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상해원경 (萬祖上解寃經)
아, 또 이 꿈이다.
빌어처먹을 신 꿈.
시린 눈발이 아프게도 뺨을 때렸다. 반복되는 스토리에 진즉에도 이골이 났다. 이 꿈을 알고 있다. 더러움을 모르는 새하얀 눈 밭위로 시체처럼 누워있는, 새하얀 한복차림의 저. 온몸이 바스라질것만 같은 고통을 잠시 재쳐두고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들어 보이면 낯선 그림자가 기울여질 것이다. 곧이어 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진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말을 걸겠지. 무심한 감정과 무심한 신은 늘 이렇게 모질었지. 얼굴모르는 사내는 패턴을 벗어나보인적이 없었다. 늘상 같은 차림에, 기울기에, 베일듯한 언어들까지.
안 질려요?
...... 나 신 안 받을건데, 적당히 하고 다른 사람 찾든지하면 안돼요?
...... 지쳐서 그래요, 내가.
겨울 바람이 거셌다. 광활하게도 펼쳐진 눈밭에는 오로지 사내와 자신 뿐이었다. 시간을 가늠하듯 중간중간 끊어내며 뱉는 말에도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죽음을 모르는 듯이 굴던 사내는 오천번은 더 들었을 말을 속삭였다.
___을 줄테니 내기하자.
그게 무언데요.
글쎄,
그건 너하기에 달렸지.
.
.
.
만조상해원경
萬祖上解寃經
"아 뭔 팀플-"
"그러니까 누가 막걸리에 눈깔돌아서 자휴하래."
"꽁술이었는데 어케 안 가 그럼!"
야 그리고 어떻게 날 홀랑 빼놓고 조를 짤수가 있어? 날 어케 버려? 니가 사람새끼냐? 물음표 살인마 빙의해서 눈 희번뜩이며 묻자 양심이 좀 찔렸는지 김경준이 시선을 빙빙 피했다. 아니 뭐... 안 온 니 잘못이지! 글고 지금 니가 나한테 성낼 일이냐? 어? 왠일로 니가 안왔는데 왠일로 소희가 같은 조 하자길래! 그래서...했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한번 자휴 때렸다고 고새 나 버리고 짝사랑 뒤지게하고 있는 김소희 따라서 홀랑 조 짜버린 것이다. 사랑에 우정을 버린 친구새끼의 눈물나는 행보가 서러워 다시 고개를 팍 박았다. 끙끙 앓자 경준이가 장난기가 가신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너 아퍼? 아 몰라... 꿈 꿨어. 그 꿈? 엉... 좀 이젠 좀 괜찮나 싶었는데 갑자기 이러네.
꼭, 그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이렇게 몸이 축축 늘어진다. 둥글게 만 후드집업에 얼굴을 묻은 채 불과 네시간전 기억을 되집었다. 여전히 무의식을 부유하는 겨울바람이 공기를 유영하는 착각에 사로잡힌 듯한 기분.
내기는 지랄, 얼굴이나 보여주고 말하던가.
"어쨌든 너 이 새끼 꼭 앞날에 시련만 가득하길 빈다...."
"이 미친, 액땜 개새야. 그러니까 누가 막걸리에 넘어가래?"
"니는 친구 없어서 안간 거잖아."
"아가리 터는거 보니까 나 없어도 잘하겠네."
아 모르겠고, 안 온 니 탓이니까 알아서 잘 해보세요 지민군- 태블릿 주섬주섬 챙기며 태연하게 사형선고를 날리는 경준이의 마지막 말에 대가리 부여잡고 악악 소리를 질렀다. 숙취까지 더해져 죽을 맛이었는데 두통을 심화시키는 말까지 더해져 진짜 뒤질 맛이었다. 팀플이라니. 개인과제만 돌릴거라며, 팀플 안 시킬거라며! 김경준 개새끼에게 건네받은 명렬표를 울적한 마음으로 다시 들여다봤다. 민윤기.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교양수업때 통 들어본적이 없는 유순한 세글자를 입에 넣고 작게 굴려보았다. 좀 사회성 괜찮은 외향적인 사람이면 좋을텐데.
팀플은 되도록이면 안 시키고 왠만해선 개인과제로 돌려서 진행 할거라던 오티날 최교수의 말이 아직도 선명한데 , 역시 어른은 믿을게 못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됐다. 한입으로 두말하는 최교수는 내 비통한 심정 모르는지 와중에 문자까지 돌리고 지랄이다.
[교양] 최광훈 교수 빠른 조율을 통해 주제 선정 원만히 하시길 바랍니다~^^ 오후 2:44
빠르게 감소하는 숫자들을 눈에 담으며 절실하게 살인을 다짐했다. 애살스럽게도 붙은 눈웃음이 이토록 꼴받긴 처음이다, 라고 생각하며.
*
서울을 동경했던 시절이 있었다. 촌구석 고등학교에서 코피 흘리면서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버티던 시절, 머리가 안 돌아가는 날엔 문제지 한구석에 네모난 건물 비스무리 한것을 이어 붙이며 그렸었다. 도시와 단절된 작은 동네에서 살아왔고 자라온 나에게 수도란 미지의 공간이자 이세계의 성이었다. 어렸을적 상상한 서울은 언제나 초등학교 시절 그려봤던 미래도시같은 것이었다.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사람들의 발자취가 아스팔트 위를 별처럼 수놓는. 물론 대가리 털 다 자란 지금의 나로선 동의 할수 없는 몽상이다. 미래도시는 개뿔 서울만큼 과장된 도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향에 비하면 사람의 수는 월등히 많았지만 인정머리는 반의 반도 못했다. 색을 잃어가는 도시는 온정을 모르는 듯 굴었다. 감회에 젖어 감상의 시간조차 내주지 않는 도시는 배부름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가끔은 그 허기가 지독하게도 아프게 느껴졌다.
그런 색 빠진 도시에서 색없는 남자를 만난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교양 수업이 끝난 어느날, 집 갈 생각에 신이 나서 빠른 보폭으로 걷던 중 사람 틈 바구니 속에서 가방 줄이 잡혔다. 억 소리와 함께 작은 반동으로 발이 조금 붕 떴다. 괜히 시비걸린 기분이라 소심히 에이씨를 뱉으며 시선을 돌렸는데 입이 쏙 들어갔다.
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새하얀 문짝보다 더 하얀 남자였다. 영문 모르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자 나를 잡아낸 순간부터 얼굴이 마주친 순간까지, 초연함을 잃지않은 남자는 입을 열었다.
오래찾았는데
네?
안 보여서 오래 찾았다구요
저를요?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성인남성 바라보는 다섯살의 심정으로 시선을 흘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자의 행색을 살폈다. 남자는 평균보다 말라보이는 체형이었지만 어깨나 골격은 다부졌다. 흘깃 봐도 사람 싫어할것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검은 셔츠에 검은 청바지,검은 가방. 온통 검은 것들 사이에서 남자의 피부만 유일하게 새하얬다. 온통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져있는 외양은 예민해보이는 인상을 더욱 극대화 시켰다. 누구지. 기억에 없는 상판이었다. 과 사람은... 아닌것 같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방끈 잡힐 건수를 넘겨집으며 예상해보았다. 한참을 끙끙앓으며 서있다가 순간 머릿속에서 깨달음의 전구가 번뜩였다. 아 교양수업!
"이번 팀플과제 조원분? 맞죠? 이름이..."
민..윤기였나. 기억 속 박지민 위에 붙어있던 세글자를 떠올리며 끝말은 부러 소리를 죽였다. 틀리면 나도 민망하고 듣는 사람도 민망하고 모두가 민망한 구도였다. 뱉은 이름의 주인이 맞나 하는 마음으로 조급하게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민윤기가 아닌가? 노파심에 다시 머리를 굴리려던 참에 불쑥 저음이 날아들었다.
맞아요
네?
맞다구요, 민윤기.
아 그렇구나... 대답 참... 존나 늦게 하시네요. 역시 속으로만 반문했다. 말랑한 이름에 어울리는 민둥한 인상을 상상했는데 반대의 사람이었다. 밍숭해보이기는 했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구석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민윤기, 윤기. 어딘가 서정적으로 보이는 이름. 열에 여덟은 여자애 이름인 제 이름과 비교했을때 확실히 성부터도 그렇고 흔치않은 이름이었다.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석잔데 왜 들은 기억이 없지? 남자의 이름의 익숙함에 대해서 곰곰히 기억을 가다듬어보려 했지만 얼마 못 가 포기했다. 하긴, 최교수는 늘 조교를 시켜 출석 확인을 시키곤 했으니까. 열린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들었던 적이 없으니 생소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수순처럼 들었다. 와중에 자신이 민윤기가 맞음을 각인 시키는 것으로 자기소개를 대체한 남자는 별말없이 고목처럼 서있기만 했다. 말수가 이렇게 적을 일인가. 낯을 가리는것 같진 않았지만 태생부터 말이 없는 타입처럼 느껴졌다. 멀뚱히 서있는 남자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 폰을 들어 대충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네시, 갈 만한 곳은 카페 뿐이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카페 괜찮으시죠? 긴 텀의 질답을 견딜수가 없어서 있는 외향성 다 끌어모아 한꺼번에 묻자 따발총같은 질문에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질문에 내놓은 긍정이려나, 멋대로 생각하기로 하고 익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폭을 맞추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어딘가 유약한 면이 있는 서늘한 남자를 한번 쳐다보았다.
꽤나 험난한 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저기...저희 발표말인데요.”
“네.”
“저는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긴한데 혹시 특별히 하고싶은 것 있으시면...."
"저도 상관없어요."
"어 정말요?"
"네."
"아 그렇군요..." “
그렇죠."
"네에..."
이게 무슨 대화야.
어색하다.
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
말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사람이였다. 민윤기는 제 앞에 놓인 얼음이 잘그락이는 아메리카노만 들이킬줄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잔뜩 쫄은 산다람쥐가 호랑이 살펴보는 심정으로 남자의 형색을 살폈다. 마주치는 시선 속 민윤기는 꼿꼿히 세운 고개로 여전히 맞은 편에 있는 내 상판을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이 마주칠때마다 반사적으로 깜짝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처박는 과정을 반복했다. 아니 우리 초면 아니야? 저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볼 일이냐고. 불만은 아까부터 가득했지만 초면에 상대방의 그릇된 태도를 지적할 깜냥은 안됐기에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며 시선을 요리조리 피해다녔다. 무서운 사람이 몸 사려야지 어쩌겠어.
그가 간간히 유리잔을 들어올리고, 들이키고 내려놓는 것을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나 또한 별말없이 의미없는 손짓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것밖엔 할수 없었다. 이 상황의 타계지점을 찾지 못한 나로서도 명확한 방도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뚝딱이는 손길로 자판을 두드리며 서두를 꺼냈다.
저희 대주제는 이미 통합되어있고, 빨리 정해서 교수님께 말씀드려야 좋은 주제로 할 수있을것 같은... 데....
빨리 정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종교 미술 교양수업의 최교수는 이시대의 보기드문 비꼰대의 오십대였지만 유독 시간에 깐깐한 사람이었다. 오후에 오는 문자에만 예민해지는 지랄맞은 성정이 타고나서 오후 여섯시 넘어서 문자 넣으면 또 은근히 눈치줄게 안봐도 비디오였다. 서로 서로 피해받지 말자고 말하는 제안이고 내가 죄인도 아니건만, 차가운 상판과 마주칠때마다 반자동적으로 수그러드는 눈치를 바로잡을 재간은 없었다. 눈을 도르륵 굴리며 말끝을 흘렸고 여전히 무감하기만 한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었던 것 같다.
몇초동안의 정적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침묵에 동화되는 듯 굴던 민윤기는 별말없이 상체를 숙여보였다. 익숙하게 노트북을 제쪽으로 돌려보이곤 웹사이트를 들락날락이며 무언가를 찾는듯 보이던 그는 곧 화면을 제 쪽으로 돌렸다.
디스플레이 안은 언듯봐도 자애로워 보이는 수염난 남성의 얼굴로 가득했다.
지금 갑자기 예수사진 들이대는, 상당히 예수천국 불신지옥같은 행보에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들어보였다. 민윤기는 나를 한번, 화면 한번 힐긋 보곤 입을 열었다.
주제는 이걸로 잡고 가는 건 어때요, 세기별로 구분도 뚜렷한 편이고 관련 사건도 많고, 대표 화가들도 많아서 준비하기 쉬울 것 같은데.
상단히 긴 분량의 말을 마치곤 진한 갈색의 액체로 목을 축이는 민윤기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봤다. 꽤나 괜찮아보이는 제안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나 혼자 총대매고 안해도 되겠구나, 같은 작은 안도감을 숨길 수 없었다. 한시름 덜어낸 목소리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좋네...그럼 이걸로 갈까요? 마우스를 두드리며 아래에 주석처럼 달려있는 단편적 역사와 의의를 눈으로 훑어내다 남자에게로 무의식처럼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쳤다.
...떨어진다.
보태어 말하자면 먼저 피한거긴 하지만. 그래도 순간 온몸을 덮는 기시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뭐야... 잘못봤나.
살짝 파란눈으로 보였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봐도 말도 안되는 목격이라 오른손으로 거세게 눈을 비볐다. 요즘 술을 하도 퍼먹었더니 알코올이 이젠 눈 건강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나보다 따위 가정으로 맘을 달랬다. 식은땀을 삐죽 흘리며 부러 전자파가 철철 흘러넘치는 화면에 시선을 콕 박아둔채로 별 의미없는 말들을 뱉어냈다. 주제는 이거로 가는걸로 하고...자료는 누가 찾아올까요? 역시 둘이 계속 만나는 건 무리니까요, 고학년이신것 같은데 뭐 이것저것 준비로 바쁘실것같고... 역시 따로 준비해오는게.... 처절함까지 담겨있는 물음을 반복했다.
아니 팀플 처음해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남자와 단둘이?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지금도 숨 막혀 뒈질 것같았다. 외향인 저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인간 군상이었다. 아무도 안 물어본 지론을 늘여본다.
그러나 나름대로 대책을 찾아보려했던 간절함을 보기좋게 뻥 차버린 것은 다름아닌 민윤기였다.
“계속 만나야돼요 우리.”
“느에?”
뭔 개소리야. 청천벽력같은 말에 한 음절이면 될 말을 질질 늘여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오지게 당황했다는 산증이었으나 이 사실을 남자가 알린 만무했다. 고개를 까딱이며 노트북을 힌번 흘겨본 민윤기는 이어 붙였다.
“교수님이 이번 팀플 최소 네번은 만나고 보고서도 제출하라고 하셨었는데.”
“...네?”
“반응을 보니 몰랐나봐요?”
씨발, 어떡하지. 진짜 몰랐는데. 목끝까지 차오른 거센소리를 꾸욱 눌러담고 초연함을 내세워보였다. 아아, 그렇구나아. 하하하. 괜찮은듯 말했지만 전혀 괜찮지않았다. 현실이 만연한 반론에 말문이 턱 막혔다.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유리잔을 얌전히 들었다 내려놓았다. 여전히 무감한 남자의 얼굴을 한 번 힐긋, 쳐다보는 것도 잊지않고서. 꿀꺽, 넘어가는 액체가 사약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네번?
이 죽을것같은 어색함을 네번이나 더 견뎌야한다고?
익숙한 환멸감이 재발했다. 아 이 망할 대학시스템... 아니 애시당초 팀플을 왜 하는거야? 사회성 기르라고? 내 사회성은 이미 고딩 때 완성됐다고. 아니 미친 사회성 못 길렀다고 대학생이 갑자기 지나가는 아무 사람 붙잡고 칼빵 놓으면서 죽이기라도 해? 할말을 찾지 못해 의미없는 손짓으로 빨대를 만지작이며 뱉어보일 차선을 엄선했다. 아찔해지는 시야를 간신히 붙잡곤 복잡한 동공을 굴리자 먼저 입을 열어보인것은 다름아닌 민윤기였다.
제출까지 딱 한달 남았으니까 일주일에 두번씩 만나는 걸로 하죠. 여기서 이시간에 만나는 거에요. 자료는 각자 찾아오고 만나서 피드백 해주는걸로. 어때요?
새삼스레 남자의 목소리에 홀려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느낀건데 듣기좋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단답형의 대답만 듣다가 이렇게 길다란 문장으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뭔 스푼라디오 유저인줄 알았다.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어있던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과 함께 고개를 세차게 위 아래로 흔들었다. 네, 님 말대로 합시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네에 그냥 선배라고 불러요. 네?
윤기씨는 좀 오바같은데
나이는 내가 더 많지 않나?
남자의, 아니 민윤기의 태연한 첨언 뒤 잘그락이는 마찰음이 덧입혀졌다. 초연한 태도에 인상을 구길 수 밖에 없었다. 남자의 마지막 말에 모호했던 첫인상을 단번에 정의 내릴수 있었다.
젊은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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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재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추진되었고 덕분에 두번째 만남은 급하게 성사되었다.
놀랍게도 만남을 주선한것은 민윤기였다.
자료조사엔 꽤나 진전이 있었지만 쉽게 약속을 잡아 낼 수 없었다. 사람 친화력으로 판단하는 건 아니지만 동물적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원래 이렇게 편협한 사상에 빠진 그런 몰지각한 사람은 아닌데, 남자와의 잦은 만남을 사전에 저지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외침을 외면할수는 없을 노릇이였다. 흥정의 날 전리품으로 받아냈던 전화번호가 양심을 찔렀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라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게 실수였다. 전공수업 끝나고 담배 태우러 갔던 흡연실에서 민윤기를 만난버렸다. 아뿔싸, 를 외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얼터진 얼굴을 지어보이던 민윤기는 제 신발 밑창에 다 태워낸 꽁초를 짓이기곤 입을 열었다.
많이 바쁜가봐요?
그 말에 양심 제대로 찔려서 침묵을 고수했다. 당연하다. 님 불편해서 약속 못 잡았단 얘길 꺼낼 정도로 낯짝이 두껍진 못했다. 조사는 꽤 했어요?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낸 민윤기는 그날도 온통 검은 옷이었다. 검은 셔츠에 블랙진, 원색천지인 내 차림새와는 상당히 괴리가 느껴지는 차림새. 선보일 말을 찾지못해 정적을 열심히 음미했다. 아예 안한건 아니었다. 난 버스 탈 생각은 없다고! 작년 팀플에 크게 데였어서 팀플 빌런이 되진 말자고 신년에 술퍼먹으면서 다짐했을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과거의 약속을 상기시켜보자고 나 자신을 질책하기엔 상대가 너무 불편했다. 아니 교수가 우리가 네번 만나는걸 어떻게 확인하겠어. 그냥 대충 보고서만 작성해서 내면 되지 않아? 불손한 생각이 양심을 뭉근히 눌렀다. 못했다고 하면 약속을 다음으로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노트북 안 들고 왔다고 해버려? 얕은 꼼수는 얼마 못 가 들통났다. 오른쪽 어깨에 야무지게 끼고있던 캔버스 가방 안 네모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있는 노트북을 들킨것이 화근이었다.
왼쪽 손목 위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듯 보인 그는 입을 열었다. 카페 괜찮죠?
카페는 괜찮은데 님이 안 괜찮아요. 소심한 반감을 삭였다. 눈을 굴리다 우물쭈물 대답했다.
저희 다음에 만나면 안될까요? 왜요? 그게... 경조사 있는 거 아니면 그냥 가죠, 저도 막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아니라서.
신경질이 섞인 얼굴이 양심을 거하게 치고 지나갔다. 나 지금 완전 팀플 진상처럼 보이는거 아니야? 당체 되는 일이 없다. 정말 간절히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
대화는 예상외로 건조했다. 오해가 무고할 정도로 과제에 충실한 대화였다. 졸지에 카페에 잡혀온 사실만 보면 도살장 끌려온 소마냥 죽을 상을 해도 모자람이 없었으나 지은 죄가 있어 얌전히 입 다물고 할 일 했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못치는 성정이 기인된 결과였다. 남자는, 민윤기는 여전히 속 모를 사람처럼 제 할 말을 했다. 몇 시간동안 나누었던 대화에서 예상하건데 지식이 많은 사람같았다. 지성과는 다른, 그러니까 무엇인가에 통달한 사람처럼. 내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면 조용히 오류점을 바로잡았다. 태만 놓고 보면 대학생보단 교수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지성또한 교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내가 좀 모자라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세시간동안 나누었던 의견들은 커다란 성과가 되었다. 피피티의 삼분의 일은 완성에 임박할 정도의 퀄리티로 나왔다.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 반, 딱 저녁 때였다. 그럼 이쯤 할까요 라는 말과 함께 만남을 종료하려던 그때, 민윤기는 제 짐을 정리하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밥 아직이죠?
네?
대답이에요?
네, 그런 편이죠..?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식전이면 밥 같이 먹을래요? 예? 왜요? 제가 혼밥을 잘 못해서요. 친구 없으세요...? 당황이 더해져 못할 말이 절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꺼냈다간 다른 형태의 시련이 되어 들이 닥칠지 모를 일이라 역시나 속으로 삭혔다. 그리고...혼밥은 나도 못했다. 식사할 때 기본적으로 제 3 자가 있어야지만 안심하고 식음행위를 충실히 이행할수있는 불완전한 몸둥아리로 자란 것이 이유였다. 뜻밖의 공통점에 잠시 고민했다. 그래 밥 한번 먹는다고... 말려 죽진 않겠지. 상당히 극단적인 수용을 뱉어냈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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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쌍한 어깨로 출입문을 밀친뒤 창가 자리에 앉은 민윤기를 따라 앉았다. 얼결에 성사된 저녁식사였다. 못 먹는 거 있어요? 생각보다 일상적인 물음에 잠시 얼이 빠졌다가 돌아왔다. 뚝딱대는 자아를 숨길 수 없었다. 으음... 저... 메뉴판 속 사진들을 훑었다. 파스타가 주력인 듯 보이는 가게였는데 메뉴엔 온통 해물의 연속이었다. 간간히 새우나 조개따위가 꼭 끼어들어있었다. 으음... 난처함을 담아 좀 앓았다. 파스타집 와서 다른 거 시키긴 좀 그렇잖아. 한참 메뉴판을 보고 끙끙거리자 불쑥 시야 안으로 하얀 손이 끼어들었다. 두껍게 종이를 잡아낸 민윤기는 뒷장으로 훅 시선을 몰았다. 첫줄에 쓰여있는 돈까스를 한번, 어딘가 묘연한 구석이 있는것 같은 남자의 낯을 한번 바라보았다.
"계속 한페이지만 보길래."
첨언된 말이 영 찜찜했다. 배려가 가득한 행동인데도 묘한 기시감을 지울수 없었다. 저는... 돈까스요. 내 메뉴선정의 대답과 함께 민윤기는
직원을 불렀다. 돈까스 하나랑 오일파스타 하나요. 유리잔 차가운 물을 목으로 꿀떡꿀떡 넘기며 그를 관찰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뭘요?"
"저 파스타 안 먹는거."
"파스타 싫어해요?"
"아니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럼 그냥 우연이겠죠."
그런가... 미처 해결되지 못한 의문을 곱씹고 있자 민윤기는 덧붙였다. 원래 이런거에 감이 좋아서 잘 맞춰요. 숟가락 볼록한 잔상에 콕 박고있던 시선을 올려보였다.
감이요? 네 뭐 촉같은거. 혹시 귀신 믿어요?
갑자시 귀신이요? 토속신앙 같은 것들이랑 관련이 깊잖아요
뭐... 그렇긴 하죠
의아해하며 반문했는데 의외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귀신이나 민간신앙 관련된 것들은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 뿐이라 곰곰히 긍정의 여부를 고민했다. 귀신...원랜 믿었는데 후천적으로 안 믿게 된 편이에요. 꽤 진지하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저 쪽도 농담은 아니었는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간히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대화 사이 빈 공간들을 이어붙였다. 민윤기는 이어 말했다.
뭐 그런거 있잖아요, 이 사람은 이걸 싫어할 것 같고 이 사람은 어느날 다칠 것 같고 이 사람은 또 미래에 이런 일이 벌어질것 같고... 미신이면 미신인데 그런거엔 촉이 좋아서. 덕분에 살면서 오해 많이 사고 살았어요. 무속인 아니냐 부터 신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 농담들. 갑자기 진지해졌네, 아무튼 그렇다구요.
대화를 비집고 그릇 두개가 놓였다. 맛있게 드시라는 말과 함께 테이블을 차지한 음식에 잠시 대화는 갈피를 잃었다. 민윤기의 말들을 더듬으며 상기시켰다. 기시감이라고 생각했던 벽이 조금은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외의 이야기에 실낱같이 남아있던 경계심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와 같은 공감 같은 것. 남의 이야기였지만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였을까.
서걱서걱 잘도 썰리는 튀김옷과 육고기를, 오일파스타를 뒤적이는 민윤기의 손을 한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랑 비슷하시네요. 뭐가요? 감 좋다는 얘기나, 뭐 무당해라 같은 소리 듣는거요
그래요? ...전부터 생각했는데 참 수긍을 잘하세요 그래야 세상살기 편해요
요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이분법적이잖아요, 자기랑 틀리면 사이비 취급하고. 수용이 빠르면 피곤해지는 일은 없으니까.
듣다보니 맞는 말이었다. 유리잔 안 투명한 액체를 들이키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요? 뭐가요? 왜 들었냐구요, 그런 얘기. 태연한 목소리에 질문인가, 보단 확인하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깊게 생각할만한 요소가 아니어서 금방 잊었다. 왜 그랬더라,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으음, 뱉어낼 말을 엄선하다 두번째 만남에 가정사를 늘여놓을 속없는 성격은 못됐기에 적절히 쳐내어 말했다. 가족중에 좀 종교랑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뭐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귀신같은 것도 가끔 보고. 거짓말 아니라 진짜에요. 막 위험한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더라구요. 덕분에 중학교 고등학교 땐 괴담같은걸 하도 잘 풀어서 별명이 가르송이었어요. 가르송? 괴담 레스토랑 본 적 없으세요? 거기 나오는 지배인 이름이 가르송이잖아요. 아 그래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괜시리 웃겨 헛웃음이 픽픽 나왔다.
어쨌든... 그래서 미신같은 거에도 빠삭하고 촉도 좋아요
안 그래보이는데 그런게 인상에서 들어났음 진작 무당했죠 도움된 적 있어요?
뭐가요?
촉 좋은거
도움이라. 딱히 살면서 고려해보지 않은 논제였다. 식음활동까지 멈추고 고민을 거듭했다. 민윤기는 조용히 포크로 오일파스타를 휘감아 올리곤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찰나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고맙단 기색을 내비추자 식음행위에 열중하며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절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모자란 놈으로 보시는 가해서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저 진짜 선배님이랑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감 좋아요. 얼마나 좋길래. 근데 뭐 자랑할만한 요소는 아니네요. 그런가.
"얻은것도 있긴한데 잃은게 압도적으로 많아서 딱히 도움됐단 말이 성립이 안될지두요."
새내기 시절에 대화 몇마디 나눠본 동기들 중 열에 아홉은 부산사람이냐고 질문했다. 괜히 없던 지역감정이 끓어올라 경상도 사투리 쓰면 다 부산 사람인줄 아냐고 반문하려다 생각해보니 진짜 부산 사람이라서 가타부타 말 얹지는 못했었다.
부산은 오해받기 딱 좋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맨날 회먹느냔 소리부터 집앞에 바다가 있느냔 소리, 관광객이 그렇게 많냐라는 소리까지. 도시인간들은 부산은 다들 흰여우마을같고 마린시티같고 광안리 해운대같은 줄 안다. 딱 잘라서 맨날 회 안먹고 부산이 다 그렇게 개발된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집 앞에 바다가 있긴 했다. 고향 동네는 관광객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떨어진 꽤 외진 지역인지라가 바닷가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관광객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모는 그 동네에서 가장 큰 점 집을 했다. 관광객은 없어도 고모에게 점 보러 온 사람은 꽤 많았다. 고향 집은 나 점집이에요, 라고 광고할만큼 화려하진 않았고, 오히려 일반 가정집에 가까운 모습이었음에도 어떻게 알고 왔는지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몇 있었다. 열살부터 그곳에서 살았다. 또래 애들이 파워레인저 장난감 가지고 놀때 무령 흔들고 놀며 고모 손에 컸다. 고모는 내가 고아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해의 시차는 금방 좁혀졌다. 커가면서 친척들에게 주워들었던 이모저모가 한 역할 톡톡히 했다.
종종 사람들은 살이 베이는 말들을 종종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뜯기듯 아픈 말들. 신병이니 뭐니 아빠가 두 눈 뜨고 반대해서 그런거 아녜요? 그런 말 말어 애가 뭔 죄가 있노.
죄없음은 알지만 작은 소신은 거대한 소문을 이길 수 없었다.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 사실을 몰랐던 그때의 난 지금보다 훨씩 작고 여렸다. 작은 소신으로 커다란 말들을 안질 못했다. 그래서 이따금,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어질때면 내 몸보다 작은 상자에 나를 주워담았다. 둥글게 만 몸을 콩벌레마냥 웅크린채 작은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빛을 응시하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 사이에 끼워진 익숙한 고음이 의식을 두드리고 했다.
니 여서 뭐하나, 밥 무러 가자.
그럴 때마다 고모는 귀신같이 날 찾아냈다. 어떻게 알았느냔 물음에도 고모는 그저 신령님이 알려줬다, 하곤 작은 입매를 빙글게 올렸을 뿐이었다. 그때의 고모는 신병 피하려다 가족잡아 먹은 년이라는 소리를 밥 먹듯 듣던 서른이었다.
새삼 우울하게 떠오른 가정사는 조용히 삼켜냈다. 친밀도와 콤플렉스는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친한 사람한테도 못 까는게 가정산데. 의중모를 얼굴이 습관인 남자앞에서 허하실실 웃으며 이야기 할만한 소재는 못되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그릇을 비워갈수록 남자와의 공통분모를 찾아갔다. 민윤기도 고향이 바다 근처라고 했다. 동해라서 인근 육지마을만 가도 바다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편인데 바닷가는 더 심하다고. 의외의 공통점이었다. 민윤기가 뱉어내던 고향에 대한 불만은, 바다 내음에 깊은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바닷마을 주민으로서 격한 공감을 할 수 밖에 없는 말들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동의하자 민윤기는 피식 웃었었다. 그 웃음이, 그 작은 웃음이 뭐라고 기분이 이상해져서.
공감은 생각보다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보일 지경이었다. 덕분에 물어보지도 않은 티엠아이를 남발했다. 근데 도시는 공기가 네모난 기분이에요. 공기가 네모날수가 있나. 숨 턱 막히는 그런 들 때 있지 않아요? 아아, 무슨 말 하는지 알 것 같다. 식사는 애진작 끝났는데도 쉬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했다. 발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침체되어있진 않은 밍숭한 대화가 한참을 오고갔다. 본래의 목적을 애진작 잊었을때쯤 대화의 오류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존대하시게요? 불편해요? 솔직히...네 그럼 말 놓지 뭐
아 훨씬 편하다 너도 형이라 해 그냥 아 그건 좀 ...제가 불편한데요. 선배 소리 듣는 내 마음은 오죽 편하겠냐?
뚱한 표정으로 물을 들이키던 얼굴에 왠지모를 안도감이 들어 키히힉 웃고 말았었다. 왜 그랬더라,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직접 선을 무너 뜨려서? 직접 제 발로 내 구역에 침범해서? 무슨 이유에서든 처음 들었던 감을 무시한 것이 과오였음을 아직 몰랐던 나는 그날의 분위기와, 민윤기에게 진하게 풍겨왔던 조금의 인간미에 안도감이 들어 그렇게 스스로 발을 디뎠다. 그곳이 어떤 곳인줄도 모르고.
얼결에 호형호제의 법칙이 적용되어버린 민윤기와 나의 관계가 최대 성과가 되어버린 만남을 마치며 발을 돌렸다. 지하철 역 지하도로 내려가는 길목마다 발자욱이 가득했다. 언듯 지하도에 드리운 그늘이 왠지 모르게 길게도 느껴져 뒤를 돌았다. 오른손을 들어보이고는 낮게 흔들어보이는 민윤기는 여전히 밍숭한 태에 날렵함을 끼운 채로 그 공간에 정체되어있었다.
유난히 해가 긴 날이어서 그림자가 길게 느껴졌었던 건지, 아님 단순히 안도감에서 비롯된 나의 착각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