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트리거 w. 35
지민은 들고 있던 아이폰 화면을 노려보다 양 엄지를 들었다. 진짜 꼴받네... 이게 말이 돼? 댓글 창은 실시간으로 박살나고 있고.
풍비박산났다. 간판 다 떨어진 '아직 영업합니다' 칼국수 집 꼴이었다.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은퇴 겸, 열애 공개 겸, 결혼 예정 소식에, 은하수(선하네 팬덤명)들이 선하 포카를 북북 찢고 있 는 사 진이 SNS를 점령했다. 덩달아 어거스트의 보컬 경력 두 달 반, 박지민의 속도 실시간으로 북북 찢어졌다. 선하야 이러지마아... 은선하 콘서트 보겠다고 수능 이주 전 가출을 감행했던 동운이는 드럼 의자에 상체를 기대고 엎드려 엉엉 울고 있었다. 곽동운이 몸부림칠 때마다 의자가 뱅글뱅 글 돌았다. 의자 위에 있는 곽동운도 좀 돌은 것 같았다. 한편, 집에 쌓인 은선하의 앨범으로 소 파를 만들 정도인 정아는 어떤가하면,
"그게 뭐? 난 은선하 노래가 좋은거야. 그 정도로 나의 팬심을 얕보지 마라...."
오히려 담담한 듯...?
"하지만 은퇴라잖아요...."
..........
키스 트리거
W. 김삼오
쨍강.... 정아의 손에 들려있던 오천 원 짜리 -머그컵이었던- 양치컵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남 편 새끼를 죽여버릴거야.... 그 새끼가 우리 선하 활동 못하게 하는거니...? 정아의 눈엔 초점이 없 다. 지민은 그녀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이성이 남아있지 않음을 느낀다. 무대 위에서 단정하 게 정리된 까만 생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기던 그녀의 손은 이제 애꿎은 동방 문을 쾅쾅 두들겨 패고 있을 뿐이다. 그게 마치 '대한민국 가요계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여야만 했던 - 톱 싱어 송라이터 은선하'의 미스터리한 남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세게 퍽퍽. 쾅쾅.
누나...왜 문짝을 부수고 계세요? 후집 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연습실로 뛰어들어온 멀대같이 큰 남자. 이름은 김주용, 어거스트에 들어온지 반년이 넘었지만 아직 밴드 멤버 누구에게도 말을 놓지 않기로 유명한 실음과의 유교보이다. 가끔 김주용은 정아가 들고있는 칫솔에도 존댓말을 했다. 순둥한 눈망울과 일렉 기타를 기깔나게 다루는 탓에 주축멤으로 자리잡았지만, 주용은 아직도 정 아를 비롯한 멤버들과 데면데면해 보이곤 한다.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이 첫 번째 원인 이고, 그런 성격을 가진 놈이 또 있다는 점이 두 번째 원인이고, 애초에 주용과 다른 한 놈을 제 외한 어거스트의 모두가 너무도 사교적인 탓에 거의 한 가족으로 보이는 것이 마지막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주용은 어거스트에 속해있을 때 묘한 안정감과 소속감, 그리고 충족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는 그럴 때마다 빙긋이 웃곤 했다. 정아가 딱 마피아 게임할 때 마피아만 뽑는 새끼마냥 꿍꿍 이가 있어 뵌다고 의심하긴 하지만.... 아무튼 정아가 데려온 멤버인 만큼 정아가 유독 챙긴다. 팔 도 안으로 굽어서 그런가. 그녀와 그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그것도 고등학교 밴드부의 직속 이었으니 얼마나 끈끈했을지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게 뻔했다. 그런 김주용도 박정아의 순위 목록 에서 이기지 못하는 존재가 은선하였고, 김주용은 채식만 해서 힘 못 쓰는 곰돌이 푸 마냥 파리 해진 얼굴로 정아가 두들겨 패고 있는 문짝을 슬그머니 잡아줄 뿐이다. 누나... 이거 부수면 큰일 나요, 저희....
"하아.... 그 새낄 팰 순 없잖아."
"어떤 새끼?"
정아의 등 뒤에서 얼굴을 쏙 내민 재하가 익숙하게 바이올린을 세팅한다. 야, 오랜만이다 너. 웬 일로 바이올린? 정아의 시선이 잠깐 재하에게 쏠린 사이, 주용과 지민이 잽싸게 두들겨 맞은 문 짝을 문질거리며 닫았다. 재하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다 작게 웃는다. 그냥, 최근에 안 잡았더니 거 미줄 칠까봐. 간단히 활을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던 재하의 손목엔 종류만 해도 세 가지가 넘는 팔찌의 펜던트들이 짤랑거린다. 조율할 요량인지 가벼운 곡을 연주하며 정아와 탁구하듯 말을 주 고받는 재하의 얼굴에 개구진 미소가 찾아든다. 작은별 변주곡인가? 지민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 린 동운의 등을 두들겨준다. 너는 왜 이렇게 울어? 순수하게 물어본건데 동운은 퉁퉁 불어터진 얼굴로 말한다. 은선하를 은퇴시키는 건 국가적 재난이라고.... 네가 뭘 알어. 지민은 냅다 동운의 뒷통수를 갈기고 말았다. 국가적 재난 좋아하네, 국가적 재난은 지금 우리 연습실 상태를 말하는 거고.... 한 마디 쏘아붙여주려다 맞은 자세 그대로 늘어진 동운이 불쌍해서 봐줬다.
"안재하, 너는 왜 이렇게 담담해?"
"재하 형은 은선하 팬 아니잖아요...."
"음?"
'찐팬 감별사' 동운의 말에 재하가 눈썹을 쓱 들어올리고 만다. 은선하가 또 왜? 소속사에서 구린 컨셉 시켰어? 재하의 악의 없고 순수한 말투를 보아하니 그는 진짜 이 상황을 모르는 듯 하다. 지민은 볼을 긁적인다. 저 형은 진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네. 현세에 초연한 타입이 모두 주변에 한명쯤 있겠지만, 안재하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하다. 네이버 실검이 그나마 안재하와 세상을 연결하는 끈이었는데, 그 흔한 인스타 계정 하나가 없는 안재하에게 실검 폐지는 그야말 로 그의 단절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느린 그가 왜 인터넷을 멀리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단 하나 확실한 점은 수강신청이나 장학금과 같은 개인적인 이득부터, 대 회나 가요제- 콜라보를 구한다는 제의- 같은 팀이 가져갈 이득 같은 건 기가 막히게 알아온다는 점이었다. 안재하의 선택적 정보 수집력이 일개 대학교의 작은 밴드에 지나지 않은 어거스트를 ' 머기업 밴드'로 급부상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은선하 은퇴겸연애겸결혼한대. 이 소식 모르는 거 지금 지구상에 너밖에 없다...."
"정아야, 오바떨지 말고...."
"안재하 끌어내."
아아, 잘못했어, 아파아파. 재하가 정아의 등짝 스매시를 맞는 동안 동운은 비틀비틀 일어나 연습 실 밖으로 향했다. 재하는 아픈 팔과 등을 문지르나 싶더니 휴대폰을 꺼내들어 기사를 찾는 듯이 화면을 몇 번 두드린다. 정아는 그런 재하의 손길에 의문을 표한다. 야, 웬일이야? 너 그런 거 안 찾아보잖아. 정아의 물음에 '골치 아픈 가십은 무조건 먹금'파였던 재하가 입꼬릴 죽 늘렸다.
"...가끔 궁금한 건 찾아봐, 나도."
"니가 월간 낚시 말고 구독해놓은 뉴스 채널이 있다는 데 감탄하게 된다, 진짜...."
"월간 낚시도 괜찮은 채널이거든."
"누가 뭐래니...."
지민은 저렇게 마이웨이로 사는 재하를 볼때마다 정말 닮은 누군가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재 하가 그의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했다. 하긴, 어거스트의 모두는 어느정도 그를 조금씩 닮은 면이 있었다. 어거스트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 없지 아마? 은근히 닮은 것 같다가도, 누가봐도 호감형 인 서글서글한 교회 오빠 스타일- 재하에게 미안해져 입을 다물고 만다. 지민은 볼을 긁적인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건 혼자 나간 동운과 동행한 누군가였다.
"정아 누나, 이거 냉장고에 채워놓재요."
"이번달은 토레타냐?"
"그런가봐요."
지민도 동운이 한 가득 품에 안은 토레타 박스를 나눠들었다. 무게감에 휘청하나 싶더니 어깨를 감싸는 손이 단단하게 지탱해준다. 불만 있는 사람이 나가서 사오는걸로 해, 다음엔. 묵직하고 고 집 센 목소리. 뼈마디가 굵고 붉게 올라온 손. 여름인데도 살 타는 게 싫다고 꼭꼭 여며입은 긴팔 블랙 루즈핏 셔츠. 새까만 캡모자에 새하얀 피부톤까지. 그리고 뭣보다 은선하의 소식을 알지도 못한다는 듯 평온한 얼굴에 남 일에 전혀 관심없어뵈는 무심한 눈깔. 지민은 으차차, 입으로 소리를 내며 벽 쪽으로 기대 섰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니 그도 까딱, 손을 흔든다.
어거스트를 만든 장본인이자 어거스트 멤버들을 죄 자기 색으로 물들여놓은 이기적인 놈. 본인이 없을때도 그가 주변인들에게 박아놓은 '민윤기의 시그니처 습관들' 때문에 자꾸 생각나게 하는 놈. 본인 없는 술자리에 민윤기 얘기가 나왔다하면 미담이 되게 만드는 마성의 미친 놈.... 민윤기가 뒷목을 슥슥 문지르며 키보드 건반을 댕댕 두드리기 시작했다. 연습이 한 시간내로 시작될 것이 라는 신호다.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아 기지개를 펴며 왱알왱알 잡담을 하고, 누군가 이거부터 해보 자~ 라는 말을 꺼낼 타이밍이다. 지민도 연습에 참여하기 위해 속도를 내어 산더미같이 쌓인 토 레타를 절반쯤 냉장고로 옮겨내고 있었다.
"아니 씨발.... 이게 뭔 소리야."
좀처럼 욕을 하지 않는 동운이 상스럽게 욕을 했다. 지민의 눈썹이 쓱 들려올라가 놀란 토끼눈을 한다. 쟤가 미쳤나? 어거스트의 막내는 지민이었지만 동운은 고작 일주일 먼저 들어온 선배다. 둘 외에는 모두 까마득한 선배들 뿐인데.... 쟤가 진짜 미쳤나? 지민은 엉거주춤하게 일어선다. 냉장 고 문짝에 넣어놓은 토레타가 흔들거린다.
"은선하 남편... 여... 여."
"동운이 취했니.... 음악한다고 쓰레기같이 살면 안된다니까 그르네...."
"더위 먹었나? 윤기형이 토레타 들고오게 시켜서 그런거 아니에요?"
"내가 두 박스 들고 쟨 한 박스만 들게 했는데."
"걍 배달시키라니까~"
와글와글한 목소리 사이로 띵동댕 띵동댕 키보드 소리가 또 울린다. 민윤기는 이 와중에도 아랑 곳 않고 세팅 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운이 버럭 소리를 친다. 은선하 남편이 여기 있다잖아 요! 정아가 짜증섞인 말로 대답한다. 뭐 어디? 한국? 한국에 있겠지...? 국제결혼은 아닐 거 아니야 .... 동운은 드럼 스틱을 쥐고 허공에 붕붕 손을 흔들었다. 아니 진짜 여기.... 한국대! 한국대에서 이번 축제 오프닝 오르는 학생이래잖아요.... 이거 존나 우리라는 소리잖아, 댄스부는 둘째날 공연 이고.... 나머지는 다 연예인 섭외인데....
툭. 정아의 손에 들려있던 아이폰이 또 바닥으로 낙하한다. 무릎으로 냉장고 문짝을 친건지 아슬 하게 쑤셔 넣어놓은 토레타가 와르륵 쏟아진다. 동운의 드럼스틱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눈깔 여섯 개가 다른 눈깔 여섯개로 향한다. 바이올린을 다시 케이스에 고이 집어넣던 안재하, 일렉 기 타에 묻은 먼지 떼내기 바쁜 김주용, 그리고 이 난리에도 키보드 만지작대는 민윤기. 하필이면 남 일에 관심 존나게 없는 셋이 남았다. 남 일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 박정아와 곽동운, 그리고 박지 민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꼬옥 맞잡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싸구려 시트콤 같았다. 와하 하 하고 관중이 웃을 타이밍이 지금인데 말이야.... 저 세 새끼들 중에... 누구지...? 정아가 소란스 러운 악기 소리들 사이로 목소리를 냈다. 셋 중에 누구냐...? 은선하... 남편... 말이야.... 고통스러워 보였다.
지민은 한국소식 뉴스 1면을 장식한 기사의 제목에 실린 한국대가 실은 한걱대라거나 한욱대라거 나 한쿡대인데 오타가 났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거스트라는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대학 밴드의 신상 정보 쯤이야 IT 강국인 한국의 SNS에서는 휴짓조각 뜯기보다 쉬울거다. 지민은 눈 앞이 아 득해지는 것 같았다. 좆됐다.... 스쳐지나가듯 읽은 은하수들의 광기어린 저주글이 다시 리플레이 되는 것 같았다. 박지민도 은하수였다. 속으로 좋아하던 가수의 커리어를 앗아간 개자식에게 뻐큐 를 날렸지만, 실은 그게 지 얼굴에 침 뱉기 였다는 점. 정아가 주먹으로 패야하는 대상이 연습실 문짝이 아니라 이 연습실에 들어온 세 남정네 중 하나라는 점이 진짜 코미디쇼의 하나도 안 웃긴 반전 효과음 같았다. 두둥탁. 사실 여기 있었답니다. 지민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연습실 가죽 소파에 얼굴을 처박았다. 말이 되냐고....
정아는 아무래도 만만한 김주용을 먼저 공략하기로 다짐했는지 멱살을 쥐어잡고 점심을 먹으러 나가버렸다. 동운이 하도 징징거리기에 재하는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다 동운까지 챙겨 카페에서 뭐라도 사오겠다며 문 밖으로 나섰고. 폭풍이 지나간 후의 연습실은 고요하고, 건조하고, 털털거 리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지민은 얌전히 토레타를 냉장고 문짝에 다시 쑤셔넣으며 손 을 발발 떨었다. ...아니, 아니겠...지? 자꾸 헛손질을 해서 빌어먹을 토레타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 졌다. 윤기는 잔뜩 뚝딱대는 지민을 쳐다보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나뒹구는 토레타를 집 어들었다. 다 안 들어가면 그냥 밖에 꺼내놔, 다 먹으면 다시 채워놓으면 되고. 지민이 입을 다물 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윤기 얼굴 쳐다보는 척, 그의 머리통 너머 에어컨만 쳐다보면서. 박지민은 지금, 민윤기가 불편하다.
박지민이 민윤기를 불편해하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박지민 은 밴드 '어거스트'에 처음 발을 들일 때부터 민윤기와 삐걱거렸다. 잘 안 들어맞는 퍼즐 같은 사 이였다. 약간 뒤틀려버린 큐브 같기도 했다. 답이 없다는 뜻. 박지민은 민윤기가 싫지 않았고, 민 윤기도 그러했다. 그러나 둘은 '싫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서, 박지민은 늘 그 랬듯 친해지려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민윤기는 별달리 반응이 없었다. 선배, 작년 콜플 내한 갔다 오셨어요? 아니, 바빠서 못갔어. ....... 쩜쩜쩜. 침묵. 앗, 넵.... 이런 길 잃은 대화를 다섯 번 쯤 하고 나니 박지민은 민윤기보다는 훨씬 사교적인 안재하나 박정아와 끈끈해지는 쪽이 편하다고 느꼈다.
실제로도 박정아와 안재하는 박지민을 애완동물 마냥 사랑하고 아껴주고 주머니에 넣어다니려 했으니 지민도 막내 포지션으로서 사랑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우리 지민이 너무 귀여 워.... 착해. 툭하면 박지민 찬양을 하는 정아와 재하, 그리고 서로의 집 수저 갯수까지 아는 동운 까지, 이런 식으로 어거스트의 일원들은 박지민을 본인들의 영역에 하나하나 집어넣고 있었다. 애 초 영역 안에 들어간 사람이 있긴한지 도통 알수없는 민윤기와, 영역이 넓은 듯 좁아보이는 김주 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랬다.
"연습 글렀네."
"그러게요...."
대화를 너무 좋아하는 박지민과 대화가 뭔지도 모를 것 같은 (박지민의 생각이다) 민윤기의 조합 은 늘 좋지 못했다. 적어도 박지민의 경험치로 만든 데이터 베이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민윤 기는 늘 그랬듯 쪼만한 맥북 프로를 무릎에 올려놓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쩐지 병풍이 되 는 기분. 침묵에 쥐약인 박지민이 일어나 연습실을 뱅뱅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내 다시 자리로 돌아온 지민이 입고 있던 까만 블랙진의 무릎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토레타를 하도 만져대서 그 런가 손이 축축.... 내려앉는 침묵에 손바닥을 쳐다보는 지민의 손 위에 휴지가 내려앉았다. 닦아, 찝찝하면. 지민은 휴지를 어정쩡히 받아든채로 생각한다. ...안 보고 있는 거 아니었나....
민윤기와의 삐그덕거리는 첫인상 이외에도 박지민이 민윤기를 불편해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사실 참아넘길만한 수준이었는데, 두 번째 이유는 박지민에게 그야말로 크리티컬 히트였다. 모든 것의 원인은 빌어먹을 어떤 냄새와 투박한 디자인의 반지에 있다.
원인. 박지민은 술을 잘 마시는 편이다. 전개. 그러나 어거스트는 소위 술꾼 집합소다. 고로 박지 민의 주량으로 어거스트의 회식은, 너무도 즐거웠지만 다음 날 아침에 필시 고통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새벽 내내 넷플릭스 보다가 양치질 안하고 잠들기. 척추 수술 1800만원 이라는 말을 알면서도 구부정한 자세로 다리를 꼬기. 이런 것들과 종류를 같이 했다. 분명 고통일 걸 아는데 꼭 하게 되는 짓들. 음주와 가무는 친구다. 어거스트의 창조 신화처럼 내려오는 건배사. 정아가 일어나 포문을 여는 것이 어거스트의 공식적인 회식 루틴이었다. 첫 잔은 가득! 다같이 따라 외친 다. 첫 잔은 가득!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건배사를 선창한다. 음주와 가무는? 지민도 손을 하 늘로 뻗어 따라 외친다. 친구다! 정아가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소주잔을 더 높이 든다. 술집과 무 대에서는 어떻게! 정아의 말에 따라 손을 흔든다. 정신놓고! 흔들림에 소주 몇 방울이 잔 밖으로 넘쳤지만 그런 것쯤이야, 뭐. 술은 넘치고, 밤은 길다. 어거스트의 공연 뒷풀이는 항상 그랬다. 왁 자한 웃음 소리와 도통 취향을 알 수 없는 술집의 선곡 센스까지.... 진짜 정신 나가게 즐거워.
"지민이 얼굴 왜 이렇게 빨갛니?"
"누가 얘만 양주 먹였어?"
"근데 지금 다들 얼굴 시뻘건데...."
"와, 나 윤기형 얼굴 벌게진 거 처음봐요."
동운아, 니가 붙든거 윤기 아니고 재하야. 정아가 친절히 정정해줬건만 동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사를 부렸다. 주용의 말처럼 다들 얼굴이 새빨개져서 취기에 잠식당하기 직전이었다. 필름 끊기 기 전에 모두를 귀가 시키는 건 민윤기나 안재하의 몫이었는데, 오늘은 안재하가 (개말아먹은 팀 플 덕분에) 상당히 술이 당기는 날이었으며 민윤기는 금연 실패의 여파로 편의점에 다녀오느라 부어라 마셔라 타이밍에 끼어있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지민은 브레이크 없는 에잇톤 트럭이라 는 가사가 왜 무서운지를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여긴 브레이크도 없고 핸들도 없고 심지어 문짝 도 몇 개 날아간 트럭....
정아는 단정한 흑발을 단단히 묶거나 틀어올린채로 무대에 올랐었고, 새하얀 얼굴에 은은한 화장 을 하고서도 끈적한 분위기가 나는 곡을 기막히게 살렸다. 그 때문에 '단정한 섹시미'를 풍긴다며 여성 팬들이 뒤를 졸졸 따랐는데.... 무대에 서지 않기 시작한 후로는 무대 연출이나 영상을 도맡고 있었다. 무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지민에게 보컬의 자리를 넘겨준 이 후로 무대 위에 절대 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과 단단한 성정은 아무도 못 말렸다. 그것도 민 윤기의 잔재라고 박정아는 말했다. 민윤기랑 붙어있으면 옮는다니까.... 박정아의 말이 지민의 귓 바퀴를 타고 문득 떠올랐다. 명치께부터 올라오는 열기를 못 이겨 지민이 휘청휘청 일어난다. 와, 진짜 어지러워.... 취했냐 묻는 주용에게 취객의 유행어인 '나 하나도 안 취했어'를 시전하고 지민 은 화장실이 있는 가게 이 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울렁울렁. 높이가 들쭉날쭉한 계단에 거의 기어가듯 올라 사 분의 삼 정도의 지점에서 지민은 계단을 헛디딘다. 그야 당연한 것이, 계단은 원래 고른 높이고, 박지민 눈에만 높이가 들쭉날쭉이니까. 손바닥으로 까슬한 벽을 짚어 에베레스트 등반하는 등반가에 빙의해 계단을 등반하고, 마침내 마지막 칸을 딛고 올라서서 '야호'라도 외치고 싶어진 지민이 누군가를 마주한다.
그 지점에서 지민의 기억은 커피 엎지른 레포트마냥 흐릿하다. 졸면서 들은 강의처럼, 기억이 아예 안 나는 것도 아니고 드문드문 나니까 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지민은 다음 날 본인의 자취 방 침대에서 눈을 번뜩 뜬다. 옆 바닥에는 동운이 엎드려 있었고 거실엔 어거스트의 멤버들이 이 불을 깔고 시체마냥 드러누워있었던 건지 난장판. 1교시 있다던 주용과 레슨 과외를 하는 재하, 그리고 술 마셔도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던 '귀가본능' 민윤기는 보이지 않았다. 왔다갔는지도 모 르겠네.... 정아도 아침에 몸을 추슬러 집으로 돌아갔는지 '미안해 지민아 ᅲᅲ 방 못 치우고 나왔 다. 애들 너무 잘 자길래.... 내일 누나가 밥 쏠게.' 라는 다정함 듬뿍 담긴 카톡이 와 있었다. 박지 민은 거실을 한 번 휘 둘러보고 바닥에 널부러진 이불을 척척 접어 침실로 가져온다. 이불장에 여름 이불들을 쑤셔넣다말고 동운의 다리에 발이 걸려 휘청인다. 벽을 손을 짚는 순간 돌아오는 기억 몇 조각. 지민은 본능적으로 중얼거린다. 개 좆됐다.... 창 밖엔 참새와 매미가 운다. 박지민도 울고싶었다.
박지민은 지금 몇 스푼의 의심과 몇 스푼의 자책, 그리고 몇 스푼의 에로틱하고 불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냉장고에 두었던 콩나물로 대충 끓인 콩나물국을 먹고 있는 동운이 반쯤 먹어갈때 까지 지민은 수저를 들고 사색에 잠겼다. 동운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친구의 의 리를 지키자 싶어 호의를 베푼다. 야, 안 먹냐? 잠 덜 깼어? 동운의 질문에도 그저 침묵. 쩜쩜쩜.... 동운이 결국 숟가락을 들어 지민의 손등을 냅다 갈긴다.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해! 벌게진 손 등에 묻은 국물을 대충 훔쳐낸 지민이 심각하게 중얼거린다. ...네가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다면 어쩔래. 동운이 답한다. 뭔 실수? 지민은 손을 들어 자기 이마를 때린다. 그냥 일단 그랬다면 넌 어쩔래.
"글쎄.... 실수잖아? 함 봐주고 넘어가지 뭐."
"...실수가 아니면?"
진짜 술이 덜 깼냐? 실수였다가 실수가 아니었다가. 뭐 어쩌란거야. 동운이 우물우물거리며 말을 하는 탓에 입술 새에 노란 콩나물 대가리가 움직인다. 드럽게 좀! 먹고 말해. 지민이 괜히 타박하며 콩나물 국을 그대로 싱크대에 쏟아붓는다. 아깝게 다 버리냐. 동운의 대답이 뒷통수에 날아들 지만 지민은 아랑곳않고 침실로 다시 기어들어간다. 닫힌 문을 쳐다보던 동운은 어깨를 으쓱이고 만다. 저 새끼 왜 저래.
지민은 침대에 모로 누워 생각한다. 누구지? 누구냔 말이야. 이불을 퍽퍽 쥐어팼다가 인형을 가져 와서 다시 눕는다. 가로로 누웠다가 세로로 누웠다가, 또 일어나서 벽에 몸을 기댔다가 베란다 문 을 활짝 열어본다. 열기와 매미 소리에 기가 죽어 도로 닫았지만. 그는 간밤에 사고친 사람의 행 동 루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당황스러워하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착각인 것 같기도 해. 요새 좀 욕구불만인 것 같기도 하고. 응응. 현실 부정하기.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벌떡 일어난 지민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지난 밤 입었던 하얀 티셔츠다. 하얀 티셔츠 의 등판이 얼룩졌다. 먼지 가득한 술집 복도의 벽에 실컷 문질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민은 이따금 돌아오는 기억의 잔재에 이마를 두어 번 더 때린다. 현실 부정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회상하기.
누군진 몰라도 잘했다. 누군지 모른다는 점이 현시점 박지민의 가장 큰 골칫거리기는 한데.... 지 민은 전 후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말투만 알았어도 색출하긴 훨씬 쉬웠을텐데. 대충 상대가 계 속해서 비슷한 단어를 속삭였다는 것만은 기억했다. 조금 타박하는 말투였던 것 같기도 하고....
박지민은 찾아야한다. 자기 티셔츠 등판에 먼지 얼룩을 남기게 한 사람이 누군지. 그 얼룩을 신경 쓸 틈도 없이 숨이 모자라게 만들던 사람이 누군지. 정신없이 매달려서 입을 벌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던 상대가 누군지. 허리를 감싸고 벽에 몰아붙여져 입을 맞추는 동안 지민은 눈을 감 았고 상대는 소중한 걸 쥐는 것처럼 양 손으로 얼굴을 잡아올렸다. 그의 손에서는 맡아본 적 있 는 냄새가 났고, 손가락에 낀 반지 때문에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살갗을 간질였다. 박지민은 단서 두 개를 알아냈다. 향과 반지. 마지막으로 기억난 그 밤의 상대와 나눴던 소소한 대화 때문에 지 민은 이틀 간 연습을 쉬었다. '공연 앞두고 몸 관리 잘 해.' 박지민이 일냈다. 술 취해서 가족같은 멤버와 키스했다. 한 술 더 떠서, 상대를 기억 못한다.
"동운아, 이게 요즘 애들 인사법이냐?"
"아뇨, 그건 걍.... 박지민이 미친 듯?"
지민은 연습실로 들어오는 모두의 멱살을 잡고 마약 탐지견마냥 킁킁대길 반복했다. 그 냄새! 그 냄새 주인이 누군지만 알면. 사실 안다고 해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상대라도 특정 하지 않으면 지민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별하고 나면 일에 집중하는 사람처럼, 지민은 믿을 수 없는 기억을 조금이라도 덜 회상하기 위해 딴 짓을 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 기억을 계속 해서 떠올려서도 안 됐다. ...시도때도 없이 꼴리는 19금 만화같은 짓을 하고 싶진 않았으니.
유감인지 다행인지 정아는 항상 쓰던 향수가 있어서 후보군에서 제외했다. 남은 건 모두 남자 멤 버뿐이었지만 애초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던 지민의 연애 역사를 바라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친누나같은 정아와 그런 일을 쳤다면(?) 지민의 멘탈이 더 넝마조각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아가 속도 모르고 웃었다. 지민이 왜? 향수 바꾸게? 너무도 다정하게 지민의 손목 에 본인의 향수를 칙 뿌려주는 호의를 보고 지민이 어정쩡히 웃었다. 네.... 아.... 친구 선물! 주려 고요. 정아가 머리를 틀어올리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내 거 이름 롤리타엠피카. 보라색. 참고해~ 정아의 달큰한 향수 냄새에도 멋쩍게 웃고 말았다. 박정아 열외.
지민은 몇날 며칠을 네이버 검색창에 온갖 향수를 검색하는데 소요했다. 그래서 조금 범주를 좁 혀나가자면, 향수 안 쓰는 부랄친구 곽동운 열외. 곽동운은 애초 가장 먼저 열외한 것이, 진정 곽 동운과 키스를 했다면 박지민과 곽동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될 테니까.... 그리고 향수가 아닐 수 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핸드크림? 바디워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흐릿해져가는 후각 기억 때문에 지민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멤버들의 짐까지 강제로 개봉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 다. 졸지에 왓츠인마이백까지 찍은 멤버들이 공허한 표정으로 지민을 쳐다봤지만 지민은 두 배는 더 공허한 얼굴로 터덜터덜 연습실 소파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혹시 기억이 잘못됐나? 우리 멤 버 아니고 그냥 같은 술집 손님이었나. 차라리 그 쪽이 백배 천배는 더 나았다. 한 번 만나고 말 면 그만인 상대와 그런 실수는 없는 셈 치면 되는거고.... 아씨... 키스를 좀 잘하긴 하던데. 지민이 손을 들어올려 제 뺨을 쳤다. 뭔 생각을 한 거야...? 지민은 스스로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 알 아내서 뭐, 뭐를 하려고..., 자꾸 찾고 싶어지는거지?
향으로 상대를 특정하는 것은 포기한 박지민이 다른 단서에 매달렸다. 반지! 반지가 있었지. 멤버 들의 악세사리 취향을 익히 알고있는 지민이었지만 그것도 유력한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그야 음악하는 놈들은 손에 반지 두 세개쯤 그냥 끼고 다니거든.... 크롬하츠 반지와 한몸이 된 것 같은 주용부터, 실반지나 끈반지, 대체로 실버 반지를 애용하는 재하, 그리고 새까만 무광 반지나 써지 컬 스틸 같은 투박한 디자인을 고수하는 윤기까지. 하.... 밴드하는 놈들은 이래서 안 돼.... 다 겉 멋이 들어선.... 양 손에 주렁주렁 반지를 낀 지민이 허탈히 웃었다. 만져보기라도 하면 알게 되려 나? 대뜸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왜인지. 소파에 널부러져있던 지민이 옆자리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윤기의 손에 시선이 간 건 그 때문이었다. 자는 새 조심스레 확인해봐야지, 하는 안일한 마 음. 몸을 기울여 손에 낀 반지를 유심히 보다가 손 끝으로 살짝 만지는 순간, 손을 감싸는 흰 손 가락 다섯. 깍지끼듯 단단히 고정해 잡은 손. 그 잠깐 사이에 손바닥에 뛰는 맥박도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 아니, 착각이 아닌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헤르츠.
벙 찐 지민을 올려다보며 졸음 섞 인 얼굴을 한 윤기는 어떤 물음도, 타박도, 반응도 없이 엄지로 지민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두 눈동자가 새까매서, 변명을 하려던 지민의 말문이 턱 막힌다. 짧게 정돈된 손톱, 그리고 끼고 있 는 반지 만큼이나 투박한 손가락. 몇 번이나 무대에서 베이스 기타 현을 튕겼던. 어쩌면 그 날 지 민의 허리를 감았을지도 모르는 야한 손.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롯이 진실만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민은 꽉 붙든 손을 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목줄 매인 개처럼 고분히 윤기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윤기는 상 체를 일으키나 싶더니, 자꾸 뒤로 물러나는 지민의 품에 얼굴을 가까이 한다. 까만 가죽 소파에 몰린 지민이 호랑이 앞의 생쥐마냥 숨도 조심스레 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다가온다. 윤기의 무릎에 틈 없이 닿은 허벅지와 맞잡은 손. 그리고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이 지민은 밉게 느껴졌다.
숨 하나짜리 거리. 퍼스널 스페이스는 가볍게 무시한 듯한 거리감에 지민이 숨을 들이키고, 타이밍 좋게 연습실의 도어락 소리 가 청명하게 울린다. 띡, 띡, 규칙적으로 울리는 신호음에 지민이 양 손으로 윤기의 어깨를 밀어 내기도 전에, 윤기는 천천히 일어나 늘 그랬듯 맥북을 집어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손을 옮겼 다. 뭐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지민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 입술을 앙다문 지민이 당혹 스러운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나자마자 윤기가 시선을 흘린다. 아주 짧게 목격한 민윤기의 두 눈 동자.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저런 눈을 하는구나. 박지민은 그 날 밤의 범인 찾기를 그만두었 다. 이유는 몰랐다. 풀리지 않은 십자말풀이의 빈칸처럼 그대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