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말린 센세이션 (하) miss violet.
권 조교의 지루하기 그지 없는 근육 설명이 이어졌다. 팔에서 뻗어나오는 상완신경총 (*Brachial plexus)는 경추 신경들부터 신경 분지들이 정신없이 얽혀 있는 구조였고, 신경 얼기들을 박리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림과 카데바의 혈관 주행을 여러번 확인하던 윤기는 옆에 앉아 있는 지민에게 눈이 멎었다. 눈을 퉁퉁 부어서 자꾸만 꼬박꼬박 졸고 있는게 꼭 병든 병아리 같았다. 톡 떨어지는 뺨 아래에 손을 갖다대니 화들짝 놀라면서 깼다.
갑자기 챱챱거리면서 자신의 뺨을 때리더니 윤기가 보고 있는 해부 도록을 같이 들여다본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신경과 혈관들인데, 오늘 내로 끝내야 집에 보내준다고 권 조교가 으름장을 놓았다. 위팔 근육부터 시작해서, 손바닥 근육들까지 층층히 박리해서 검사를 받으려면 밤 12시는 넘어야 해부 실습이 끝날 모양이었다.
“야, 오늘은 텄다.”
“밤새도록 그냥 천천히 하자-”
같은 해부학 조 동기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지민은 혼자 고개를 박고 다시 박리를 시작했다. 팔쪽은 근육들도 얇고 잘 분리가 되지 않아서 찢어지기 쉬웠다. 말도 하지 않고 실습에 열중하는 지민은 아무리 늦어도 9시까지는 편의점에 출근해야 한다는 것을 윤기도 알고 있었다.
“반대쪽도 얼른 끝내야해, 나 빨리 가야 한단 말야.”
한참을 노닥거리면서 혈관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동기에게 지민이 쏘아붙였다.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자신들이 할 부분을 한참 남겨둔 채로 담배나 피우러 나가자, 하는 녀석들을 윤기도 잠깐 흘겨보았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같이 담배를 피우는 척 윤기는 자연스럽게 다른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지민의 뒷담화를 하고 있었다.
“박지민 범생이 진짜....”
“들었냐? 쟤는 정말 공부만 한 티 나지 않냐?”
하이톤의 지민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낄낄거리던 동기들이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윤기의 시선을 보자마자 크흠, 헛기침을 했다. 알게모르게 지민과 윤기가 친하게 보여서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녀석들. 쟤는 저렇게 피터져라 공부하고 편의점에서 물품 채워넣고 폐기 찍으면서 알바하고 있다. 윤기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병아리같이 생겨서는 자존심은 세고 절대로 굽혀지지 않을 것 같은 박지민을 왜 그렇게 시기질투하는지.
“얘들아.”
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윤기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마저 피우면서 묘하게 여유있는 태도였다.
“오늘 중국집이나 먹자. 저녁 내가 살테니까 너네들 실습 빨리 끝내라.”
멍해진 시선들이 윤기에게 꽂혔다.
“내가 오늘은 좀 일찍 자고싶어서 그런다. 형은 간짜장.”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서 한명에게 쥐어주고 어깨를 툭툭 쳤다. 머쓱하게 웃던 아이들이 저마다 왁자지껄하게 탕수육, 짬뽕등등을 외쳤다. 투덜거리던 것은 뒤로 하고 갑자기 형 존나 멋있어요!를 외치면서 웃음지었다. 빨리 실습 끝내고 박지민 편의점이나 데려다 줘야지. 윤기는 실습이 한참 남았음에도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실습실로 돌아갔다.
실습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윤기가 차로 지민을 편의점에 데려가주는게 자연스러워졌다. 실습 종료 시간이 늦기도 했고, 집이 같은 가는 방향이라는 좋은 핑계도 있었다. 선배님, 선배님에서 호칭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지민도 조잘조잘 말이 많아졌다. 아예 공부를 하겠다고 집에 말을 하고 윤기도 편의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일이 많아졌다. 때때로 들르는 술 취한 진상들이 있어서 맘이 영 편하지가 않았다.
“제가 여기까지 답 달아놨으니까, 이 족보 그대로 외우시면 되구요.”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이틀밖에 남지 않은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와중에, 종이 울리면서 손님이 들어와서 지민이 벌떡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비어있던 음료 칸을 약간 채우고 나서 다시 윤기의 앞에 앉았다. 귀찮은 얼굴로 과자를 뜯어서 먹으면서도 윤기도 나름 성실하게 외우고 있었다.
“좀 쉬어. 너 몸 다 버려.”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하지, 매일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하루에 잠 자는 시간이 3시간 남짓인것 같은데, 지치지도 않고 늘 열심이었다. 사실 같은 조의 지민을 비웃는 동기들 중에서 그만큼 열심히도, 잘 하는 애들도 없어 보였다. 윤기에게 설명을 해 줄때도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로 그림을 하나 하나 그려가면서 해주는데, 가까이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자꾸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잠깐 눈 좀 붙여. 내가 깨워줄게.”
“말 그만 시키세요. 선배님, 족보 다 봤어요?”
날 뭘로보고! 윤기는 조용히 웃었다.
악명높은 땡시라고 불리우는 해부학 실습 시험은 동일하게 실습실에서 이루어졌다. 요 몇주동안 하루에 네다섯 시간씩 동고동락해서 근육 하나하나, 혈관과 신경 하나하나를 박리해낸 카데바를 앞에 놓고, 태깅되어있는 근육과 신경을 30초 내에 적어내는 방식이었다. 땡! 하는 경쾌한 종소리가 들리면 다음 태깅으로 넘어가는 만큼 순간적인 판단력과 정확한 해부학 용어를 알아야 했다. 한 눈에 보고 실습 구조물을 알아보고 답을 적지 못하면 그대로 문제를 날리기 때문에 학생들은 전부다 긴장하고 있었다.
시험도 이름 순으로 보는 탓에, 바로 앞에 서 있는 지민을 윤기는 잠깐 훔쳐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창백한 얼굴로 마지막으로 정리한 종이를 들고 달달 외우고 있었다. 잘 봐, 입모양으로 하는 윤기의 말에 지민은 배시시 웃었다.
원래도 마른 애지만 시험날이라 그런가, 오늘이 더 힘들어 보였다. 정신없이 카데바들을 지나가는 와중에도 경쾌한 땡! 땡! 하는 소리가 실습실을 울렸다. 아, 이거 지민이가 설명해 준 거네. 다행스럽게도 시험 문제는 이전에 비해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실습실을 거의 한바퀴 다 돌아 시험은 막바지로 접어들었지만 바로 앞을 걸어가는 지민의 뒷모습에서 윤기는 눈을 뗼 수 없었다. 두 문제를 남겨놓고, 마지막 카데바를 향해 걸어가던 지민이 갑자기 스르륵, 휘청거리면서 기운없이 쓰러졌다.
“지민아!!!!!!!!!!!!!”
다른걸 생각할 틈도 없이 답안지를 던지면서 윤기가 팔을 넣어서 안아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윤기는 안아든 팔의 지민이,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게 무서워서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한 윤기는 세 문제 남은 답안지를 그냥 권 조교에게 제출하고 무작정 애를 업었다. 키도 얼마 차이나지 않았는데 등뒤에서도 성인 남성이라기엔 지나치게 달랑달랑 가벼운 다리였다.
십여분을 정신없이 뛰어 도착한 SJ대학병원 응급실은 사람이 복작복작했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땀에 흠뻑 젖은채로 윤기는 지민을 간이 침대에 눕혔다. 애가 시험보다가 갑자기 스르륵 쓰러졌다고 말한 이후에 정신없이 피검사, 엑스레이를 찍고 나니 뭔가가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가만히 수액이 똑똑 떨어지는 지민의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는 좋아하는 담배도 몇 시간이나 못 피우고, 해부학 시험때문에 긴장했던 것들이 갑자기 탁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지민이 부스스, 눈을 떴다.
“정신 좀 들어?”
네....
기운없이 앉으려는 지민의 어깨를 잡고 윤기가 다시 눕혔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 주었다.
“저 시험답안... 제출했어요?” “내가 했어. 조교님한테 말 하고.”
“............................”
“너 빈혈이래......”
응급실이라 정밀 검사는 아니었지만,, 담당 의사는 지민이 빈혈이 있다고 했다. 윤기도 퍽 하얀 편이었지만 요 며칠간의 지민은 창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였나보다 생각했다. 맨날 편의점에서 폐기 음식을 먹고, 그마저도 배부르면 공부가 안 된다고 종종 건너뛰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였나보다. 나중에 내시경도 해야 하고 외래로 진료보러 와서 정밀검사를 꼭 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요즘같은 시대에 빈혈이라니, 윤기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 가자, 너 수혈까지 받았어.”
윤기는 차가운 지민의 손을 끌어다가 꽉 잡았다. 원무과에서 이럴때 아니면 언제 큰할아버지 덕 좀 보나 싶어서 재단 이사장 이름까지 팔았다. 수납하는 담당 직원은 윤기의 주민등록증과 블랙카드를 보고는 구십도로 인사를 하면서 배웅까지 했다. 응급실을 나왔을때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시작했던 올해 해부학 실습시험은 죽어도 못 잊겠다, 생각하면서 윤기는 지민의 어깨에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끌어당겨서 주차장 근처로 걸어갔다.
“저 이제 가면 돼요, 선배님....”
“어디갈건데?”
지민의 통통한 입술이 꾹 다물어진다. 귀엽긴 한데 얘는 꼭 이럴때도 고집이다.
“.시험 봤으니까, 출근해야죠..”
“내가 못 간다고 대타 구하시라고 점장님한테 전화했어.”
윤기는 짜증이 났다. 비실거리다가 쓰러졌으면서 정신이 나갔나. 맘 같아서는 고시원비도 싹 일시불로 지불해주고 아버지에게 따로 말해서 전액 장학금이라도, 마구 돈지랄하고 싶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애가 어딨어? 열심 점수로 만 점 장학금 줘야한다. 가만히 응급실의 시끌시끌한 침대 옆에 걸터앉아서, 잠든건지 정신을 잃은건지 구별도 잘 되지 않는 박지민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혼자 결심했다.
숨소리 고롱거리면서 정신없이 자는 얼굴이 조금 귀여워서였다. 오늘 너 소고기 5인분 먹일거야. 완전 질리도록, 밥까지 먹일거야.... 가로등 불빛이 내려와 후드모자를 쓰고 있는 지금 지민의 표정을 도통 볼 수
없게 했다. 이미 윤기가 끌어다가 잡았던 작은 손은 지민이 놓은지 오래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윤기는 한 걸음 다가섰다.
“너무 감사한데.. 신경 이제 안 쓰셔도 돼요.”
“.............”
“저도 선배님께 안 거슬리게 할테니까...”
윤기는 손을 뻗으려다 멈추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셔츠는 꼭 새로 사 드릴게요.”
“너 그게 다야? 장난해?”
가깝게 다가선 윤기는 지민의 후드를 벗겨 냈다. 눈물이 그렁한 얼굴이 드러났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지민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지민아.”
“...................”
“......연애할래?”
“아뇨....”
민윤기 의문의 1패. 쓴웃음이 나왔다.
날 보던 그 마음이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선배님, 저는 ...여유가 없어요.”
꼼지락거리는 지민의 입술과,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딩- 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치만 선배님을 좋아한단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리면 감당할 수 없어서....”
말을 끝으로 지민은 눈을 꽉 감았다. 속눈썹에 촘촘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윤기는 몇년만에, 가슴이 저리도록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그 마음이 다른 것은 아니었어. 편의점에서 공부를 하면서 물품을 채우는 지민을 볼 떄도, 응급실에서 누워 있는 지민을 볼 때도, 실습실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던 순간도, 똑부러지게 근육을 갈라내는 첫 실습에서도.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윤기는 한걸음 훌쩍 다가서서 입술을 그대로 겹쳤다. 약간 짭짤한 눈물 맛이 나는 상태로 부드러운 입술과 말랑한 혀가 겹쳐지는 키스였다. 지민은 훌쩍거리면서 팔을 끌어안아 윤기의 등을 끌어안았다. 비로소 첫 키스였다. 아마, 올해의 해부학 수업은 절대 잊을수 없겠지. 윤기는 속으로 다짐했다. 네게 여유가 없다면 기다리면 되고, 그리고 나는 한참을 너와 함께 할거야.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포르말린 센세이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