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수작
깜박깜박 켜졌다 꺼지는 형광등 앞에서 오늘도 난 고뇌한다. 무엇을 고뇌하는가. 이 형광등은 언제쯤 제 능력을 다하고 죽을 것인가. 이 빛이 꺼지면 형광등의 모든 존재 자체의 이유가 무의미해 지는 것인가. 과연 사람도 그럴 것인가. 제 생의 이유를 다하고 나면 인간의 존재 이유가 무의미해 지는 것일까. 고작 그런 이유 따위로 난 과외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인가 시발. 심히 철학적으로 파고들 것도 없이 욕지거리부터 나온다.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초인종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결과지만 뭐 어쨌든 일단 고뇌하는 척 해본다. 과외를 잘못 선택했어. 비싼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랬는데. 입에 들어가지도 않는 주먹을 깨물곤 우는 소리라도 내보지만 스물하나의 짬밥을 괜히 처먹은 게 아닌 지 도저히 눈물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몸이라도 아픈 척하고 그냥 쨀까... 아니야. 그때 즈음이면 문자로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하고 마지막 과외비가 나올 지도 몰라. 머리를 쥐어 싸매고 괴로워하다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띵동- 경쾌한 소리를 내는 현관벨을 세게 짓눌렀다. 재수 없는 현관벨 같으니. 너는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현관벨아. 난 아주 개떡,
" 어머~ 선생님, 오셨어요~ "
" 아, 안녕하세요 어머님 "
같은데... 끝내 잘려버린 말 끄트머리를 부글 거리는 속에서 보듬어 준다. 응 괜찮아, 아니 시발 안괜찮을 것 같아. 아냐 괜찮아. 인간의 인격체는 몇 개가 존재할까. 최소 대여섯 개는 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벌레처럼 드글 거린다. 야, 야 좀 나가. 나 과외비 받는 만큼은 해야 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스물하나 돈 없는 대학생 원은 자본주의에 굴복한 나머지 점점 미쳐간다. 그러나 죄 없는 부모님들께(돈줄께) 제 생명이 닳아가는 표정으로 맞이할 수는 없는 법. 어느 정도의 사회생활 짬밥으로 재빨리 하하호호 가식적인 웃음을 자아낸다. 오케이, 방금 연기 좋았어 하고 지나가던 감독님이 컷 사인을 보낼만한 연기였다. 이 정도면 남우주연감이네. 나의 마지막 쌉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
시발, 드디어 보스몹이 짠 하고 나타났다. 나의 사회 이면적 모습을 본 그 녀석이 꽤나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본다. 약간 사회생활에 찌든 나를 한심하다 면서도 불쌍하다는 듯한 저 눈깔. 하지만 난 그런 눈빛에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그냥 존나 사실이기 때문이다. 뭐,
뭐. 니가 그렇게 쳐다봐 봤자 어쩔 건데. 입술을 삐죽 내민다. 어쩔 수 없다. 존나 맞는 말이어도 일단 짜증은 난다.
" 어, 어. 그래 윤기 안녕. "
그러나 역시 이 보스몹 녀석에게도 짜증을 낼 순 없는 법이다. 나의 소중한 과외 돈줄이 끊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이 재수탱이 녀석도 내가 보듬어 주어야만 한다. 내 멘탈도 내가 다듬지 못하는데 이 녀석의 인성을 보듬어 주어야 한다니. 이런 망할. 저 생글생글,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이 오늘따라 더 짜증 난다. 어어, 저 눈웃음. 저 눈웃음은 특히 더 위험하다.
" 야, 야. 그 눈웃음 치지 마라. 경고했다. "
" 형. "
" 아아, 안 들린다. 아아. "
" 형 오늘은 니트입고 왔네요, 귀엽다. "
에라이 시발. 기어코 그 멘트를 들은 내 표정은 점점 썩어간다. 거울을 보진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나 내 안면 근육들이 온몸으로 말해준다. 왜 저러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지가 무슨 최준이야? 어, 예쁘다. 이러게? 제발.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까 더 어이없다. 생긴 건 멀쩡하면서 하는 짓은 최준이라니. 이뿐만 인 줄 아는가. 언젠가는 내 손을 만지작 거리더니 형 왜 이렇게 손이 작아요? 하면서 깍지를 끼더랜다. 물론 바로 손을 뿌리치기야 했지만. 진짜 너무...
" 개수작. "
" 알아요. "
" 알면 하지 마. "
" 싫어요. "
아, 머리야. 팍 소리 나게 머리를 짚자 또 이번엔 안 안파요? 이런다.
" 내 마음이 더 아파 마음이... "
" 왜, 설레서? "
이젠 해탈하다. 마하반야 불경을 외우고 있을 지경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부처가 직접 와서 내 화를 식혀줘야 되는 것 아닌가.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는 내 손가락틈 사이로 저 보스몹 녀석이 실실 처웃는 것이 잘도 보인다. 후, 화를 고르기 위한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책 펴 라며 제법 선생 같은 멘트를 골라 말한다. 또 이럴 땐 고분고분한 민윤기가 조용히 책을 편다. 진짜 세상이 불공평한 게 이 녀석은 공부도 꽤 잘한다. 아니 실은 머리가 좀 좋은 것 같다. 고등학교에선 머리고 뭐고 늘 꾸준하게 쌓아 온 학생이 최고라고들 말하는데 그건 머리 좋은 애를 만나보질 않아서 하는 말이다. 머리도 좋고... 수업도 (이상한 플러팅 치는 것만 빼면) 열심히 듣고... 참 저 입만 조용히 하면 예쁠 텐데. 왜 저럴까.
물론 나도 아직 대학생 이지만 그래도 1년 정도를 봐온 선생 입장으로선 이해가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 주변에 이쁘고 풋풋한 여자애들도 많을 테고 솔직히 선생과 제자? 진짜 도저히 입에 붙지도 않고. 아직 멋모르는 나이라 사랑에 대한 환상! 뭐 이런 거겠지 하고 싶지만 또 어떤 부분에선 나보다도 현실적이라 진짜 뭔가 싶다. 그냥... 약간 사랑에 대해서만 그런... 오픈 마인든가? 선생과 제자든 뭐든 사랑하면 오케이! 뭐 이런 거? 내가 너무 꼰댄가?
라고 정확히 이 애를 만나고 2개월이 지났을 때 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누적 5개월 정도까지 짬이 차자 나는 그제야 평정심을 찾고 해탈의 경지까지 이르게 됐다. 니가 나에게 무슨 플러팅을 하든 난 내 소신(=밥값)을 다할 것이니라 뭐 이런 비스무리한 거. 그래. 그런 마인드로 그 후 약 1개월을 더 버텼다. 근데 문제는, 그 동안 해오던 스킨십의 농도가 점점 짙어져 간다는 것이다.
뭐 첫만남 부터야 스킨십을 하기야 했다. 손 만지는 거, 손 잡는 거(일방적), 내 목덜미 주물거리기 등등 여러 가지로 나에게 많이도 스킨십을 (처)했으니까.
아니 근데 요즈음 들어 너무 스킨십의 농도가 감당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진해진다. 처음엔 손을 잡고 스치는 손길이 어딘가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이상했다. 처음엔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런데 점점 날이 갈 수록 내 뒤에서 스리슬쩍 안아 백허그를 한다든가 그러면서 조금씩 내 허리를 지분거린다든가 아니면 자꾸 내 목덜미 뒤에서 제 목소리를 내리깔고 이름을 부른다든가. 그런 것들. 솔직히 백허그 당할 땐 키도 나랑 비슷한 게 덩치만 커서 약간 맹수에게 잡혀버린 소동물의 느낌도 난다. 옴짝달싹 못하고 잡아먹혀 버릴 듯한 느낌. 근데 이런 고민들을 주변에 말하면 하나같이 똑같은 답만 나온다.
'하지 말라고 딱 선을 그어.'
'이런 거 설레지도 않는다고 정색하거나.'
'차라리 수능 끝나고 생각해본다 말한 다음 수능 끝나면 손절해.'
'애새끼 하나 들러붙는 것도 뭐라 못하냐.'
아니 근데 솔직히 좀 억울하다. 내가 진짜 어디 여드름 한 가득에 뚱뚱하고 이목구비 제대로 배치도 안된 놈이 이랬으면 과외가 잘리는 일이 있더라도 정색하고 손절칠텐데, 문제는 얼굴. 저 얼굴이다. 하얗고 어딘가 뱀 같은 눈매와 날렵한 턱선만 아니였어봐. 저저 다부진 어깨와 울퉁불퉁 마디마디가 붉은 저 손가락만 아니였어봐. 그래 시발. 문제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고삼이란 놈이 참 경외하게도 완벽한 제 식이었다는 거다.
어이가 없어서 한숨만 죽죽 나온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고삼 놈이 뭘 먹고 그렇게 된 건지 점점 더 제 이상형에 충족해가고 있는 덕분에 날이 가면 갈 수록 내 심장 펌핑만 오지게 열일하고 있다. 망했다 망했어 아이고. 상식적으로 선생과 제자라니... 만화에서도 이런 설정이면 욕 먹는다. 뭐 한 살 차이도 아니고 미자와 성인 관계에서 두 살이면 꽤 큰 거다. 아무리 몇 달 뒤면 수능을 치고 교복을 벗어던질 나이라 해도 어쨌거나 나와 이 녀석의 관계적 요소가 변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내 앞에서 문제집이나 풀고 있는 이 고삼놈이 괜히 미워진다. 조금만... 조금만 못생기지 그랬냐...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다 쌤,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 이 새끼는 고삼이다. 난 쌤이다. 우린 관계 위치부터 존나게 다르다. 갑과 을이다. 정신 차려라 지민아.
쓸데없는 생각들과 스스로의 답답함과 멍청함에 숨이 턱 막혀온다. 진짜 왜 이러지. 요즘 너무 외로운가. 소개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저 불그스름한 마디마디의 손가락 덕분에 더욱 심란해진 마음을 애써 달랜다. 정신 차리자. 애 대학 보내야 한다. 마치 어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부모들 같은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응응 윤기야 이건, 하고 운을 떼며 애써 머릿속을 알파벳들로 가득 채워나갔다.
그래, 어차피 대학 보내면 안 볼 사이니까 잊어!
**
윤기와 지민이 만난 것은 윤기가 열여덟 막바지에 달하고 지민이 겨우 새내기 때를 벗긴 후였다. 마침 돈이 없었던 지민은 자신의 대학(꽤나 명문대)을 이용해 과외를 구했고 거기서 윤기네 어머니가 우리 아들 대학 좀 보내달라며 연락이 왔었다. 생각보다 쉽게 과외를 구한 지민은 그 문자에 아싸라비아 콜롬비아를 외치며 신이 나게 맥주를 땄고 그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면서도 문자에 적혀있는 과외비를 보며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여기까진 신이 자신의 돈 없는 대학 생활을 가엾게 여기고 행운을 베풀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해말자, 무교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없는 신까지 만들어 내어 모든 신에게 저주를 퍼부어야만 했다.
윤기와 지민의 첫 만남은 좀 특이했다. 지민이 아싸라비아를 외치고 정확히 일주일 뒤, 지민은 윤기네 집 현관 앞에서 띵동- 경쾌하게 울리는 현관벨을 눌렀다. 그때의 지민은 그 경쾌한 현관벨 소리를 들으며 아, 현관벨 마저도 날 환영해 주는 구나 하고 제 미래도 모른 채 오바쌈바를 췄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웬 남자아이 한 명이 저를 보며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민은 딱 알아챘다. 얘가 내 대학 생활을 구원해준 과외 학생(구원자)이구나! 안 그래도 신이 나서 웃고 있던 얼굴이 더 활짝 펴지며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런데 그 남자애는 저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던 것 아닌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어, 하고 운을 떼니 화들짝 놀라며 드, 들어와. 하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처음엔 반말로 대하던 것에 엇, 약간 싸가지 없는 학생인가 하고 걱정도 많이 했었다. 막 수업하다 개기는 거 아니겠지 하고. 하지만 윤기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처음 지민을 보자마자 뿅간 민윤기. 동안이기도 하고 새내기 치곤 적갈색 빛의 얌전한 머리 덕분인 지 자신의 여동생 친구 즈음으로 착각하곤 사고회로를 오지게 돌리기 시작했다. 살짝 쳐졌으면서도 어딘가 요염한 눈매에 도톰한 입술, 그리고 잠시 웃었을 때의(비즈니스) 예쁜 눈웃음까지. 완벽히 제 식인 과외선생에게 아주 제대로 한눈에 반해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지민이 과외선생님이란 사실을 아는 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면이나 끓여서 대접할까 생각하던 윤기는 지민을 식탁에 앉히고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는 가슴을 부여잡고 제때제때 라면을 쟁여 놓지 않은 스스로를 욕하고 있을 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고 과외 선생님은 도착했니~? 하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들고 있던 컵라면 하나를 떨어트렸다. 그리곤 약간의 떨리는 목소리로 지민에게 혹시... 과외... 선생님 이세요...? 라고 바보같이 물었다.
윤기는 그 날을 아직도 제 흑역사 중 하나로 손꼽는다. 지민은 윤기의 세상 잃은 표정에 눈치를 보다 으응... 니가 윤기지? 하고 대답했고, 윤기는 확인사살 당한 충격에 대답도 못하고 잠시 화장실에 간단 말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곤 화장실 변기 커버 위에 앉아 조용히 현타를 맞았다. 시발 어떡하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실로 맞는 것인가? 왜, 왜 대학생처럼 안 생겼지? 어이없게도 그거였다. 윤기의 눈엔 자신보다도 어린 풋풋한 고딩으로 보였는데, 어째서 저보다 365일을 두 번이나 더 먹은 성인인 것인가? 왜 자신보다 어리지 않는 것인가? 1분 채 안 되게 그리 생각했다.
그리곤 잠시 뒤에 고뇌했다. 그럼... 포기해야 하나? 진짜? 완전히 내 스타일인데? 아니 일단 그걸 떠나서 이렇게 한 눈에 반한 걸 놓친다고? 솔직히 이 정도로 완벽한 이상형이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운명 아닌가? ···그냥 미친 척하고 들이대면 안되나?
그렇게 짜라쟌~ 지금의 돌직구 연하남 st 의 민윤기가 탄생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민윤기 본인도 이렇게까지 빠져 들 줄은 몰랐다. 누군간 어른의 동경심과 존경으로 인한 착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행동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지민이 저보다 더 어려 보이기 때문에 딱히 그렇다 할 어른의 묘미 따위야 없었다. 그런데도 박지민에게 빠지게 된 건, 글쎄다. 그냥 빼도 박도 못한 내 취향의 얼굴이라서? 음... 물론 그것도 꽤나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외모가 다가 아니다. 착한 심성과 생활애교, 또... 하나하나 늘어트려 놓기엔 너무 벅찰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가.
뭐든 이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져버란 건 맞다. 옛날에 첫사랑은 이름만 곱씹어도 입안이 써진다는 글을 보고 웃기고 자빠졌네 하며 비추를 눌렀었는데. 지금은 취소하고 좋아요 눌러야 할 판이다. 박지민, 박지민··· 지민··· 이름만 불러도 쌉싸름 하면서도 달다. 나도 놀랍다 진짜. 한 해 반 조금 넘게 채우는 동안 너무 많이 빠져버린 탓일까. 수시도 박지민이 다니는 대학으로 원서 넣고(아슬아슬하게 턱걸이) 최저 겨우 맞추기 위해 뼈 갈도록 공부하고··· 민윤기 열아홉 인생 최초일 것이다.
이런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박지민이 내 마음을 받아줬으면 좋으련만. 퉷퉷, 입안이 써지기 시작했다. 쩝하고 입맛을 다셔본다. 쫑알쫑알 병아리인 지 오리인 지 모를 부리 같은 입술이 내 눈앞에서 알짱댄다. 귀여워. 내 앞의 박지민을 꿀꺽 하고 한입에 삼키고 싶다. ···이런 생각한 거 알면 뒤지게 맞겠지. 슬쩍 시선을 옮긴다.
민윤기에게 박지민은 죽어도 어른으로 안 보인다.
**
날씨가 확연히 쌀쌀하다. 10월 초 까지만 해도 나름 괜찮았는데 10월 말이 되니 일교차도 커지고 눈치싸움의 당당한 승자들은 간혹 패딩을 입는 모습도 보인다. 민윤기는 요즘도 나에게 플러팅을 오지게 치고 있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면 눈물을 머금고 축구공 마냥 뻥 하고 차버릴 텐데. 이도 저도 못 하고 플러팅은 플러팅대로 받고 있으니 내 마음만 더 커져 갈 뿐, 벽 치겠다는 마음과 정반대로 오히려 휘말리고 있는 듯하다. 이런 망할. 한 달도 안되게 남은 수능 디데이에 나만 불안한 건지 내 첫 제자라는 놈은 실실 쳐웃는 얼굴이나 하고 있다. 아니 물론 긴장 안 하고 안 떠는 게 좋은 거긴 한데... 적당히 긴장을 안 해야지. 이건 뭐, 이미 수능 끝난 학생의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식 왜 이래?
" 민윤기, 너 안 떨려? 수능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
" 글쎄요, 딱히. "
" ...그래도 긴장은 어느 정도 해.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수능을 쳐야지. 그러다 최저 못 맞추면 어쩌려고? "
" 그건 큰일이긴 한데, 에이 설마요. "
눈으로 윤기를 슬쩍 째린다. 저 낙천적인 성격 좀 보라. 얼마나 재수가 없는 지. 물론 윤기의 말이 맞긴 하다. 저번 모고처럼만 하면 아마 이번엔 턱걸이도 아닐 것이다. 물론 수능 당일 컨디션이 안 좋거나 할 경우엔 망쳐버릴 수도야 있지만 솔직히 확률이 저조하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재수 없다 정말.
" 물론 니가 시험 망치면 당연히 안 되는 거지만, 어느 정도 운도 따라야 해서 모르는 거야. 그러니 대비를 철저히 해놔야지. 그러다 수능 망친 애들 꽤 봤어. "
" 와, 지금 저한테 겁주는 거에요? "
" 그, 그게 아니라..! "
" 되게 섹시하다. "
" ···? "
" 아, 그리고 수능 망치면 1년 동안 또 선생님이랑 같이 수업하는 거에요? 그건 또 좋은데? "
멈칫, 지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런 지민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윤기는 신나게 떠든다. 그때면 나도 성인이고···,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이마에 실금 하나가 더 그어졌다.
" 너 그만해. "
" ..네..? "
" 그만하라고, 이런 거. "
아직도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윤기가 눈을 데구루루 굴린다. 지민이 갑자기 화난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화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가 치는 플러팅이 이젠 질리고 싫어서? 아니. 아니면 머리만 믿고 나대는 첫 제자놈이 얄미워서? 아니. 그저 그는, 제 첫 제자라는 놈이 나 좋다고 재수할까? 이딴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해 빡쳤고, 장난인 걸 알았지만 한 순간 설레버린 자신에게 빡쳤을 뿐이다. 근데 그것이, 언젠가 끊어내겠다 다짐한 이 플러팅을 끊는데에 발화점 역할을 한 것이었으니. 이로 인해 민윤기가 드는 생각은 좆됐다- 일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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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민윤기와 박지민은 더 이상 만나질 못 했다. 이유가 무어냐 묻는다면 그것은 의외로 민윤기 쪽의 일방적인 만남 거절이었다. 지민의 단호한 정색 바로 이틀 뒤, 윤기네 어머님께서 연락이 왔다. 수능 한 달 남은 동안은 혼자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동안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고 마지막 과외비를 받은 날, 지민은 꼴사납게도 울었다. 온갖 동물들의 이름 뒤에 새끼를 붙여가며 자신의 첫 제자이자 첫사랑(은 아니지만 어쨌든)을 씹기 바빴다. 지가 먼저 나한테 플러팅 쳤으면서...!! 두 살이나 어린 좆고딩 주제에 내 맘을 잘도 흔들어 놓ᅲ았ᅲ으ᅲ면ᅲ서ᅲᅲ !!! 지민은 이리도 원통할 수가 없었다. 지민 자신도 좆고딩에게 흔들린다는 팔자 따위야 있을 줄 알았겠는가? 그저 운명의 장난에 사정없이 휘둘려 이리도 진심이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 이 불효자 놈...! 수능 날에도 보러 안 갈 거야!! 뿌엥 다시 눈물샘이 터진다. 진심으로 배신당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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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D-DAY!!
뭐가 좋다고 느낌표 두 개까지 붙여가며 수능 끝을 알리는 지 윤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더럽게 힘들었던 수험생 생활이 끝나는 것이야 두손 두발 상쑤들고 환영한다지만, 일단 '수능을 끝내는 것' 이 아닌 '수능을 친다는 것' 에 초점인 윤기에겐 수능 D+1 정도여야지 남들처럼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민과의 일방적 만남 단절 후, 윤기는 자신의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약 한 달간 뼈를 갈며 공부했다. 물론 그전에도 하루에 3시간 정도씩 자 가며 공부하였다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은 눈에 독기를 가득 품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어냐 묻는다면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겠는데, 첫째는 첫사랑에게 배신당한 큰 슬픔으로 인한 것이고 두 번째라 함은 그 첫사랑을 또 포기하지를 못해 죽어도 최저를 맞추어 첫사랑과 같은 대학에 가겠다는 의지였다. 그리하여, 늘 언제나 욕심없고 만사 귀찮은 민윤기에게 독기를 품어준 유일한 이가 되었으니 민윤기는 그에 배반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지난 한 달 동안 박지민의 사진만 보고 독하게 참아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민윤기의 사정이고, 그를 알리 없는 지민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수능날 응원을 하러 갈지에 대한 유무를 생각하고 있었다.
" 가고 싶은데... 가기 싫어. 얼굴은 보고 싶은데 마주치긴 존나 싫어. 어쩌지. "
그렇지만 응원인데, 마주치지를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지? 끙, 하며 머리를 굴리던 지민이 침대 위로 엎어졌다. 몰라, 알아서 잘하겠지 뭐.
**
수능이 끝나자 노을이 지고 있다. 해가 생각보다 되게 짧네... 한 번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역시 없네... 엄마한테 일부로 나오지 말라 그랬는데. 뒷머리를 한 번 긁적인다. 주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학생들이 스쳐 지나간다. 우는 이들도 있고, 환한 표정을 하며 가족들에게 안기기도 한다. 끔벅끔벅 눈만 깜박이다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왜 슬픈 거지, 박지민이 안 와서? 음, 일정 부분 차지 한다만 전부는 아니였다.
" ...수능이 너무 좆같아서 그런가. "
성적과 상관없이 너무 허무하긴 했다. 그럼 그것만으로 우는 것인가? 글쎄...
" 수능이 좆같은데 박지민이 안 와서? "
오, 그게 맞는 듯.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키득키득 혼자 웃었다. 누가 보면 미친놈으로 보이겠네. 하늘이 어둑어둑해진다. 벌써 한 시간 조금 지났다. 진짜 안 오는 건가.... 엉덩이를 대충 털고 일어난다. 이젠 사람없이 휑한 학교 주변을 부러 어슬렁 거린다. 가방을 주섬주섬 열어 엄마가 주신 엿을 꺼내 학교에 던졌다. 엿 같은 학교 끝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만 여전히 눈물이 흐른다. 자꾸 눈 앞을 가리는 것이 귀찮아 손등으로 대충 눈을 비빈다.
" 아, 따거. "
그러니까 내가 눈 비비지 말라 그랬지!!!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피니 씩씩 거리며 다가오는 박지민이 보인다. 와, 대박.
" 뭐가 대박이야 대박은. "
" 진짜 박지민이야? "
" 어쭈, 이젠 이름도 막 불러? "
눈웃음을 지어가며 제가 가져온 목도리를 둘러주는 지민에 아직도 현실감을 되찾지 못 하고 헛웃음만 뱉었다. 너 눈 빨간 거 보니까 울었지? 울었네 울었어. 하며 절 놀리는 지민의 팔을 더듬더듬 잡았다. 그리고는 품으로 당겨 그를 안았다.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윤기의 패딩을 꼭 그러쥐며 그를 토닥였다.
" ...빨리 안 와서 서운했어? "
" .... "
" 차가 막혀서 어쩔 수 없었어. 미안, 더 빨리 올걸. "
조곤조곤 타이르는 지민의 품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물론 윤기의 덩치가 더 컸으므로 지민이 안긴 꼴 이었다) 형, 보고 싶었어요. 답지 않게 수줍은 지 지민의 옷가지를 파고들며 말하는 윤기에 지민이 쿵쿵 거리는 심장을 붙잡곤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
이내 둘다 엉엉 운다.
역시나 지민도 어렸으므로.
선로님 요번 연하공 너무 귀여워요>_<! 재밋는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