 물건을 들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지민은 제게 연락이 없는 윤기를 기다리며 계 속해서 한숨만 내쉬었다. 화해하는 게 좋겠지, 등의 말을 중얼거리던 지민의 어깨를 누군가가 덥석 붙잡았다. 윤기 동생? 축제 때 잠시 보았던 윤기의 친구가 지민에게 인사했다.
“민윤기 찾아? 걔 동아리방에 있을걸?”
“아, 감사합니다.”
“누구랑 같이 가는 것 같긴 했는데, 못 찾으면 전화해봐.”
지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형한테 그날 있었던 일 사과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런 생각 을 하니 지민의 입꼬리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씰룩거리고 있었다. 본관 안으로 들어선 지민이 주 변의 모든 동아리의 문을 열었지만, 그 어디에도 윤기는 없었다. 문자도, 전화도 통 받지 않는 윤기 를 욕하며 하염없이 걷던 지민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다투는 소리를 따라 구석진 강의실로 향한 지민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잠시 후 바닥 으로 윤기의 물건이 지민의 손에서 떨어져 처참하게 사방으로 퍼졌다. 둔탁한 소리에 윤기와 지원 이 고개를 돌렸다. 몸을 파르르 떨며 뒷걸음질 치던 지민이 탄식했다. 그의 시선이 윤기 위에 있는 지원의 목으로 향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에 새겨진 꽃을 발견한 지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윤기는 지원을 밀치고 가방을 챙겨 지민을 따라 나갔으나 이미 자리를 뜬 지민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집에서도, 지민의 학교나 친구의 집 근처에서도 지민을 찾을 수 없었다. 전화를 꺼놓고 사라져버린 지민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윤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해받을 만한 상황에 등장한 지민 은 무척 당황스럽기보다는 윤기에게 큰 상처를 받은 듯해 보였다. 순식간에 붉어진 지민의 눈가가 떠오르자 윤기는 더욱 복잡해졌다. 열두 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는 지민과 혹여나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생각하던 윤기는 아주 잠깐 잠이 들었고, 그동안 꾼 적 없던 그 날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발목 위로 덮여있던 넝쿨이 점점 윤기의 상체로 기어 오고 있었다. 활짝 핀 파란 장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윤기는 안간힘을 썼다. 앓는 소리를 내던 윤기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제 앞엔 지민이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로 소리 없 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지민의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이불 위로 떨어지고 나서야 상황 을 파악한 윤기가 다급하게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흐트러진 교복에 피딱지가 앉은 입술. 마를 새도 없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눈물에 윤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밖에선 바람이 부는지 처마 밑에 달려있던 자개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푸른 빛을 띠는 지민의 손이 제 교복 단추로 향했다. 그런 지민을 윤기가 황 급히 막았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도 모자란 상황에서 윤기는 지민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 의 터진 입술과, 늦은 이유를 물었다.
지민과 윤기의 시선이 얽혔다. 박지민 너 왜 이래. 그의 목소리에 윤기의 입술 앞까지 다가간 지 민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윤기에게 대답했다.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이미 형은 다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만 넘어가줘요. 전부 꿈이라고 생각하고. 지민은 윤기에게 키스했다. 뒤로 물러나려던 윤기의 두 볼을 손으로 잡고 입 맞추던 지민의 입술에서 피 맛이 맴돌았다. 지민은 제 셔츠 단추를 마저 풀며 윤기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뜨거운 숨에 둘의 몸이 동시에 들썩거렸다. 길게 혀를 섞으며 키스하던 지민은 가쁜 숨을 내쉬며 윤기에게서 떨어졌다. 윤기의 까만 눈동자가 지민 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달뜬 표정의 지민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한테 자꾸 화가 나....”
“.......”
“형이 너무 좋아서, 자꾸 신경 쓰여.”
좋아한다는 고백을 끝으로 쓰러지듯 윤기의 품으로 안긴 지민의 머리카락이 새벽이슬을 맞은 탓 에 축축했다. 색색거리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지민은 윤기의 팔이 자신을 안아주는 걸 느끼곤 그 제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뻣뻣한 셔츠를 대신 벗겨주곤 그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야 윤기는 일어날 수 있었다. 가만히 윤기의 베개에 얼굴을 파묻던 지민이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가지 말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윤기의 손등을 쓸던 지민의 손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 었다. 어쩔 수 없이 윤기는 다시 의자에 제 외투를 걸어놓고는 지민의 옆에 앉았다.
잠든 지민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해주던 윤기의 손이 피딱지가 생긴 지민의 입술로 향했다. 서랍을 열어 약과 면봉을 꺼낸 후 지민이 깨지 않도록 상처가 난 부분을 살짝살짝 건드려가며 그 의 나른한 표정을 살피던 윤기 역시 뒤늦게 밀려오는 잠에 취해 몽롱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자기엔 넉넉하지 않은 침대 크기이기에 새 이불을 깔려고 일어선 윤기의 뒤에서 지민이 그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불편해?”
“...같이.”
“응?”
“같이 자....”
**
창 너머로 들리는 새소리와 강한 햇살에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지민이 무의식적으로 제 앞에 있 는 따뜻한 무언가에 더 깊게 파고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익숙한 체향에 지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손등이 간지러워 천천히 눈을 뜬 지민의 앞에 윤기가 있었다. 둥근 촉의 펜으로 지민의 손등에 귀 여운 장미꽃 하나를 그리고 있던 윤기가 머쓱한지 입꼬리를 올렸다. 가만히 제 손등만 보던 지민이 새벽의 일을 기억하고는 민망한 듯 윤기의 품으로 안겼다.
“왜 화 안 내요.”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
“그냥.... 내가 자꾸 형한테 짜증 내고 그랬으니까.”
“...지민아, 어제 그 일은.”
“그건 얘기하기 싫어.”
아닌 거 알아. 그냥 놀랐을 뿐이었어. 고개를 올려 윤기를 힐끔대던 그가 물었다. 이번 졸업식엔 올 수 있죠? 지민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정리하던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형 생각 알려 줘요. 몸을 일으킨 지민이 침대에서 내려와 제 셔츠를 챙겨 들고 윤기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기다 리겠다는 말을 남긴 지민이 문을 열자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윤기가 눈을 뜰 수 없었다. 꼭 환상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서 지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형, 빨리 와. 지민이 윤기를 발견하곤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쓴 학사모에 매달린 푸른 구슬 이 짤랑거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유유히 지민의 앞으로 걸어가던 윤기는 문득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싶은 생각에 피식거렸다.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윤기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는 지민의 볼에 홍조가 피어있었다. 스무 살이 된 박지민에겐 더 이상 중학생 때 그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 다. 윤기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지민이 더 환하게 웃었다.
지민의 친구들에게 카메라를 넘긴 윤기가 지민의 옆에 다가섰다. 아까와 다르게 쭈뼛거리며 머리 와 학사모 정리를 하던 지민이 윤기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윤기가 고개를 돌려 지민을 마주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지민은 윤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알려줘. 형 생각.”
운전석에 앉아 카메라에 찍힌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던 윤기가 지민을 힐끔거렸다. 단정하게 내 린 앞머리 밑으로 보이는 눈망울이 촉촉했다. 대답이 없는 윤기의 반응에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 었다. 지민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윤기의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민의 턱을 살짝 잡아 제게로 돌렸다.
지민은 서둘러 눈을 감았다. 입술에서 퍼지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에 윤기의 소매를 붙 잡고 있던 지민의 손에 힘이 한껏 들어갔다. 지민은 제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열기에 자꾸만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입술을 떼자 지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시선을 올려 윤 기를 마주한 지민의 심장 한 부근이 따가웠다.
지민은 그날 새벽에 꿈을 꿨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의 장미 넝쿨이 지민의 발목에서부터 어깨 위까지 타고 오르는 기묘한 꿈이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옆에 누워있는 윤기의 손을 세게 붙잡은 지민의 온몸이 뜨거웠다. 잠에서 깨어나 서둘러 윗옷을 입은 윤기가 지민을 조수석에 태우고는 응급실로 향했다.
걱정과 달리 별 이상이 없다는 말에 윤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걱정된다면 하루 정 도 입원을 하라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일반 병 실로 올라감과 동시에 지쳐 잠든 지민의 앞머리가 땀에 젖어있었다. 지민이 깨어나면 줄 간식들을 챙기기 위해 지하로 내려간 윤기는 이 상황이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커피와 지민이 좋아하는 것을 몇 개를 사서 올라오던 윤기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 세웠다. 지민과의 관계를 묻던 의사가 뒤이어 그의 상태를 말했다. 이렇게 늦게 각성이 되는 경우가 많이 없다던 의사의 말에 떨리는 손으로 병실 문을 연 윤기의 앞에 지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윤기의 머릿속에 자신들을 스쳐 지나갔던 그 수많은 파란 장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윤기는 속으로 제발 그에게 꽃이 새겨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박지민에게 꽃이 피었다는 건, 그건 자신이 지민을 점점 죽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형.”
지민의 목소리에 순간 윤기의 귓가엔 바람결에 흔들리던 자개 소리가 났다. 거울 앞에 서 있던 지민의 발밑으로 그가 입고 있던 환자복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지민은 묘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윤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윤기가 지민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지민의 오 른쪽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지민은 몹시 기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기의 품에 지민이 안겼다.
드디어 형의 꽃을 가지게 될 수 있다는 지민의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듯한 목소리에 윤기는 덜컥 겁이 났다. 지민의 어깨 위의 검고 푸른 장미 한 송이를 제 손바닥으로 덮은 윤기에게 보이지 않는 넝쿨이 점점 그와 지민의 몸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민윤기는 이기적이게도,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