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 건수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팀플이라는 명목하에 꽤나 많은 시간을 민윤기에게 할애했다. 눈이 뜨일정도로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에게 벌써부터 그리 깊은 유대감을 느끼던 것은 아니었지만서도, 대화를 주고받다보면 높게만 느껴졌던 장벽이 저에 한해서 한순간에 서서히 허물어졌다는 그 성취감을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기이하다고 느껴졌던 시선은 순수한 습관의 일종인 듯 했고, 서늘하게 느껴졌던 상판은 타고난 무심함에서 기인된 듯 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모습이 매순간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사람임은 눈으로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니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늘 의미모를 시선의 부재는 존재했다. 나는 종종 민윤기가 이유없이 유리창 너머 정착지 모를 길을 걷는 인파를, 표면을 향해 둔탁하게 부딪히는 빗금의 향연을 눈에 담아낼때의 얼굴을 오래오래 담아두었다. 그저 존재하기만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고목처럼 뿌리내린 무감함이 기이해서.
만남의 끝은 또다시 식사였다. 얼추 정리된 발표자료도 그렇고, 이제 막바지로 치닫은 만남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번 만남에서 얼결에 얻어먹었다는 것이 생각나 이번엔 내가 밥 사겠노라 미리 으름장을 놨었다. 경험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분위기도 괜찮고 식사하기도 괜찮고 술을 곁들이기도 좋은 적당한 곳을 찾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졌고 집에서는 조금 가까운 일본 음식점을 골랐다. 여기 전골 진짜 맛있어요. 고기도 맛있는데 버섯이 완전 끝장나요. 겉옷을 벗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민윤기는 픽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 어떻게 알아요? 앞장설때 걸음부터가 '나 지금 맛집 소개하러 갑니다' 라는 티를 팍팍 풍기던데.
민망했으나 부정하진 않았다. 알고있는 맛집 중에선 여기가 으뜸이었다. 그 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유난히 음식이 맛있었다. 민윤기와 차례로 손짓을 나누며 섭취행위에 열중하다 문득 옆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건배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음주를 제안한 것은 충동이었다. 뭐, 최근에 막걸리 회동이후 제대로 된 음주 활동을 가진 적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그날따라 전골 국물이 술을 부르는 맛이었다. 푹 졸여진 야채를 입에 담고선 열심히 씹어대던 민윤기는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앗싸를 외치며 소주 한병을 주문했다. 그것이 크나큰 실수였음을 인지게지 못했던 나는 오랜만에 알코올 수혈회를 가질 생각에 몸이 달아있었다.
술잔이 오고 갈수록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한 잔 두 잔 들어갈수록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감각또힌 선명해져갔지만, 큰 신경을 쏟을 정도로 큰 위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해관계가 종료되었지만 이젠 불편한 사람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빠른 시간내에 마음을 텄다고 생각치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할 일이지만, 그 땐 진실로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아니, 일부로 모른 척 했을수도.
이해관계라, 어렵게만 느껴졌었던 과거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저 형 되-에게 차갑게 봤어요 그러냐?
그래서 아- 이사람이랑 팀플 끝나면 볼일 없게 해야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좀... 싸했거든요
....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괜한 오해했던 거죠, 죄송함다
민윤기의 손이 잠시 허공 위를 정체하다 유연히 휘어졌다. 입가에 가져다 댄 소주잔을 쭉들이키곤 입을 열었다.
뭐 죄송까지야. 우리 두번째 만났을때, 저 거짓말 쳤던 거 알아요?
노트북 없다고 하려 했던거? 티 났어요? 엄청.
헉 대박, 작게 벌어진 입을 작은 손으로 가리며 절망했다. 티났구나... 저 사실 거짓말 잘 못 쳐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죄지으면 안되고 거짓말하면 안되고. 물론 대한민국 가정에서 자란 여타 모든 애들은 그런 말 듣고 자랐겠지만, 그래도 저희 집은 좀 그런거에만 엄했어요. 하도 듣고 자라서 그런가, 아직도 거짓말 잘 못쳐요. 너무 티엠아이였나?
자꾸만 픽픽 쓰러지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많이 안 마신 것 같은데 요즘 술이 잘 안 받나, 아님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평소보다 확연히 줄어든 주량을 잠시 원망했다. 능숙하게 술잔에 소주를 따라내던 민윤기는 아무 말도 없었다. 보글보글, 작은 소음과 옅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가게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노래. 익숙한 멜로디를 잠시 흥얼거렸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였다. 과거의 잔상과도 같은 닳은 음악을 입에 넣고 굴리며 젓가락을 들어보인 그때였다.
“신 믿냐?”
컥, 뚱딴지같은 소리에 식도를 막 넘어가던 음식물을 뱉어낼 기세로 기침을 뱉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갑자기? 신의 존재유무를 따지는 논제에 정신이 다 아득했다.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질문을 뱉어낸 얼굴은 꽤나 진지했다. 아니, 늘상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만물위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해 묻는 얼굴만큼은 꽤나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상판이었다. 커다란 손을 느긋하게 옮겨 아슬하게 걸쳐져있던 소주잔 여섯개를 한번에 집어낸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윤회관이라고, 불교에선 육도(六道)에서 생을 반복한다고 해서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하거든.”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로 나뉘는데 사람은 각자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 윤회를 해. 만약 니가 지은 업이 더럽게 많으면 지옥도나 축생도에 가게 되는거지.
들은 기억이 있는 말들이었지만, 의문의 온상을 지울 순 없었다. 침체되어있는 민윤기의 눈을 본다. 헛도는 손을 본다. 또 마주친다. 어딘가 엉켜져있는 시선을. 민윤기는 별말없이 젓가락 끝으로 샐러드를 뒤적였다.
"그런데 가끔씩."
신의 귀애를 받는 사람이 태어나. 별일 안했는데도 운이 좋아서 억겁을 지날새도 없이 바로 윤회를 도는거야.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주기가 짧은 새로운 인생들을 사는거지, 영원히.
신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 덤덤한 목소리가 귓가에 긴 그림자를 남기며 사그라들었다. 상념의 화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편협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신에게, 사랑.
"그거 너무 불공평하다."
곰곰히 쳇바퀴를 굴려가며 이해한뒤 내놓은 대답이었다.
의외에 반응이었는지 민윤기는 속모를 표정을 했다.
"어떤 부분이?"
"개고생하면서 억겁동안 다음 인생 기다릴때 어떤 사람은 다이렉트로 다음 인생 산다는 얘기 아녜요?"
그거 너무 신이 차별적으로 들리는데. 국물이 자작하게 남아있는 냄비를 뒤적였다. 뜨거운 김이 침묵을 비집고 끼어들었다. 민윤기는 여전히 뜻모를 평평한 낯을 지어보이고 있었고, 의중을 몰랐던 나는 졸은 전골냄비에 육수가 들어있는 철주전자를 콸콸 붓는 것으로 침묵에 화답했다. 화법 사이 행간이 넓어지며 균등하지 않은 대화가 오고 가던 참이었다. 침묵을 깬건 민윤기였다.
"만약 그사람이 원래부터 운이 없던 사람이라면?"
날때부터 삶이 자기 삶이 아니고 의무에 짓눌려서 산거라면? 유일하게 선택할수 있던 것이 죽음 뿐이였다면? 그런 사람을 도운것도 나쁜게되나.
꽤나 자세한 예시였다. 민윤기가 말하는 예시의 대상이 누구인지 몰라 입을 닫았다. 펄펄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 민윤기의 얼굴이 비오는 날의 잔상처럼 흐려보였다. 무겁게 느껴지는 윗꺼풀을 억세게 비벼보았다. 또 다. 또 사라질 것 같은 얼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곤 민윤기를 바라보았다. 동공에 각인을 넣듯 새겨넣은 얼굴 위 표정은 역시, 뜻모를 덤덤함이다. 그 간극이 못 견딜정도로 낯설어서, 결국 정적을 깨고 실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형 혹시 막 사이비 이런거에요?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전도 바이븐데.”
“그러냐.”
“아오 재미없어- 어디가서 재미없단 말 많이 듣죠?”
놀릴 맛이 안나네, 중얼거리듯 뱉어내자 시선이 꽂혔다. 유리잔을 쥐고 쓰디 쓴 액체를 들이키던 손을, 말갛게 구겨낸 얼굴을 번갈아 보던 형은 기억나지 않는 옛날 일을 들춰보기라도 하는듯한 얼굴로 답했다.
“특정인물한테 그런 소릴 자주 듣긴했지.”
자조적인 웃음은 덤이었다.
...그래서 차마 묻질 못했었다. 그날의 공기는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알맞는 날씨의 오월이었고 소주잔을 타고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도, 흘러가는 그 시간의 간극들이 미치도록 아쉬워서. 낯설고 기이했던 남자를 그저 그 날에 가둬둔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었기에. 그래서 차마 그날에 갇힌 민윤기를 깨뜨릴것만 같던 물음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그 인물이 누구인질 묻지 못했다. 그게 맞는거라고 생각했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기에.
집이 어디야. 여기서 쪼옴만 더 가면 돼요. 오른쪽? 아니 왜앤쪽! 정신을 조금 차려보았을땐 민윤기의 오른팔에 의지해 픽픽 헛도는 걸음을 귀가길에 실어낸 뒤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맞아. 한잔 두잔이 몇병이 되서 술이 절어서는 집에 가고 싶다 징징댔지. 상당히 멀쩡해 보이는 민윤기를 올려다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얼굴이 어두웠다. 역광 때문인지 그가 무슨 얼굴로 날 바래다주고 있는건지 알수 없었다. 몸을 왼쪽으로 돌려낸뒤 직행했다.5분정도 거듭된 직진 앞엔 홈 스윗 홈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반 정도 기대고 있던 어깨에 얼굴을 떼어내고 붙잡혀있던 허리를 빼냈다. 우리 집 여기. 안녕히 가세요오. 두 문장을 간결하게 정리한 작별인사의 싹수 여무를 검토할 재간이 없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계단에 딛어내려는 순간에,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두번째 만남에서도, 지하도로 하강하게 되는 그 계단의 중심에서 이렇게 굴었지. 원래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성격인데도 꼭 그 대상이 민윤기면 말이 달라졌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불이 꺼진 빌라 1층 계단에 정체되어있는 나와 달리, 가로등 아래 서있는 민윤기는 하얬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의미없는 추리를 반복했던 그때였다.
형 안 가요?
지민아
에? ... 말해요 왜요
질리지마
...네? 지치지도 말고
...
그런 표정 짓지마, 겨우 웃는 얼굴 봤는데.
네가 그러면 난 또 __에 목숨걸게 되잖아.
*
꿈을 꿨다.
시린 눈발이 아프게도 뺨을 때렸다. 새하얀 한복차림의 나는 끝없이 걷고 있었다. 걸음에 걸음을 거듭하다 지쳐서 쓰러졌다. 온 몸이 무너질듯 했다. 애써 세운 모래성이 파도에 쓸리듯 바스라지는 몸을 바로잡을수 없었다. 고통만이 감각을 지배하던 그때, 문득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낯설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낯설지 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기할래 무슨 내기요 네 __을 걸고 하자
하얀 얼굴에는 익숙한 덤덤함이 덧입혀져 있었다.
*
술자리 이후 연락의 빈도가 부쩍 줄어들기 시작했다. 굳이 보태자면 먼저 피해다녔다. 무의식에서 비롯된 꺼림칙함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근래들어 몰아치는 시험을 감당할 수 없어 먼저 연락을 못 넣은 것이 두번째 이유였다. 문제의 교양수업 때 민윤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가 부러 모르는 척 굴었던 걸수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몸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머리에 빨대라도 꽂은 듯 쫙쫙 빨려나가는 기를 막을 재간은 없었다. 무심한 봄은 짧게 제 자취를 남기곤 사라졌다. 초여름의 입구에 들어선 계절은 무감각하게 온 몸을 찔러댔다. 날이 갈수록 여유는 사라지고 예민은 늘었다. 와중에 기억 속에 민윤기의 얼굴은 잊지 못했다. 억지로 기억해보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지만 도통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십 몇년을 꿈꿔왔던 기이한 수백의 꿈 속 얼굴 모를 남자의 상판에 민윤기가 덧입져진 탓에 감히 잊을수가 없었다.
민윤기는,
민윤기는 누구일까.
만약 그럴일은 없겠지만 정말 민윤기가 그 사람이라면. 나는 어떡해야하지.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정말 어떡해야하지. 공상과학같은 망상을 멈출 수 없었다. 순수한 불안함에서 오는 고통이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 그 불안이 민윤기의 실존 여부인지, 아님 속았다는 배반감에서 기인된건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여지던 사념은 강제적으로 잘려 나갔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에 젖은 운동화를 터벅터벅 집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들고 온 비닐우산을 들고 끝없이 걸었다. 집을 향해 걷고 있었으나 정처없이 떠도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우산을 쓰고 있었음에도, 온 몸으로 빗금을 받아내어 조각조각 잘리는 듯했다. 붕 뜬 시선이 사로 잡힌 것은 한 순간이었다. 빛에 투과되어 하얀 실처럼 그림자를 새기는 빗방울 사이에 인영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
"안녕."
날씨를 생각하면 얼른 우산을 건냈을 법도 한데, 쉽게 내어주질 못했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보송한 태였다. 기이했지만 놀랍진 않았다. 눈으로 목도한 진실이 아프게 꽂혔다. 심장이 하늘부터 땅끝까지 거센 소리와 함께 흔들리다 내려앉았다. 저 인사가 정말 반가워서 하는 말인지, 내 안위를 염두에 두고 한 기만인지 알 수 없었다.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정말 많았던 것 같은데. 우리 사이 소통의 부재가 길어졌던 그 수많은 밤동안 당신을 보면 무슨 말부터 내뱉어야할지, 질리게도 생각하며 늘여놨던 것 같은데. 부스스, 떨어지는 비가 아스팔트 위로 잘게 흩어졌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깼다.
"형 나 알고있었죠."
“....”
“그 꿈, 형이 보낸거지.”
“.......”
“...그거 알아요? 나 무당 될 운명이었어요."
다섯살때부터 귀신 비슷한걸 봤는데, 그걸 들은 할머니가 나 무당시키려고 했어요. 미약하지만 기가 보인다고. 근데 아빠는 경고도 충고도 무시한채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했어요. 무당 엄마한테 질려서 자긴 신이든 뭐든 다 재쳐두고 살고 싶어했거든. 근데 내가 딱 아홉살때, 당신네들이 말하는 불완전한 아홉수였을때 사고가 난거에요. 빗길에 미끄러져서 승용차에 차가 전복되는 사고였는데, 성인 둘이 죽은 커다란 사고였는데 기가차게도 아홉살짜리 꼬마애만 그 사고에서 살아남았어요. 그날 보도된 뉴스에서도 주위에서도 심지어 장례식에서까지 모르는 사람들도 친척들도 모두 기적이라고 떠벌댔어요. 근데 난 알아요. 내가 산게 기적이 아니라는걸, 그냥 내가 두 사람 목숨값을 빌어먹은 거라는걸.
고모는 한평생을 무당하기싫어서 자기 엄마한테서 도망치고 다닌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내가 이런것도, 부모님이 죽은것도 다 신 받기싫어서 도망친 자기 탓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다 포기하고 무당이 됐어요. 근데 웃긴거 알아요? 그렇게 무당되는 걸 피했는데, 고모가 신 받고 무당이 된 이후부터 귀신보는 대신 꿈을 꿔요. 내가 시체처럼 누워있으면 얼굴모를 누군가가 내 죽음을 비는 개같은 꿈. 그 꿈을 수백번은 꿨어요. 난 그게 신병의 대체품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야.
그냥 당신이 벌여놓은 장난질에 놀아난거지.
반복되는 꿈, 모든 것이 의미모를 것들이었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 말고는 이 괴이한 현상과 눈 앞에 존재하는 실체의 이상향이 설명이 되질 않았다. 상념으로 뒤얽힌 머릿속 단하나의 결론이 번뜩였다.
저 새낀 사람이 아니다.
"장난질이라."
"......."
"그 단어 참 오랜만이네."
무감각하게 고개를 뻐끔대던 민윤기는 제 발걸음을 옮겼다. 도약하는 걸음 걸음마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길게 퍼진다. 순간 온몸이 차게 식는듯한 낯설고도 기이한 감각이 뇌를 찔렀다. 풀썩,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자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인간처럼.
우우웅, 대지가 울린다.
진동이 아닌 비명, 텅빈 무공의 공간에서 오는 커다란 진공은 온 땅을 울려댔다. 천지가 흔들리는 착각에 사로잡혀 푹 꺾인 고개를 들어 실체를 바라봤다. 넓디 넓은 바다가 대지를 가득 채웠다. 귀를 찢을 듯 하늘까지 울려퍼지는 꽹과리 소리에 두귀를 뭉근히 짓누를 수밖에 없었다.
아, 또 시작이다. 빌어먹을 꿈. 아니다. 이건 환상이다. 환상, 환상. 환상이여야만 했다.
눈밭에서 본 그 광경, 그 사람. 또 다시 맞물리는 이상과 현실에 눈앞이 다 흐릿해진다.
“넌 옛날부터 감 하나는 기가 막혔어.”
“...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촉은 좋아서.”
이세계를 믿느냐는 물음에 믿지 않는다고 하였지?
그 생각 고쳐야 할거다. 이렇게 버젓히 내가 존재하니.
네가 그랬지, 죽여달라고.
___을 줄테니 내기하자고.
그러니 이건 __번째다.
.
.
.
.
‘천지신명께서 너를 귀히 쓰시려나보다.’
태생부터 미약했던지라 키가 커지고 몸이 자라는 일생 내내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던 말들. 어머니는 막달의 몸으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때 신께 그저 빌었노라고 하셨었다. 미동도 없는 부른 배를 움켜잡고 가슴으로 빌며 소리없는 울음을 내어드렸노라. 그 기도가 무엇인고로 하니, 만약 천지신명께서 듣고계시다면 이 미천한 여인의 소원을 들으시어, 이 약하고 딱한 아이를 그저 온전히 사지 멀쩡하게 나올수있게 해달라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다 내어드리겠노라고.
간절한 기도가 통했던 것인지 집안 일꾼들에게 발견되어 급히 안채로 바로 옮겨진 어머니는 기나긴 탄성과 수만의 눈물방울 속에서 사지 멀쩡한 아이를 낳았노라고, 지혜가 하늘까지 닿으라는 마음으로 지혜 지, 하늘 민 자를 써서 지민이라 이름 지었노라고. 어머니는 초봄마다 따뜻한 손으로 등을 토닥이며 꿈결처럼 아득해지는 의식에 새겨넣듯 말씀하셨었다.
면식 알리없는 천지신명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민은 알수있었다. 신께 귀애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그저 깨달음으로 얻을수있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습득이었다. 그리하여 일생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리움의 대상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저 삶의 과정속 나타나지 않는, 기억나지않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말을 배우고 걸음을 딛고, 사상과 자아를 알아가던 지민이 살아가던 나라는, 환난과 향락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임금이 부모의 도리를 저버리고 관신들이 간악을 쓰던, 세상이 어지럽던 시대. 어린 임금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좌에 앉은 숙부가제 입맛대로 나라를 주무르던 시대. 문무 대신들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을 평안케 해야 하는 것이 곧 임금의 도리요 나라의 부모된 자로서의 당연지사 한 의무라고 입 모아 말했지만, 혀 깊숙한 곳 아래에 독 숨긴 속 거뭇한 간신 임금을 부추겼고 죄 없는 이들은 단지 나라와 나라간의 세력다툼에 밀려 목숨을 잃던 시대.
피로 점철한 왕좌였건만 지고하신 임금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제 앞을 보지 못했고 말년에 들어서는 왕궁에 절을 세웠다. 왕은이기와 치기심으로 국고를 열어 금으로 미륵을 빚었다. 금 한덩이에 수백이 굶어 죽었다. 평민은 노비가 되고 토지는 왕실의 소유로 들어갔으며 서책은 장작더미로 전락했다. 결국 왕궁 호수에 커다란 미륵상 세개가 들어섰을때, 북부와 동부의 백성 10할 중 3할이 아사로 죽어나갔지만 이미 지독한 향락의 향이 짙게 베어든 수도는 굶주림과 궁핍을 몰랐다. 부패의 썩은내가 진동하던 수도의 눈은 어두워졌고 귀는 퇴화되어갔다.
그칠 기미를 보이지않는 사치와, 원망을 모르는 가뭄과, 왕즉불의 가혹함에 우의정 박중선이 임금의 그릇된 믿음을 질책하는 백만상소문을 올리고, 영의정 이보회가 오백의 문인들과 석고대죄를 감행했지만 모두 무용지물 이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기록이다. 기록은 그저 글일 뿐이다. 그 사잇길의 베여든 비통함같은 그 어떠한 것도 반영되지 않은 그저 기록.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던가.
...공자와 인의예지신을 외치던 모든 지식인들이 피를 흘렸다. 정확히는 부처상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은 자들이 피를 흘렸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머리가 효수된 이들도 많았다. 한낱 저잣거리를 쏘아다녀도 들이마쉬는 숨마다 비릿한 피내음이 진동하던 초겨울의 그 날을, 유난히 시린 계절이었던 그 세월을 지민은 억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시체 썩은내와 까마귀가 온 나라를 뒤덮던 지독한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던 두 머리와 시선을 진하게도 마주쳤었다. 피할 수 없어 그저 부릅, 마주했다.
태양 위로 겹쳐져 길게 그늘을 만들던, 자작나무 막대기 위 데롱데롱 매달려있던 그들의 얼굴들을 지민은 감히 기억하고 있다. 하여, 기억한다. 붉은 줄이 그어진 수천의 이름들을. 혜집서원의 문현필, 아당서원의 익선현과 서의철.
그리고 그 중 가장 드높게 올라가 있던 머리 두개, 우의정 박중선과 저작 박지환을.
관리이기 이전 선비였던 아버지 박중선은 식솔들을 살리기 위해, 아무도 반기지 않을 공익을 위해 사익을 저버린 이들을 살리기위해, 공자의 학문을 살리기 위해, 백만상소문을 뒤로하고 끝내 제 뜻을 굽히곤 왕의 교지를 받들었다. 사인은 반역죄. 서원의 스승이자 학사로 앉아있던 우의정 박중선이 한순간에 대역죄인 박중선으로 추락한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존망과 신임을 받던 그는 한 순간에 나라의 죄인이 되었다. 평생을 정갈함과 결의를 안고 대문을 나서던 아버지에게 남아있는것은 반역이라는 오욕과 멸시 뿐이었다. 국왕이 내린 교지를 받들어 망나니의 칼에 기꺼이 목을 내어준 아버지는 그렇게 반역자로서 생을 마치셨다.
그리고 형님은...
‘너는 살아. 살아서 기억해라. 기억하고 떠올려라. 잊지마라. 네 이름과 성씨에 수없이 새겨진 수많던 존망과 신의를.
네 가문과 네 아비와 네 형제를. ’
피 절어 뭉퉁그려진 머리채가 까마귀에 쪼인다. 딱딱, 딱딱딱, 까악 까악. 배부름을 모르는 생명에게 쪼임당하며 좀먹어지는 형님의 눈을, 지민은 그저 지켜볼수밖애 없었다.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의 폐단과 이름에 지어진 죗값으로 죽음을 택한 형님의 긍지는 저따위것이 감히 넘볼수없는 불가침의 성역이었으므로.
아버지와 형님의 죽음은 남은 일가의 목숨 값을 대신한 것이었으나 효력은 얼마가지 않았다. 무정하고 위태롭던 시대상 앞에선 모든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불 타 없어지는 서적들 위로 아버지의 관모와 의복이 얹어졌다. 타닥 빛을 토해내며 진하고도 역한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불꽃덩이를 바라보았다. 너울대는 형체에 몸을 던지고싶었다. 사는것이 이리도 수치스럽다면 어찌 살겠는가. 손 대는 것만으로도 데일것같은 이 현실을 잊고싶었지만 잊을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리 없었다. 영영 지우지 못할 죄책감일것이다. 쉬이 느껴지는 비참함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는 제 잘못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게하는 소산이었다.
성찰은 길지 못했다. 거칠게 잡아오는 손길에 맥없이 끌려나갔었다. 금수만도 못한 왕의 졸복들은 두려움에 질려 종래엔 끄윽 목울음을 내는 제 늙은 어머니와 누이들을 오라로 묶곤 희롱하던 모든 순간을, 감히 그 모든 것들을 방관케 했다.
차디찬 겨울날이었을 것이다.
얇은 소복사이로 스며드는 공포가 목을 죄던 날, 입으로 짧은 생을 들이키다 끝끝내 죽음에 잠식되던 그 날. 대문 앞에 심어놓은지민, 그러니까 저가 태어나던 해에 심어 놓았다던 커다란 살구나무의 허리가 잘려나가던 그 날. 헛둘, 소리와 함께 꽉 죄이기 시작하던 목을 안고 달랑이는 두 발을 내려다볼수도 없던 그 날. 소복이 쌓인 눈 밭 위로 태사해 한짝이 나뒹굴던 그 날, 끄으으윽 잠식되어가는 시야와 불안과 공포에 타들어가듯 죽음을 삼키다가 길게 목울음을 빼었더랬다. 실핏줄과 귓방망이가 터져 타액과 선혈이 뒤엉겨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차마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제 진짜 끝인거야....
끝이라는 위로가 공포를 좀먹었다. 아득해지는 시야 속 눈물과 절망으로 물들어진 어머니와 누이들의 얼굴이 꿈결처럼 선한대도, 어떤 동요도 들지 않았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졌기에, 죽음으로서 끝을 맺었기에. 배부름을 모르는 시대의 끝자락에서 맞이한 죽음이 비루할지언정 참담하다 생각치 않았기에. 하얗게 점멸하는 시선을 음미했다. 타들어가는 생의 끝은 생각보다 허무하다고, 그런 오만한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흐려지는 시선의 끝엔 낮선 이가 서 있었다. 소복 차림에 사내는 눈밭위로 뒹구는 저를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해를 가리고 얼굴을 거꾸로 마주한다. 의식은 생생히 날뛰고있었다. 실로 비현실이 아닐수 없었다.
이상하다, 난 분명 죽었는데.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는데도 의식만큼은 온전했다. 죽음을 습관처럼 새겨넣던 시야에 이젠 오로지 사내의 무감각한 얼굴만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지민은 감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얼굴이, 얼굴모르는 그리운 누군가와 꼭 닮아있어서.
기껏 살려놓았더니 이렇게 쉬이 가나.
...누구십니까?
살려줄까?
사내는 무감한 눈동자를 오로지 저에게로만 쏟아냈다. 눈송이가 아프게 온 몸을 두드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수는 없었지만, 한복위로 눈이 소복히 쌓인 저와 달리 사내의 차림은 그저 정갈하기만 하였다. 기이한 사내였다. 기이하고 오만한 사내였다. 대관절 누구길래 생과 죽음을 입에 담나, 천지신명님이신가. 불경한 추리에도 죄책감은 일지 않았었다. 난 이미 죽었잖아.
신에게 목숨 빌어먹은 놈들이 그리 쉬이 죽을것같아?
그래서 묻잖아. 살려주리?
......
싫음 내기할래? 니가 이기면 살려주마.
싫습니다.
무슨 내기인줄 알고?
그냥 죽게 두십시오....
......
참담한 마음으로 사느니 그저 수치스럽게 죽는것이 낫습니다....
아니지.
......
모르는게 아니라 외면하고 싶은거잖아.
네 놈이 진 목숨값, 짊어진 말들, 안게된 책임을 모조리 버려두고 싶은거잖아. 그저 어쩔수없었다는 이유로 모조리 버려두고 네마음 편하고저 따라가고 싶은 거잖아..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게 아닌데. 나는 수만의 목숨을 지었는데. 용서를 빌 기회조차 박탈되었는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대체 어떠한 권리로. 기도를 꽉죄이던 감각이 재발했다. 매이는 목으로 간신히 목소리를 뱉어보였다.
대관절 누구시길래 제게 이러십니까.
네게 생이라는 것을 준 이라고 해두지.
나그네께서 하시는 말씀들은 제게 협잡꾼의 감언처럼 들립니다.
협잡꾼이라.
담는것만으로도 날카로운 단어로군. 각진 언어를 입에 넣고 굴리던 사내는 잠시 제 태를 매만졌다. 죽은 이처럼 새하얀 피부는 눈보다도 빛났지만, 공기를 유연하게 타며 흐드러지는 눈송이는 감히 사내의 위로 오르지 않았다. 나비를 잡으려는 아이의 손길로 눈송이를 잡아낸 사내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
우리 도령께서 정 죽고 싶어하시니, 네 고통을 덜어주는 대신 넌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 네 어미는 네게 생을 주는 댓가로 무엇이든 드리겠노라 말했는데, 이제와 무엇을 받자니 네 어미는 너무 늙어버렸으니. 스스로 죽고자하는 불효자의 간청을 들어주기 위해 무엇을 내놓겠나 물어볼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이라도 되는 듯 방만하게 행동하는 사내의 말을 쉬이 믿을 수는 없었지만, 문득 지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실낱같은 절망으로 지금 이 온 몸이 바스라질것만 같은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면. 정말 그럴수만 있다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기도를 열었다. 말려들어가는 혀를 기어코 잡아내 질질, 갈망을 뱉어냈다. 죽을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
당신이 바라는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후회하게 될까. 지금 이 말을 뱉은 것을, 후회하는 날이 올까. 알 수 없었다. 바래진 종이 위로 익숙한 얼굴이 덧입혀진다. 누이들과 어머니, 형님과 아버지. 꿈결처럼 아득해지는 얼굴들은 온통 따듯한 것들 뿐이다. 서늘한 기운의 사내는 한참동안 침묵을 음미하곤, 바스락이는 눈밭 위 어떤 자욱도 남기지 않은채 걸음을 옮기곤 입을 열었다.
이렇게하자. 내가 바라는 것을 맞추면 네가 이토록 원해 미치는 죽음을 주지. 목숨값으로 장난질한 댓가가 이정돈 되야 수지가 맞지않겠나.
만약, 신께서 저를 이기지 못하신다면
...... 신께선 무엇을 주시렵니까?
그땐 네가 가장 바라는것을 주지.
그럼, 내기성사.
눈 위로 큼지막한 손이 얹어진다. 둥둥. 심장이 고동을 치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따듯하나 물기 서린 손이 지그시 눈두덩이를 누르곤 속삭인다. 산내음과 진하디 진한 바다 내음이 코를 두드린다.
이내 수면위로 부상하듯 쉴새 없이 몰아치는 것들은,
나와 내기하자.
나의 __을 위해 네 삶을 거는거다.
오로지 신의 의중모를 얼굴 뿐이다.
.
.
.
.
무감각한 동공이 저에게로 멎는다.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엔 뜻모를 표정만이 가득했다.
“살리려고 했어.”
"......"
"살아가게 하려 했는데도, 그 빌어먹을 죽음을 늘 갈구했어, 너는. 늘 방만하게 이른 죽음을 자처하고, 또 그 빌어먹을 서른을 못넘기고...”
“...바라는게 뭔데요.
“.......”
“대체 그게 뭐길래 이런 좆같은 짓거릴 벌여온건데.”
“알게되면, 어떡할건데.”
긴 한숨 한번에 발 밑 대지가 기나긴 울음을 토해낸다.
“이번에도 죽음이 그리 간절한 삶이냐?”
또 의미모를 말, 이해할수 없는 말. 불쾌한 기분이었다. 대상이 신이라서 그런걸까, 민윤기라서 그런걸까. 여전히 모를 일이다. 끝맺지 못한 생각이 무의식을 어지럽혔다.
...이래서 신이라는 족속이 좆같은거야. 한낱 재미로 내걸은 내기에 일생을 걸지. 사소히 내뱉은 말이 평생을 가고, 평생을 따라다니고. 한낱 변덕이 폭풍이 되어 집어삼키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날 죽일힘은 없다?”
“틀렸어.”
“......”
“난 네 생과 죽음에 관여할 수 없단 뜻이다.
네 다음 생이 언제, 어디에서 생겨날지조차 모른다는 뜻이고.”
쓴웃음과 주먹을 쥐락펴락하던 그는 의미모를 표정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살갗이 아닌, 제 손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듯.
“내 힘은 이제 예전같지 않거든.”
인간들은 믿음을 잃었고, 한낱 말에 벌벌 떨며 제물을 바치던 시대는 갔으니까. 복종과 순교가 남아있던 시절에 존재하던 신들은 그 위세가 대단하였을지 몰라도 믿음과 신앙을 잃게된 신은 자연스레 힘 또한 잃게 되거든. 자연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 자연위에 세력과 힘을 올리는 인간이 머릿수를 불려가는 세상이니.
그러니 그저 영생을 살아갈뿐이지. 이야기로 구전되며 그저 설화로, 전설로, 과거로 칭송되는 신화로서만 존재하며.
...바라는게 뭐냐 물었지?
난 그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다. 답을 알고있지만 입에 담을 수 없어. 산 사람을 죽일 순 있어도 죽은 사람을 살릴 방도가 지금의 나로선 없거든. 너 죽으면 난 또다시 네 회(廻)에 나를 입히기위해 고군분투하여 네 중유(中有)를 찾아다니고, 너 사는 순간이 찰나여도 아쉽지 않은듯 굴어야 하니까. 환생에 환생을 거치며 점점 인간으로 퇴화하여도 모든 세기를 끌어안은채, 그 영원의 시간이 나를 좀먹어도 나는 그저 존재하고 있어야 하니까. 저주라면 저주일까.
저벅.
빌 한 돋움에 바다가 몰아친다. 세상에 오로지 홀로, 주변 모든 것을 지워버린 신은 그저 존재하기만 하였다. 그렇기에 꼼짝없이 발을 붙이고 뿌리내릴수 밖에 없었다. 안겨오는 세계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묵직한 무게의 이치가 어깨위로 올려진다. 살갗을 간지럽히는 머릿결, 적당한 압력으로 그라쥔 손목. 그 순간 그는 그저 존재했다. 마치 저가 살아숨쉬고, 아프고, 늙고, 병들수있는 세상의 구성물인양.
“그러니까 그냥 니가 진것으로 하자.”
“......”
“그런걸로 해.”
이번에도 네가 죽으면, 난 할수있는 방도도, 차선도 없어.
“...진짜 멍청한거 알아요?”
“알아.”
“아니요, 형은 몰라요.”
“아니까 이렇게 구는거야.”
“......”
“내가 네게 영생을 걸었다는걸 모르는 너와 달리,
난 알고 있으니까."
비가 멎었다. 저녁인지 새벽인지 모를 어슴푸레한 하늘로 가득했다. 온통 무채색인 세상에서 색 없는 민윤기가 손을 뻗었다. 뺨위로 서늘한 손이 닿았다. 감각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후회할까. 기억조차 나지 않은 과거에서부터 나는, 후회를 전제로 삼고 민윤기와 함께 생을 넘겨온걸까. 그 겨울날의 제안을 수락한걸, 떠올릴 수 없는 순간들 속 민윤기의 손을 잡은 걸, 길게 늘여진 그림자를 알아채곤 뒤를 돌아본 걸, 나는 후회하나.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모든 순간을, 기억을, 시간을 후회하는 것인지. 내가 이 사내를, 이 남자를, 민윤기를 잊은 채 남은 회를 살아낼 수 있을지.
비로소 알게 된 신의 본심을 엿본다. 그는 잊혀지는게 두려웠던 거야. 자신의 일생동안, 내주었던 시간동안, 곁에 머물렀던 그 모든 순간동안 파도에 묻힌 작은 조개껍질처럼 그저 잊혀지는게 두려웠던 거야.
내기는 네가 이겼다.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신의 음성이 천지를 뒤흔든다. 비로소 민윤기를 본다. 그저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한 남자를 본다. 모든 삶의 시간 속 작은 초침처럼 부지런히 따라오던 발자취와 흔적을 본다. 이제서야 보이는 것들이 원망스럽다.
사랑이요. 내가 바라는건, 오직 사랑뿐이에요.
나는 후회할까. 이 순간을 다시 후회하는 날이 올까. 후회해도 상관 없다. 내가 수백, 수천번의 후회를 지나왔을지라도 진실로 상관없다. 어쩌면 또 후회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재건되는 세계는 빠르게 낯선 신을 삼켜냈다. 최초의 긍정을 받아낸, 내기에서 진 신은 존재를 지웠다. 바다가 무너진다. 거대한 파도가 부서질듯 몰아친다. 기억하라, 바스라지는 세계의 가운데서 모든것을 집어삼킨듯이 웃는 남자를. 아지랑이 흩어지는 공간에서 홀로 완결하고 무결한 사내를. 비로소 신이 아닌, 세계의 구성물이 된 그를.
또다시, 생(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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