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빈칸 이후로 찾아온 두 번째 빈칸이 바로 '은선하 남편찾기' 였다. 박지민의 입장에선 착 잡함이 두 배다. 우리 팀의 세 남자 중에... 은선하의 남편이 있댄다. 근데 그 셋 중에 나랑 입술 부빈 놈이 있다. 근데 그 셋 중에 나를 벗겨먹고 싶어하는 놈도 있는 것 같다. 박지민은 깨질것 같은 머리를 붙들고 입술을 짓씹는다. 대체 누구야. 지민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는 은선하의 남편이 민윤기인 경우였다. 아니면 입술 부빈 놈이 은선하의 남편이라거나. 암튼 세 가지의 수수 께끼는 서로 꼭 여집합이어야 했다. 교집합이 하나라도 생기면, 그건 박지민의 인생에 크나큰 오 점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누구인 것 같아요? 형이에요? 형이냐고요? 저녁 연습 내내 숨쉬듯이 셋을 닦달하는 동운이 정아에게 꿀밤을 먹고나서야 연습에 집중했다. 모두가 암묵 적으로 지키는 침묵 같았다. 평소엔 굉장히 시끄러운 편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시덥잖은 농담 던지는 재하도 없고, 새로 데모곡을 들고 왔다며 들뜬 윤기도 없고, 속주를 보여주며 분위기를 띄 우는 주용도 없었다. 그냥 서로 마피아 게임의 아침이 왔습니다- 상황처럼 뒤지게 눈치만 보고 있 을 뿐이지. 더 웃긴 건 저 셋 모두 아무런 해명이 없다는 점이다. 너네 뭔데? 정아가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영상을 찍고 있던 캠코더를 냅다 꺼버리고 정아가 싸늘하게 말한다. 다들 집합. 맥주 까.
연습실에서 맥주까자는 뜻은 팀의 중대한 회의가 있다는 뜻이다. 재하와 정아가 싸웠을 때도 열 렸던 전체 회의가 고작 이런 이유로 열리게 된다니.... 지민이 비척비척 자리에 앉아 맥주캔을 깠 다. 다들 오묘한 얼굴을 하고 서로 열심히 눈을 피한다. 눈깔은 열 두갠데 마주치는 건 하나도 없 다. 다들 숨기고 싶은게 있는 모양이지. 지민 역시도 숨겨야 할 비밀이 있으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첫 번째 안건. 은선하 남편은 그래서 누구냐? 이 주제가 먼저 치고나오자 마자 정아 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야. 누구냐, 진짜? 이걸 왜 우리한테 말 못하고 있는건데? 정 아의 말에 동운이 공감하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누군데 그래요! 그냥 우리한텐 말해줄 수 도 있는거지.... 우릴 못 믿어? 지민아, 너도 말 좀 해봐. 곽동운이 대사를 토스하자 지민은 고장난 장난감 병정처럼 삐걱거렸다. 지민은 말을 어물거린다. 어...? 어, 그러게. 그러게 말이야.... 큼큼. 떨떠름한 반응에 눈동자가 죄다 지민에게로 꽂혔다. 지민은 사실 뭔가 복잡미묘한 기분에 잠식된 상태다. 스스로가 어디에 더 집중하고 있는지 우선순위를 두지 못해서다. 그 날 키스한 것이 민윤기였는지가 지민의 머릿속에선 더 지배적이었다. 은선하의 남편이 민윤기인지는.... 알고싶지도 않은 기분.
다시금 찾아온 침묵에 정아가 휴대폰을 내려놨다. 야. 아무도 오늘 집에 못 가. 이거 결론나기 전 까지 아무도 갈 생각 하지 마. 어거스트의 원년 멤버나 마찬가지인 정아가 이토록 강경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은 정말 중대사라는 이야기였다. 모두들 멈칫하나 싶더니 재하와 주용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오늘, 오늘은 안되는데! 둘의 말이 겹치자마자 정아가 팔짱을 꼬고 앉았다. 어~ 그러셔? 그럼 말하던가. 너. 재하를 향한 손가락. 네가 은선하 남편이야? 지금 나 카톡이며 인스타 디엠이 얼마나 오고 있는지 아냐? 어거스트 인스타는 불났거든, 지금? 전화도 막 오더라. 어거스트 내부 에서도 알고 있었냐면서. 관계자 연결해달라는데.... 정아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머리를 흩 었다. 에이 씨발.... 매니저도 없는 밴드에 뭘 바라는거야, 진짜? 정아의 짧은 하소연에도 재하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었다. 야, 근데 나 오늘은 진짜 좀 가봐야 되거든.... 정아가 담배를 물고 일 어나며 말한다. 새까만 워커로 재하의 발을 밟으면서. 못간다고 했다. 말 두번씩 하게 하지 마라....
꼬리를 말고 휴대폰을 순순히 반납한 재하와 주용이 털레털레 맥주 안주를 사러간 사이 동운은 지민에게 열심히 속삭였다. 야, 암만 봐도 재하 형이야. 아니면 윤기 형일수도. 지민이 특정인의 이름에 움찔, 반응한다. ...왜? 그렇게 말했어? 동운은 이상하게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얘는 이런 주제 참 좋아하더라....
"아니. 내가 단서를 딱 잡았거든."
"뭔 단서?"
"은선하가 디스패치 같은 곳에 걸리지도 않고 연애를 해온거잖아."
"그렇지...."
생각해보니 그것도 신기하네. 은선하 근처에 사생팬이 몇 명인데 그걸 눈치 못 챘을까? 우리 학 교 근처로 오는 것도 좀 웃기고.... 지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운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러니까!
"아마 은선하 남편은 차가 있거나, 자취하거나."
"오.... 일리있어."
"그리고 고작 대학생이 은선하랑 뭔 연결고리가 있겠어."
"그것도 그런데....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않냐? 사람 인간관계를 어떻게 다 알아."
아냐, 아냐. 은선하랑 이어지려면 뭔가 저~ 부자동네 사는 애들일 것 같단 말이지. 우와, 동운아. 너 색안경 지린다. 지민의 말에 동운이 주먹으로 지민의 허벅지를 냅다 갈긴다. 뭐라 욕할틈도 없 이 이어지는 개똥철학 추측. 요컨대 말하자면 이건 곽동운의 킹리적 갓심. 요전에 봤는데, 재하 형이 들고 다니는 거 은근 다 명품인거 알지? 차도 있고. 그 형 핸드크림도 오 만원이 넘는거 쓰더라.
"당연한 거 아니야? 재하 형 집 잘 사는 거 누가 몰라."
"... 재하 형 부자야?"
"그 형네 집 대대로 음악하잖아. 어머니셨나 아버지셨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고. 누나는 하프 전공."
하프.... 동운이 말문 막힌 듯 입을 가린 사이 지민이 양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래서, 네 추측은 뭐야. 집 잘 살고 차 있는 것 같은 재하 형이 남편이다? 동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에라, 멍 충아. 주먹으로 다시 꿀밤. 그 정도 추리는 팬들도 진즉에 하고도 남았겠다. 지민과 동운이 만담 개그를 나누는 사이, 모두가 하나 둘씩 자리로 돌아왔다. 어디선가 울리는... 괴상한 벨소리. 무슨 자연인이다 프로에 나올법한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에 두리번거릴 때, 누군가 무심결에 말을 뱉는 다. 재하형, 전화오는데요? 재하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어어, 그래. 안 받아도 돼. 말과는 달리 손이 벌써 마중나와있다. 촉 좋은 정하의 손이 꿈틀한다. 어이. 동작 그만.
"아~ 진짜 별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별 거 아니면 여기서 받으라니까 그러네?"
"... 보이스피싱이야, 보이스피싱."
"개소리말고.... 넌 보이스피싱범 전화번호를 저장해놓냐?"
"...."
"저장된 이름은 뭐야? '받지마' ? 너 어디 국정원서 일하니?"
하.... 부재중이 눈 앞에서 네 개째 쌓일때쯤, 재하가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정아가 씩 웃는다. 야. 정아의 턱짓에 재하가 울상인 얼굴로 스피커 폰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왜 대답이 없어, 인마!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또랑한 목소리와 상반되게... 입이 걸었다.
재하의 한숨 세 번과 의문의 호통 두 번이 지나간 후, 드디어 정아가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재하 친구 박정아입니다. 같이 밴드 연습하던 도중에 전화가 울려서요."
[ 어머, 정아? 박정아? 얘기 많이 들었어요! ]
순식간에 누그러든 목소리에 정아의 눈이 커진다. 재하를 쳐다보는 눈엔 언뜻 확신이 비친다. 정 아의 입모양이 말한다. 너 뒤질래? 재하가 그제야 말을 한다. 다... 다 설명할게. 지민과 동운은 어느새 양 손을 맞잡았다. 아침드라마 아니야, 이거?
"그니까... 은선하랑. 뭐라고?"
"남매. 내가 오빠."
[ 연년생인데 뭔 오빠? 웃기고 앉았어, 아주. ]
"야, 너 말 그렇게 할래? 이번에 너 때문에...."
[ 아니, 그보다 정아언니.... 너무 죄송해요. 열애설 그거, 진짜 급했어서 저도 모르게. ]
요약하자면, 톱스타 은선하가 만나오던 남자가 있는 건 사실.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을 앞둔 것도 사실. 기자회견을 앞두고 그 사실을 발표하는 것을 가지고 말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선하의 모든 작품활동을 존중하고 그녀의 인격을 사랑하는 척 했던 남자는 본성을 드러낸 듯 했다. ‘너 어차피 은퇴해야하잖아? 그냥 A그룹 사모님으로 살면 되는거고. 너 완전 로또 당첨 수준인데 자 꾸 왜그래?’ 비서마냥 옆에 가만히 들어앉아 자신을 도우라는 남자의 말에 기자회견장 대기실에 서 냅다 싸워버린 모양이었다. 염증투성이였던 연예계에서 원치도 않는 섹시 컨셉이며 온갖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이 안 맞아 은퇴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스스로의 커리어며 자부심을 바닥에 떨어뜨려놓는 것 같은, 무시하는 발언이 문제였다. 계획대로 은퇴를 선언했으나 결혼 상대로 다른 사람을 지목하기로 한 것. 은퇴도 하는 마당에, 이판사판이다 싶어 순간의 노이 즈를 노릴 심산이었고 어찌보면 똥차였던 그 남자에게 선포하는 결별 선언이기도 했단다. 순간의 감정에 욱해서 떠오른 것은 아직 매스컴에 한 번도 다뤄진 적 없는 그녀의 오빠였다. 안재하는 이 대목에서 머리를 감싸쥐었다. 야.... 너 진짜 미쳤냐? 그날 실장님이 나한테 전화와서 울었다고.
[ 아 그래서 정정기사 내준다고 했잖아. ]
"그게 그걸로 해결될 일이야? 이게 진짜.... 내가 너 때문에 인터넷을 끊었다. 네 광고 나오는 거 싫어서."
[ 미쳤냐 진짜? ]
눈 앞에서 탁구처럼 오고가는 찐남매의 필터링 없는 날것의 대화.... 지민은 지금 말하는 게 은선 하, 아니- 안선하라는 것을 믿을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보니까.... 동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며 양 팔을 문질렀다. 둘이 돌림자 써요? 하? 선하, 재하? 와 개소름...! 근데 몰랐어.... 동운이 소 름을 연신 외치며 연습실 안을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사이 정아는 정정 기사에 꼭 어거스트는 열애설과 무관하다는 멘트를 넣어달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재하는 여전히 투닥거리다가 결국 앞으 로의 방향을 의논하기 위해 집으로 빨리 들어오라는 요구를 듣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윤기도 한 숨을 푹 내쉬다가 일어나 재하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선하한테 안부전해주고. 재하가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아, 형도 안선하 좀 어떻게 해봐요. 안선하는 형 말이라면 잘 듣는다고요.... 윤기가 재 밌다는 듯 웃었다. 선하 오랜만에 얼굴 보자고 해. 만간에 부모님들이 좀 보자시더라. 재하가 질 린다는 표정을 했다. 아.... 걍 낚시나 가면 안돼요...? 둘의 대화 사이에 낀 정아와 동운, 그리고 덤 으로 지민까지 모두가 경악하는 표정. 아.... 알고 있었...? 지민의 말에 윤기가 의문인듯 고개를 기 울였다. ...말 안했었나? 지민이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어리바리 헐렁해빠진.... 이런 사람 이 그런 눈깔을.... 그런 비밀을....
한바탕 소란은 딱 맥주 한 캔을 다 비우니까 끝이 났다. 어거스트는 좀 더 유명해지기야 하겠지 만 어차피 상승세를 타고있던 밴드였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지민은 다시 공연에 오를 생각에 손 발이 찌릿거렸다. 해체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이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버스정류장에 서서 이 어폰을 꽂으려던 지민의 손을 누군가 다시 잡아왔다. 그제야 지민이 떠올린다. 아차. 아직 덜 푼 십자말풀이 퀴즈가 있었다. 이미 풀어낸 십자말풀이 퀴즈에 정답을 쓴다면 아마, '남매'라고 삐뚤 빼뚤 써넣을텐데. 풀다가 중단한 첫 번째 퀴즈가 있었다는 것을 지민은 상기했다. 손을 잡아온 상 대가 그 날처럼 손깍지를 꽉 꼈다. 잠깐 시간 좀 있냐. 질문에 지민이 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갗에 바람에 느껴진다. 여름은 가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이, 왕복 8차선 도로의 자동차 소리 대신 드럼 소리가 몸 안을 메웠다.
"손은...."
지민이 입을 먼저 열었다. 손에 힘이 스륵 풀리는 것을 느꼈는지 지민이 다급하게 덥썩 다시 맞 잡았다. 자, 잡아도 되는데요. 지민이 어설프게 말한 몇 마디 말이 우스운지 윤기가 퍼즐 맞추듯 지민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어 손깍지를 꼈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도 될 만큼 한 풀 꺾인 더위. 가장 구석자리여서 그런지,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도 안 보이는 조그만 공간. 온전 히 꽉 맞잡은 손이 원래 이렇게 안정감을 주던가? 지민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그....
"술집에서?"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어? 윤기가 무감하게 물어왔다. 지민이 삽시간에 달아오른 얼굴로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그, 아니. 그.... 괜찮. 싫, 싫지는 않았는데요.... 지민이 고개를 홱 돌려 바닥을 쳐다본다. 원래 이런거 물어봐요? 잡히지 않은 쪽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던 지민이 눈을 질끈 감는다. 미쳤나봐.... 뭐 그런걸 물어본대, 이 형은. 혼잣말로 쪽팔림을 누적하고 있던 지민의 얼굴을 다시 잡아돌리는 건 하얗고 손마디 툭툭 불거진 손이었다. 진짜... 기억 안나나보네. 윤기 의 말에 지민이 눈을 떴다. 그거 나 아니었는데.
"뭐라고요?"
사색이 된 지민이 윤기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형 아니에요?! 꽥 소리지른 지민을 앞에 두고서도 무드를 잡는 게 어찌보면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아랑곳 않고 점점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 윤기 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거 나 아닌데. 키스한 거.... 보긴 했어, 우연히. 거기 계단에서. 나 담배 피우려고 옥상 가려던 참이었거든.
정보 과부하. 지민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영 집중 못하는 것이 언짢았는지 윤기는 대뜸 고개를 숙 여 말랑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제야 윤기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듯 지민이 다급히 속삭인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어도, 입술이 닿는 거리다. 윗 입술에 윤기의 입술 이 가볍게 닿았다. 그럼 누구, 누구랑.... 아니, 너무 취해서.... 뒷말은 못했다. 가벼운 버드키스라고 속이는 것처럼 닿는 입술에 안심할 틈도 없이, 능숙하게 입을 벌리도록 가볍게 볼을 누르는 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없고, 그 때보다 훨씬 따듯한 손바닥의 온기만 느껴진다. 하얗고 투박한 손. 몇 번이나 무대를 메우던 베이스 소리를 내던 손. 수많을 곡을 썼던, 몇 번이고 연습실의 문을 열 던, 안 보이게 저를 도와주던.... 그리고 지금, 정말 지민의 허리를 감는 야한 손만 남았다. 욕망의 색은 늘 선명하다. 입술이 맞닿자마자 혀 끝으로 가볍게 입천장을 간질이고는 숨 쉬라는 듯 센스 좋게 입술이 떨어졌다 맞붙는다.
눈 앞에서 그러는 걸 보니까, 돌아버릴 것 같던데.... 윤기가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언뜻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랫배가 찌릿해질 만큼 야한 눈. 무대에서도 이런 눈을 할까? 그래서 팬이 그렇게 많은가? 지민이 얼얼하게 전기가 오른 것 같은 양 손으로 윤기의 옷자락을 말아쥔다. 다시 맞붙었다 떨어진다. 계속 닿고 싶은데. 지민은 저도 모르게 애가 탔다. 숨이 모자란데, 계속 들러붙고 싶은 이상한 취미가 생길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아끼던건데.... 놓칠까봐. 뺏길 것 같아 서 돌아버릴 뻔 했어. 넌 자꾸 나 피하고 있고....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에서는 방파제 없는 욕망이 들이치고 있었다. 새까맣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공과 절대 놓아줄 리 없을 것처럼 허리에 단단히 느껴지는 압박감. 오히려 금욕적인 인상을 주는 입매였는데, 그 입술과 혀가 쓸고 지나간 자리는 죄다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지민은 십자말풀이의 첫번째 칸을 회상한다.
그건 민윤기가 아니었다. 이제 누구였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민은 그제야 인정하고 말았다. 대상을 찾지 못한 이유는 '누구였는지'가 궁금했던 게 아니라, 그게 '민윤기였는지'를 알고 싶었던 스스로 의 오만함에 기인했다고. 첫번째 십자말풀이 칸에는 단정한 윤기의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있을 것 이다. 아마도 트리거라고.
"...누구인지,"
"절대 말 못하지."
"그렇겠죠...."
"아예 잊어버리면 더 좋고. 기억에서 지워."
"그래야죠...."
"...궁금해?"
...아뇨. 하나도 안 궁금해요. 지민은 이제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은 십자말풀이 종이를 구겨 쓰레 기통에 넣는 상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윤기가 언뜻 뿌듯하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좀 전보다 가벼운 키스. 여전히 야릇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좀 귀여운 구석이 있네.... 지민도 웃음이 자꾸 샜다.
귀에서는 드럼 소리가 들렸다. 아마 심장이 뛰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