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의 이름은 꽤나 어릴 적부터 윤기의 손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에 윤기는 지민을 일찍이 만나 네임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었고 결혼을 약속하고 연인으로 지내왔다.
지민은 늘 형의 손목에 있는 자신의 이름이 그저 신기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이 나타나 결혼을 하자고 하면 당황할 법도 한데 꼭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것이라 정해진 듯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민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래, 처음 결혼을 수락할 당시에는 그저 흥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것을 고려하기에 지민은 어렸고 윤기의 얼굴이 퍽도 지민의 취향이 었던지라 지민에게 윤기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윤기는, 그저 최선을 선택한 것이었다. 자신의 손목에 지민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지민을 찾았고 다른 생각을 할 것 없이 청혼했다. 물론 윤기는 지민의 거절 또한 고려하고 있었고 지민의 의사를 존중해 줄 생각이었으나 지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민이 윤기와 지내며 걱정하게 된 한 가지는 지민에겐 윤기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윤기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네임이 있는 사람들보다 없는 사람 더 흔했기 때문에. 하지만 네임이 한쪽만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네임이 있다면 둘 다 있는 경우가 월등히 많았고 한쪽만 있다면 흔치 않지만 후천적으로 생겼다. 지민은 본인이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지민은 윤기가 교수로 부임하고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난 윤기가 씻고 아침을 준비하면 30분 후 알람을 듣고 일어난 지민은 씻고 식탁에 앉는다.
"지민아, 물리학 과제 오늘 까지라더라."
"아직 다 못했는데..."
"이따 점심때 교수실로 와. 밥 먹으면서 도와줄게."
"형, 오늘따라 잘생겼네요?"
"밥이나 먹어."
아침 먹고 출근 준비를 끝낸 윤기는 미적대며 옷을 입는 지민을 주워 차에 태웠다. 아침부터 강의가 있는 날이라 윤기와 함께 학교로 가는 지민은 여전히 졸고 있었다. 물리관 앞에서 내린 지민에게 점심 약속 까먹지 말라고 전해준 뒤 교수회관으로 출발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곧 쓰러질 듯한 지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루만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알차게 보내겠다며 수요일 시간표를 1교시부터 꽉꽉 채워 넣은 지민은 일주일 만에 후회하는 중이다. 지민은 소파에 드러누워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냐며 조잘거렸다.
윤기가 처음 만난 지민은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아이였다. 본인이 제안하긴 했지만 남이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며 결혼하자고 했을 때 웃으며 그러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때 윤기가 본 지민은 그저 즐거워 보였을 뿐이다.
지민은 흥미를 끄는 것과 아닌 것으로 세상을 구분했었다. 다시 흥미를 끄는 것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그런 지민 앞에 나타난 윤기는 흥미와 소유를 모두 충족시키는 존재였다. 첫 만남에서 네임으로 흥미를 끌고 결혼을 통해 자신에게 소유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윤기는 지민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지민아."
"왜."
"떡볶이 못 먹어서 속상해?"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n-)
어쩜 저리도 속이 다 보이는지. 처음 만났을 때의 지민이 마치 윤기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투명해진 모습에 윤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냐는 듯이 쳐다보는 지민의 입에 고기를 물려주며 지민을 달랬다.
"미안, 오늘 일이 좀 많았어. 떡볶이 가게 언제 끝나는지 찾아볼 걸 그랬다."
"... 괜찮아요, 형 탓도 아니고."
"다음엔 꼭 먹자."
"나 그만 주고 형도 먹어."
지민은 윤기의 손목을 자주 확인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윤기가 손목을 가리고 다녔는데 그 뒤로 더 빈도가 늘어났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네임이 없다는 불안이 커져 윤기에게 있는 네임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가려진 손목을 볼 때마다 지민은 윤기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늘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지민의 걱정과 다르게 윤기가 생각하는 건 지민 하나였다. 함께 다니면 간혹 제 손목의 네임을 보고 애인의 이름이냐 묻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답하면 열이면 열 모두 지민에겐 어디 있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지민은 웃으며 저만 아는 난감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 상황들이 가뜩이나 네임이 스트레스인 지민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가린 것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지민이 손목을 확인하는 빈도가 부쩍 늘어나자 당황스럽고 걱정이 됐지만 내색하지 않은 윤기였다.
"형, 오늘 덥대. 반팔 입어!"
"어. 강의실 추울 수도 있으니까 넌 겉옷 하나 챙겨." (-ㅅ-)
"더운데..."
"얇은 거 하나 들고 가. 입지는 말고."
여름이면 에어컨 찬바람에 꼭 감기 걸리는 지민을 알아 매년 겉옷을 챙겨주는데 지민은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자신을 덥게 만드는 원흉이 미울 뿐이다. 가방에 잘 챙겨갔다 싶으면 꺼내질 않아.
강의실에 들어온 윤기 눈에 보이는 건 역시 겉옷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반팔 차림의 지민이다. 추워하면서도 팔만 문지르고 있는 지민에 윤기는 결국 에어컨을 껐다. 학생들의 원성을 사긴 했지만 '내가 추워서 껐다' 한 마디하니 조용해졌다.
결국 도서관에서 콜록거리는 지민을 찾은 윤기는 차에서 담요를 가져다 덮어줬다. 그래도 덮어주면 잘 갖고 돌아다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윤기는 문득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 지민을 덮어주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겉옷을 안 입고 다닌다는 생각을 했다. 더워도 꼬박꼬박 카디건을 입고 다녔던 것 같은데.
"뭐, 이젠 지민이가 신경 안 써서 그런가."
'옛날엔 많이 싸웠던 것 같은데.'
'너 정말 왜 그래.'
'뭐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 건데, 나?'
'뭐?'
'내가 문제지? 평범하게 살던 니 인생에 니 이름 달고 끼어들어서는 처음엔 네임이 있다는 게 흥미롭고 재밌었겠지, 근데 좀 같이 맞춰주니까 지가 뭐라도 된 건 마냥 보호자 자처하니까 같잖겠지. 안 그래?'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님 뭔데. 난 너한테 뭐길래 네 친구보다 널 몰라. 분명 늘 너와 함께 있었는데, 나 모르게 너한테 일어난 일을 남에 입에서 듣는 게 어떤 기분인 줄 알아? 난 너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5년을 같이 살았는데 내가 아는 건 니 이름, 생년원일, 연락처 그리고...
됐다, 관두자. 이래 놓고 내일 또 평소처럼 지낼 거잖아. 나만 속 터지고 열불이 나는데 내일이면 또 아무 일 없단 듯이 행동해야 하겠지.'
윤기와 지민은 자주 이런 식으로 다투고는 했지만 이 날이 가장 크게 다툰 날이었다. 지민은 선을 정해놓고 그 이상의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이 낯선이라 그런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친해진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근데 아니었다. 가까워져도 선을 맴돌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심지어 제 몸에 있는 네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에도 자신은 몰랐다. 스트레스로 지민이 응급실에 갔다는 지민의 친구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 화를 억누르며 지민에게 갔지만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괜찮아'였고 윤기는 더 참지 않았으며 지금의 상황까지 왔다.
'말을 하라고.'
'...'
'내 몸에 있는 니 이름이 문제면 내가 지워내든 벗겨내든 할 테니까
제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고...'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런 무서운 얘기하지 마. 내가 다 말할게.
나 표현할 줄 몰라. 내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지민은 정말 할 줄 몰라서 하지 않았다. 친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외부인의 개념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굳이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 존재. 생각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다 내비치곤 했다. 그런 지민에게 윤기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이 얘길 할까? 필요 없는 얘기 같아.'
'지금 말할까? 아냐, 좀 이따.'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윤기가 알게 되는건 한 두 개뿐이었다. 지민은 온 신경을 윤기에게만 쏟고 있었는데 전해지는 건 적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이해해야지라고 하기엔 이것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또 자신이 이렇기에 안일하게 윤기도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적으로 지민의 잘못이었다.
지민이 왜 그랬는지 안 이상 윤기는 더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같은 일로 싸울 필요도 없었다.
짧은 과거 회상을 끝낸 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네임을 가리기 위한 보호대 대신 손목에 자리한 가벼운 시계를 보며 윤기는 지민이 끝날 시간이라는 걸 알고 정문 앞으로 데리러 나갔다.
"형!"
"어."
"김석진 교수님한테 과제 좀 줄여달라고 해줘요, 나 죽어."
"엄살은, 다른 과랑 똑같잖아. 안 죽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고개를 돌리는 지민에 윤기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로 알겠다고 해주려고 했지만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지민의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뒤에서 봐도 보일만큼 튀어나온 볼살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민이 뒤돌아 있어 올라간 입꼬리가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민을 끌어안았다.
"형, 아니 교수님! 미쳤어요? 학굔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학교에서 교수한테 형이라고 부르면서 과제 많다고 애교 부리지만 않으면 안 들킬 것 같은데, 그치."
"그건!"
"그리고 좀 조용히 해. 너만 조용하면 아무도 몰라."
더는 할 말이 없어진 지민이 가만히 윤기 품에 안겼다. 그 상태로 조곤조곤 저녁에 뭐 먹을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대로 메뉴를 말하던 지민은 돈가스에 꽂혔는지 모든 말이 돈가스로 시작해서 돈가스로 끝났다. 오랜만에 형이 만들어주는 돈가스가 먹고 싶다는 지민에 윤기는 머릿속으로 냉장고에 고기가 있었는지 고민했다. 지민이 조잘대는 동안 없다는 결론을 내린 윤기는 지민에게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했다.
졸린 눈으로 강의실에서 나오는 지민을 데리고 마트에 갔다.
"돈가스에 쓸 고기랑 맥주도 두 캔 사고 빵가루... 보단 나중에도 먹게 식빵을 사는 게 낫겠다."
"형, 맥주 샀으니까 같이 먹을 과자 골라왔어요."
"어... 돈가스랑 먹으려고 산 거니까 안주가 필요 없긴 한데..."
(ㅇnㅇ)
"그래, 맥주를 두 캔 더 사자."
지민은 식탁에 앉아 돈가스를 튀기는 윤기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다 됐다며 조금만 기다라고 했다. 정말 금세 완성된 돈가스는 바삭 소리를 내며 씹혔다. 잘 먹는 지민을 보며 윤기는 뿌듯함을 느꼈다. 윤기가 지민의 입에 묻은 튀김을 털어주며 지민을 불렀다.
지민아.
어, 왜요?
형이랑 평생 함께 해줄래?
어? 형, 설마.
결혼 하자.
윤기는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연 상자 안에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 한 쌍이 있었다. 윤기가 둘 중 작은 사이즈의 반지를 잡고 지민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윤기의 청혼을 들은 후 잠시 멈춤 상태였던 지민도 반지를 들어 윤기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기로 정해져 있었어도 정식으로 프러포즈하고 싶었어.
돈가스 먹다 하는 게?
돈가스 먹는 네 모습이 너랑 결혼해야겠다는 확신을 줬거든. 너와는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지만 지민을 바라보는 윤기의 눈빛이 모든 걸 납득하게 만들었다.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휘황찬란한 프러포즈가 아닌 진심을 담은 짧은 말로 하는 프러포즈가 윤기다웠다.
지민아.
어...
사랑해.
형, 나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