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190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수한 시대를 다룬 글이니 문제가 보이신다면 댓글 부탁드리며, 이야기의 배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은 실제가 아님을 알립니다.
* 등장하는 일본어는 해석만 봐주시고 자세한 문법 혹은 말 자체가 틀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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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곧 우리의 시대였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낭만이라 부르기도 한다지.
나는 믿는다. 그것은 필한 헛소리일 뿐이라고.
호랑이를 닮은 이 조선땅에, 백을 입은 조선인들의 귀에,
반란이 필요하거든 능히 칼을 잡고
화합이 필요하거든 즉시 손을 잡는,
그런 민족의 마음에 한 마디를 전한다면,
낭만은 죽은 지 오래요.
라는 말을 내어줄 것이야.
- 無名, 1907년 /
새하얀 천옷과 혹은 꽤나 고급진 서양복을 입은 이들이 보이고, 달구지와 새카만 자동차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모습이 눈에 띈다. 위로 머리를 올리고 갓을 쓴 선비와 짧게 깎고 모자를 쓴 신사는 대화를 나누며 걸어간다. 유카타를 입은 자는 거들먹거리는 몸짓을 하며 옆 하인에게 뭐라 말을 건넨다. 곱게 색동옷을 차려입은 아이는 어미와 이제 막 문을 연 사탕 가게로 즐거운 듯 향했다.
여러 차림이 뒤섞여버린 무언가 이질적인 사람들은 또 무언갈 품 안에 감추고 길을 걷는 한 사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 한다. 사내는 마치 아무런 일도, 홀로 걷는 연유(緣由)조차 없는 것처럼 무감각한 얼굴낯으로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낡은 서양식 복장을 한 채 저벅댔다. 이따금 사람들이 옆을 지나갈지라도 특유의 날 선 눈매와 꾹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오로지 걸음만을 옮기고 있을 뿐.
하지만 줄곧 모든 이들이 그러했듯 존재감 없는 고요는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성질을 지닌다.
사내가 마침내 한 장터를 지나 중문으로 돌아 들어서려는 그 잠깐 사이, 결국 위협적이게 총칼을 찬 복장을 한 군인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의 군문 여럿 사이로 형형한 눈빛을 내는 그 남자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하, 라며 비웃음을 지었다. 사내는 고요를 들켰음에도 잃지는 않았기에,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이었다. 마침내 힐끔거리는 장터의 눈길들도 몇 초 만에 사라질 무렵 억양이 센 일본말로 군인이 문장의 첫마디를 냈다.
"隠してるのを取り出して。"
- 숨기고 있는 거 꺼내.
위협이 섞인 어조에 몸을 움찔할 법도 하지만 사내는 가볍게 두 눈을 굴려 그와 주변 몇을 둘러보고는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확신에 차 막아섰던 남자는 눈썹 한쪽을 올리며 어서 내보라는듯 재촉했다. 사내는 이내 체격에 비해 큰 손을 내보이며 펼쳤다. 피부색과 똑같이 하얀 손 안쪽에는 그저 조리개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별다른 보석도, 옥도 없으며 어느 댁 여식에게 가져다줬다간 당장 경을 칠 단출한 모양새였다. 남자 옆에 서 있던 어쨌든 계급이 조금이나마 높아 보였던 군인 셋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흘리듯 말했다.
"何を期待したの?"
- 뭘 기대한 거야?
"こいつらにひびがあるんだよ、何かあるんだ。"
- 얘네한테 금이 있어 뭐가 있어.
공 세우려는 건 좋지만 자꾸 이러면 곤란하지ᅳ 그래봤자 조센징 놈들인데 말이야. 낄낄거리며 웃던 그들은 여전히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 사내에게 운 좋은 줄 알라며 오른쪽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사내는 잠시 서 있다가 처음으로 어떠한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냉소적이었던 얼굴이 사나운 기색으로 변했다. 눈썹을 확 찌푸린 채로 더욱 날 선 눈빛을 보이며 신경질적으로 제 어깨를 털어낸다. 무식한 새끼들.
격변의 낭만_
01.
윤기는 여즉 짜증이 나는지 풀지 않은 눈으로 이번엔 다행히 길을 지났다. 그런 그가 단숨에 도착한 곳은 허름한 차림새와 어울린다 할 수는 없는 장소였다. 불란서(*프랑스)의 서양식 담배보단 문양이 새겨진 조선의 담뱃대와 닮은 분위기를 지닌 분명 기와집이었고, 초가집 몇 채가 그냥 들어갈 크기의 마당과, 곱게 자리하고 있는 풍채 좋은 지붕은 곧 양반가의 자택임을 알리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안의 시종들 숫자도 꽤나 많았다. 그는 문턱을 넘기 전 흘깃 고개를 들어 한 자로 쓰여진 명패를 쳐다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윤기를 막아설 법도 하지만 다들 흘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딱 한 명, 빗자루질을 하고 있던 마른 체구의 종 하나가 따라오라는 식의 행동을 보였을 뿐이었다.
"도령은 오늘 계십니까?"
"예, 나름 중요한 날이니."
하인은 등을 보인 채 윤기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나 영 마뜩치않은 말투였다. 꼭 도령- 이라는 사람의 안위를 그에게 말하기 싫은 듯이. 윤기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평온한 얼굴빛으로 고개만 두어번 주억인다. 오는 길에 일군(日軍)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저 대신 전해주십시오, 도령도 조심하시라고.
"우리 도련님은 그런 놈들 만나실 일 없습니다.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하쇼."
"..그렇지요. 없으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무덤덤하게 윤기가 충고와 비슷한 것을 전하니 하인은 코웃음을 치며 시답잖게 말했다. 뒤에 들려온 중얼거림과 가까운 작은 소리에는 역시 한 쪽 눈썹만 올리며 그닥 신경을 쓰지 않고 이어가던 안내를 마저 할 뿐이었다. 여전히 등만 보이는 그 뒤에서 윤기는 마당 곳곳에 핀 매화꽃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까의 신경질 이후 두 번째 표정을 내었다. 슬픈,
02.
마침내 하인이 마당을 지나 한 방 앞으로 윤기를 데려다놓고 자연스레 다시 그가 하던 일로 돌아갔다. 윤기는 마루 앞에서 몇 초간 앞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거두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밀리는 창호는 그의 한숨과 달리퍽 가벼웠다.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내부에서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푸릇한 도포 차림의 이가 눈에 띈다. 윤기가찾던 사람인듯 별다른 내색없이 그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까지 도포 자락만 바라봤다. 아, 오셨소?
인기척을 느꼈는지 반가운 어투를 내며 밝게 웃는 그의 모습은 윤기가 무거운 한숨을 내려놓기엔 꽤 충분했다. 지민, 이 양반가 하나뿐인 자제. 잠시 멍해졌던 머리를 가볍게 저어 정신을 차리고 윤기는 도포를 정리 후 먼저 앉 은 그, 아니 지민의 앞에 금세 자리를 잡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둘은 장터의 사람들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동경 유학생들과 비슷한 그러나 시간의 흔적이 보이는 낡은 복장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푸름의 비단은 섞일 수 없다. 굳게 다문 입술끝과 탄회가 있는 날 선 눈빛에 비한, 맑은 표정으로 감싼 패기가 담긴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로 말이다.
"가져온 것부터 볼 수 있겠나?"
"다행히요.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왠지 들뜬 얼굴로 지민이 물었다. 낮은 목소리를 내어 답한 뒤 윤기는 아까 전 일군들에 잡힐 뻔한 이야기를 감추고 품 안에서 조리개 대신 미색의 천자락을 꺼냈다. 철컥거리는 쇠붙이들의 부딪힘 소리가 강하다. 둘 사이에 그 것을 내려놓고 하나씩 천을 걷어내자 검은색 권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민은 마냥 어린 것 같던 표정과 반대로 짐짓 입꼬리 끝이 굳어지더니 순식간에 권총을 잡고, 두 번의 탄창 소리와 함께 장전한 동시에 윤기의 눈앞으로 가져다 댄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모양새였다.
장난이 심하십니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더니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군처럼 한 번에 지민의 손에 있던 권총을 쳐내고 장전을 푼 뒤 천자락 위에 다시 내려둔다. 윤기는 재밌는 듯,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내려두진 않았다. 지민 또한 내 농이었소, 라며 시답잖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양손을 항복하듯이 들어 올렸다.
"독일제 권총입니다. 일련 번호가 없는 것이구요."
"좋소, 그럼 식별은 어렵겠지."
"...예,"
지민은 윤기에 비해 작은 손가락을 뻗으며 총구 부분을 매만졌다. 복잡한 감정이 새겨진 그의 속은 총구 끝에 탄환으로 남아 쏘아질 거였다. ..나는 그것을 또 바라만 보고 있을 테고. 작게 입술 끝을 꾹 누른 윤기는 한참 권총을 살펴보고 있는 이의 손끝만 눈에 담을 뿐이었다. 3년 전 아라사(*러시아)의 총독이 죽는 사건에도 같은 게 쓰였습니다. 명중률이 좋은 축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살상력이 높은 것이니... 쏠 때 조심하지 않으시면 반동에 힘이 들 겁니다."
"알겠네. 주의하도록 하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답한 지민은 이내 천자락을 다시 덮고 조심스레 총을 들어 옆에 있던 함으로 옮겼다. 자개로 새겨진 나비가 있는 함은 그 안에 든, 곧 피가 묻을 물건과 어울리지 않았다. 꼭 그런 모순이 지금 제 앞에 있는 남자와 닮아보여 윤기는 오색이 빛나는 나비에서 잠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지민은 함을 탁 닫고 시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그에게 왜 그러냐는 물음을 보냈지만, 고개를 젓는 가벼운 답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용건 하나가 끝나고 나니 방 안은 적막으로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 해하는 건 역시나 주로 지민쪽이라,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그쪽이었다. 궁금한 것이라도 있는 거요? 하기야 아까부터 윤기의 눈길은 자개장에서 옮겨져 지민의 어깨너머와 혹은 그의 귀끝 사이로 보내지는 중이었으니, 그리 물어볼 법도 했다. 질문에는 응당 답이 따라야 하는 섭리지만, 똑같이 질문이 따랐다. 도령은 왜 제게서 총을 사가십니까?
...벌써 이런 식의 밀매가 네 번째였다. 지민의 집안은 총과 거리가 멀었고 만약 가깝다 하더라도 밀수업자가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 충분한 자금을 갖고 있었다. 일련번호가 없는 걸 구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몇 번 들어왔지만 고작 그런 게 아니란 건 윤기도 충분히 알았다.
"역시 집안에선 아직 도령의 행동을 모르시는 겁니까."
"...아시면 안 되지."
"..."
"난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이어야 하오."
윤기는 빙긋 웃으며 말하는 지민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튀어나오려 하는 말들만 꾹 삼킬 뿐이었다. 당신의 반경이 벌써 네 번째 내 주변으로 오는데 나는 그것을 너무나 밀어내고싶다고. 하여 왜 철부지 도련님으로 살지 않냐고, 그저 안전하게 화초로만 자랄 수는 없느냐고. 하지만 문장을 전하기엔 이 나라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윤기였다. 가닿지 못하는 말은, 걱정이 아닌 자신만의 염려 섞인 감정으로만 남는다.
1900년대에 들어선 조선은 온통 해외 대국들의 장기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왜놈은 일본이라는 큰 이름을 지니고 차츰 반도에 발을 뻗었으며 어떻게 손아귀에 담아낼 지 궁리하느라 조선 땅의 자유는 사라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횃불이 아닌 밝은 노등과 단 서양식 음식과 주막이 아닌 호텔이란 것이 들어서고 짧게 머리를 자르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문화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과 피가 튀는 싸움이 진행되는 이 상황에서, 똑같이 싸우겠다는 자를 말릴 수는 없었다. 단지 그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유를 안다해도 완벽히 받아들이는 데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윤기는 네 번째 만남에서 첫 번째 걱정을 꺼냈다. 당신이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마음을 보인 첫 번째.
"..왜 편한 길을 버리는 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지민의 뒤 작은 상에 올려진 책 꾸러미를 슬쩍 가리켰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길로 정해진 자신과는 달리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많았다. 지민은 잘게 웃고 당연하다는듯 망설임 없이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저런 서책이나 읽으며 편히 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는 나의 낭만이 아니오."
"..."
"내 낭만은 조선의 노을과, 풍경과 조선 사람들의 웃음, 온통 무료한 해와 달의 향연이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먼저 조선을 지켜야하오."
무언가를 지키는 것에, 글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이번엔 씁쓸한 어투와 함께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지민이 그를 바라봤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답에 윤기는 낭만.. 이라는 그 단어를 작게 입 안에서 굴렸다. 조국을 위해서라는 어리석고 패기 넘치는 말도, 앞뒤 가리지 않고 열정만 가득히 무모한 내용도 아닌 노을, 풍경, 웃음, 해와 달을 지키겠다는 포부를 가진 푸른 도포 자락의 도령은 다시 한 번 빙긋 미소지었다. 하여 아무도 모르는 총구를 자꾸만 들려는 건,
혼란한 시대 속, 그런 격변의 낭만 때문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