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신청서”
유아교육과 201739881 박지민. 위 학생은 위와 같은 사유로 본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보호자의 동의하에 자퇴하고자 하오니 재가하여 주시기 바랍.....
하... 아무래도 좆됐다. 그게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말이다. 나는 이제 진짜로 좆된게 분명하다. 지민이 강의실에서 나오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손에 쥐어진 자퇴 신청서를 있는 힘껏 구겼다. 현타가 세게 온 모양이라지. 누가 보면 여기 바닥 무너지는 줄. 지금까지 본 시험들 모두 말아먹어서 오늘 전공시험이라도 잘 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완전히 망했다. 대체 전공 시험시간에 처자는 새끼가 어딨담. 밤새우고 시험도 망치고 아주 최악중의 최악이다. 오늘 기분 완전 다 잡쳤다.
그냥 이럴 바엔 자퇴나 할까. 어중간하게 중간이나 달리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건 있었나? 평소에 자퇴신청서 들고 다닌 보람은 있네. 아니 근데 그러기엔 4년 동안 학교 다닌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나도 참 답이 없거든. 근데 그 와중에 야속하게도 배는 밥 달라며 꼬르륵 거리고 난리다. 에휴... 그래 뭐 답도 없을 땐 배부터 채우고 봐야지 어쩌겠어.
꼬우면 자퇴하던가 하는 심정으로 학생식당 키오스크를 한참을 두드렸다. 기왕 망한 거 오늘은 제대로 된 식사를 먹어야겠거든. 미소된장국 같은 평범한 음식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음...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역시나 돈가스지. 고기를 좀 썰어야겠어. 칼질 한 스무 번은 넘게 해야 내 스트레스가 풀릴 거 같다고.
한참을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던 지민은 자신의 돈가스가 나오자마자 재빨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양손 한가득 돈가스가 든 쟁반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딱 기다려. 오늘 돈가스 넌 나한테 다 죽은 목숨이라고. 내가 여기서 제일 맛있게 먹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돈가스를 들고 자리로 향하던 중에 한 일곱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보였다. 대학생 식당에 어린 아이여서 그런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이가 하는 말도 어렴풋이 들렸는데 딱 그 나이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고 있더라고. 편식쟁이 미운 유치원생들. 앞에서 말리고 있는 사람은 얼굴이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꽤 젊어 보이던데 설마 애 아빠인 건가.
“아냐 압빠 윤지는 당근 안 먹어”
“윤지 당근 안 먹으면 무서운 아찌가 윤지 이놈 하러 오는데?”
“그러면 이놈 아저씨가 와서 윤지 당근 먹어주면 되겠다 그지 압빠?”
“...윤지야 제발...”
“압빠 많이 먹어 그거 먹으면 건강해져”
“윤지 아~ 딱 한 입만 먹자”
“아아아아앙!!! 시러 윤지 당그니 안 먹을거야아!”
이름이 윤지인가. 애 성격 보니 아빠가 꽤나 고생하겠네. 뭐 그래봤자 남의 집 일이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반찬 투정을 부리는 아이 옆을 지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는 아이가 아빠가 주는 당근을 안 먹는다고 피하느라 손을 마구 휘둘렀다. 서둘러 피해서 가려고 했는데 아이의 손은 역시나 내 움직임보다 훨씬 빨랐다. 내가 들고 있던 돈가스가 든 쟁반이 휘청 하더니 바닥에 와장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내 옷에 돈가스 소스가 잔뜩 묻은 건 덤이고. 진짜 말이 옷이지 온 몸에 학식 뒤집어쓴 꼴이다.
오늘 뭐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흰 셔츠 위에 갈색 소스가 온통 튀어 얼룩덜룩해졌다. 그리고 돈가스 옆에 있던 샐러드는 어디로 날아간 건지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탈탈 흔드니 머리 위에서 샐러드에 잇던 당근 조각이 나왔다. 진짜로 그 잠깐의 순간이었는데 식당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아이도 아이 아빠도 그리고 나도.
“압빠 저 아저씨 예쁘다!!”
“....?”
식당의 적막을 깬 소리는 다름 아닌 이 상황과는 하나도 상관 없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예쁜 거랑 내 옷 이렇게 된 거랑 무슨 상관? 아니 근데 지금 나보고 아저씨라고 부른 거야? 1차로 돈가스 쏟은 거로 빡치고 2차로 아저씨 소리로 개 딥빡. 아무리 4학년이라지만 나 아직도 얼굴은 1학년 옆에 붙여놔도 안 꿀리는데... 하... 그래도 애 앞인데 참아야지 어째. 평소엔 쓸모도 없는 유아교육학과 전공 지식이 나올 시간이다. 어르고 달래서 떼쓰는 아이 온순한 아이 만들기. 이거 완전 박지민 전문이잖아. 지민이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애기 이름이 뭐예요? 그리고 애기 몇 살? 오빠는 아저씨 아닌데”
“애기 말고 윤지.”
“응?”
“애기 말구 제 이름 윤진데여. 윤지는 일곱살이에여”
“...그래 윤지... 근데 윤지야 윤지가 오빠 옷 이렇게 만들면 오빠가 좀 속상할 거 같지 않아?”
“그건 그래여 아저씨... 제가 죄송해여”
“아저씨 아니라니까”
“네 아저씨”
“.....”
하... 미운 네살도 아니고 미운 일곱살이야 뭐야. 조그만 애가 또박또박 말대꾸하는데 얘를 뭐 어쩔 수도 없고. 아저씨 아저씨 하는 말이 묘하게 자꾸만 심기를 거스른다. 아무래도 보통 애는 아닌 듯한데... 애 아빠는 어디 있는 거야. 애 아빠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그 와중에도 귀에 아저씨 소리가 박혀 들어온다.
“근데 아저씨 좀 이뻐요”
“으응... 윤지 고마워... 근데 윤지 아빠는 어디 계셔?"
“우리 아빠여? 우리 아빠 이름 민윤기에여”
“어?”
“아저씨 우리 압빠 아라여?”
민윤기...? 누가 봐도 얼굴은 민윤긴데. 민윤기라면 우리 과 교수 아닌가... 민 교수님 딸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리고 그 싹바가지 성격으로 결혼하고 애가 있을 리는 없단 말이야. 그냥 한참을 머릿속으로 물음표만 가득 띄우고 있는데 응 근데 내 앞에서 어쩌지 하는 표정 하고 있는 얼굴 보니 민윤기가 맞다. 와 시발. 진짜 민윤기다. 지금 약간 박물관이 살아있다 보는 느낌이거든.
“교수님?”
“박지민 학생?”
“어... 음 그러니까 민윤기 교수님?”
"아... 그 학생 옷.."
“아... 윤지”
둘이서 어색해서 한참을 뻘쭘하게 통성명하고 쭈뼛쭈뼛 서 있다. 미소된장국하고 당근채 뒤집어쓰고. 이제 와서 보니까 저 꼬맹이 얼굴이고 성격이고 얼굴이고 완전 민교수 판박이네. 어쩐지 저 성격 누구 닮아서 저러나 했지. 기왕 민교수 딸이 사고 친 거 평소에 덕분에 엿먹은거 복수라도 해 봐야 하나. 지금 아니면 분명 기회 없는데.
“교수님 저 윤지 때문에 옷이 이렇게 되어서.."
"윤지 이거 윤지가 그런 거 맞아?"
아니라면 어쩔 셈인 건데? 다짜고짜 윤지에게 사실이냐고 묻는 걸 보니 어쩌려는 생각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근데 밥 한 번 엎었다고 생각보다는 따끔하게 혼내긴 하더라. 물론 애는 아빠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같긴 했는데. 그 쪼꼬만 애 앞에서 교수님은 혼자 실컷 떠들고 있고 애는 단데기 쥐었다 폈다 하며 딴짓 하는 게 뻔히 보여서 피식 하고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윤지 얼른 삼촌한테 사과해"
"삼촌 안냐 아찌야."
"....알았어 그러니까 윤지 얼른 아저씨한테 사과해."
“아찌 졔송합니다아...."
"....."
"아저씬 이쁘니까 윤지가 상으로 당근 줄게여. 아까 아저씨 옷 망쳤으니까 화해하자는 것도 있어요”
“쓰읍 윤지 그만.”
얼씨구야. 이제는 아주 민윤기까지 합세해서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다. 아직 내 나이 창창한데. 아저씨라고 불릴 정도 나이는 아니라고오... 학생한테만 성격 저런 줄 알았는데 제 새끼한테도 어련하시네. 지독한 딸바보
“윤지 앞으로는 이러는 거 아니야 알았지?”
“우웅... 아 마자 아찌 옆에 우리 압바에여 우리 압빠 이름은 민윤기고 여기서 선샌님 일 해요. 저능 윤지구 당근 시러하구 병아리유치원 다녀여. 글구 아저씨 거징말 아니구 징짜로 예뻐여”
꼬맹이가 내 앞에서 줄곧 자기 피알을 해댔다. 으응... 너 몇 살이고 어디 유치원인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그리고 된장국 뒤집어엎은 내 옷은 어떻게 되었냐 하면은... 민윤기가 옷 새로 준다는 핑계로 교수 연구실로 끌고 갔다.
교수 연구실에 오자마자 날 싸고도는 공기가... 진짜 무언의 압박감을 선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또 의자에 앉아야 하는지 아니면 서 있어야 하는지조차 헷갈린다.
"앉아요.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엇, 어어... 넵.."
민윤기도 내가 어색해 하는 모양을 이미 눈치챈 모양이다. 확실히 교수가 좋긴 좋나보다. 교수실 의자 하나는 장난아니게 푹신하다.
"커피 마실래요? 있는 게 레쓰비밖에 없기는 한데."
"넵 저 아무거나 잘 마셔요."
"압빠 윤지도 커피 마실래"
"윤지는 아직 애기라 이거 못 마셔"
"시러 마실래"
"그럼 윤지는 아빠가 뽀로로 음료수 줄 테니까 저기 가서 마시고 있어"
"흥"
또 저기 구석에서 조용히 로보카 폴리 보다가 나타나서 커피 달라고 찡찡찡. 얼씨구, 팔짱까지 끼고 배도 툭 내민다. 솔직히 귀엽기는 한데... 못 말리는 미운 일곱살이 분명하다. 민교수가 내 앞에 커피캔 하나를 올려 놓을 때까지 커피 달라고 계속 땡깡 부렸으니까. 손에 핸드폰 쥐여주고 가서 로보카폴리 더 보고 오라고 하니 그제서야 조용해지더라고.
"그래요 뭐 박지민 학생 맞아요?"
"넵."
"유아교육과?"
"넵"
"그러면 오늘 시험 봤겠네요. 시험은 뭐, 쉬웠죠? 나름 쉽게 낸다고 하긴 했는데."
"네? 억, 켁, 커흡.."
마시던 커피가 기도로 들어가는 줄. 놀라서 캑캑거리며 사레들렸다. 그러자 또 윤기의 괜찮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꼬맹이가 우다다 뛰어오더니 커피 뱉지 말라고 자기랑 짠 해달라고 졸라댔다.
"아찌 커피 뱉지 마!"
"으응...."
“이쁜 아찌 윤지랑 쨘 해여”
“아저씨 아니구 박지민이거든”
“그러면 박지민아찌?”
“아니 지민오빠. 그것도 싫으면 지민삼촌”
“둘 다 시러. 아찌 안 되며능 지미나 할래”
“....”
“지미나 빨리 쨘 해죠”
진짜 미친 교수가 분명하다.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네. 그 시험이 쉬웠다면 그건 분명 옆방 교수 기준이 분명하다. 옷 주는 줄 알아서 왔는데 이게 뭐야... 나 그냥 집 갈래 엄마... 그래도 저 꼬맹이 아니었으면 도망나갈 길이 없기는 했으니까. 그건 좀 고맙다.
"미안해요 학생. 애가 좀 당차죠."
"아뇨 뭐... 저 정도는 저도 저러고 자라서.."
"... 기죽지 말라고 씩씩하게 키웠더니 저러네요. 하여튼 학생한테 실례가 많았어요."
"...."
"아 맞다 그리고 학생 옷은 내가 빨아서 다음 수업때 가져다줄게요. 지금 입을 옷이 내 셔츠밖에 없기는 한데 괜찮아요?"
"네? 아...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그러기엔 옷이 좀.."
하긴. 옷 꼴이 말이 아니기는 했다. 결국 하도 민윤기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민교수 셔츠를 받아버렸다. 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부담스러워서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 커피는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후다닥 교수 연구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손에는 아까 윤지가 준 쪽지 하나를 들고서.
"이거 우리 압빠 저나버노에여 010-3468-0172"
애기의 귀여운 도발인 건가. 교수님 번호는 딱히 안 궁금했는데... 원래 애들은 관심 있으면 괴롭힌다고도 하긴 하던데 어쩌면 윤지도 그런 걸지도. 귀엽거든 저러는 거 보면.
받아입은 민윤기의 하얀색 셔츠 소매 끝에서 블랙베리 향이 살풋 풍겨왔다. 가끔 보면 좀 의외의 인물 같거든. 예상하지 못 한것들이 하나둘 속속 나오는 걸 보면. 어이가 없는데 귀엽기도 해서 속으로 한참을 웃었다.
한편 윤기는 지민이 도둑 고양이 마냥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급할 필요는 없는데. 항상 강의 중간에 늦게 들어오던 학생이라 얼굴이 낯에 익던 학생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덤벙대는 면이 좀 귀엽기도 하고. 뭐 학생과 교수의 관계에서 별다른 특별할 건 없었지만. 아직까지는.
그러다 윤기는 문뜩 호기심이 들어서 방금 전 시험에서 지민이 제출한 답안지를 보려 서류 더미를 뒤적였다. 박지민 학생... 아 여깄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제가 더 열심히... ' 뭐야 이거? 윤기가 지민의 답안지를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보기보다 특이한 학생이네 이거.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이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바닥에서 자동차 놀이를 하고 있던 윤지가 윤기에게 말을 꺼냈다.
"압빠 저 아찌 착해"
"그랬어?"
"웅 그리고 옙버"
"윤지는 좋겠네 예쁜 오빠 만나서"
"웅 윤지 어마 하면 좋을 텐데. 그지 압빠."
"...뭐라고 윤지야?"
윤지의 말에 반응을 해주며 무미건조하게 답안지를 넘기던 윤기의 손이 순간 뚝, 하고 멈추었다.
"윤지 어마 하면 좋겠어. 그래서 윤지가 아찌한테 압빠 저나버노 줘써. 윤지 잘해찌"
"....."
"음... 윤지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거 알지요?"
"괜차나 윤지는 압빠가 윤지 어마 만들어줄 거라고 믿어"
"윤지는 저 오빠가 맘에 들은 거야?"
"웅 그래서 아까 같이 쨘 하자고도 해짜나."
좋다는 말을 사랑한다 라는 말로 알아들은 것 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래 너도 서툴지만 사랑이 뭔지는 아는 거 같긴 하네. 막상 따지고 보면 윤기도 지민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자신의 이상형을빼다 닮은 외모와 덜렁거리는 성격... 계속 생각이 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지민을 다시 만날 궁리를 저도모르게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 항상 막무가내인 윤지가 문제지. 저 요망한 골칫덩어리를 어쩐담.
*
우리 학교에는 인기 절정의 강의가 하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민윤기의 교양 강좌다. 이름하여 만 원으로 데이트 하기. 제목처럼 그냥 만 원으로 데이트 하고 보고서 내면 그걸로 끝이다. 따로 기말도 과제도 없다. 그래서 수강신청 뼈 빠지게 해도 다들 자리 하나 못 건지고 나온다.
하지만 내가 누구야 박지민이지. 다른 애들이 민윤기한테 빌고 빌며 메일 보내는 동안 나는 태태가 시간 안 되가지고 빠진다길래 냉큼 그 자리를 물어왔다. 꿀 교양 강의 하나 공짜로 얻은 셈. 뭐 누구랑 데이트 할 지는 상관 없고 학점만 잘 따면 끝나는 거니까.
강의실에 살짝 늦게 들어갔는데 아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이미 자기들끼리 짝을 다 만든 모양이었다. 나 혼자 남은 건가... 이럴 거면 수강신청 정원을 짝수로 하지 왜 홀수로 만든 건데 하... 대략 난감. 뭐라고 하긴 해야 하는데 도무지 짝이 없다. 혼자 발만 동동 구르기 바쁘다.
그러던 와중에 민윤기가 강의실 앞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다들 짝 구했냐며 물었다. 모두들 그렇다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빼고서. 그러자 민윤기가 혹시 아직도 짝을 못 구한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주변 눈치를 보다 쭈뼛쭈뼛 나 홀로 손을 들었다. 진짜 존. 나 개 쪽팔려.
"박지민 학생?"
"....넵"
"출석은 확인했으니 다들 개별적으로 과제 하러 강의실 나가도 좋고, 박지민 학생은 잠깐 나 좀 봅시다. "
"네?"
"뭐 불만있어요?"
"아뇨... 남을게요."
말 하는 꼬라지 하고는. 여전히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데 왜 따로 보자고 한 건지... 설마 전에 입은 셔츠 돌려달라고? 아 그거라면 아직 집구석에 박아뒀는데... 머릿속에서 온갖 물음표가 둥둥 떠다닌다. 그리고 그 물음표는 곧장 내 얼굴에도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무슨 생각해요?"
"네? 어... 으악! 교수님 제가 가도 되는데 언제..."
"사람 다 빠져나갔는데 혼자 앉아있길래 졸고 있나 해서."
"...."
정신 차려보니 눈앞에 민윤기 교수가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예상치 못 한 시선이라 얼굴이 빨개지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으악 하고 질렀다. 쪽팔림 1 더 추가.
"아까 짝 없댔죠."
"네..."
"그럼 어쩔 수 없네. 나랑 해요."
"네?"
"윤지도 지민 학생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괜찮죠?"
"윤지면... 그 때 교수님 따님.."
"그죠"
"근데... 지금 당장 여기서요?"
"지금 당장 여기서 어떻게 합니까. 학생이랑 나 밖에 없는데."
"..."
"일단 우리 집으로 가죠. 뭐 할지는 가면서 생각하고."
저놈의 말 뽄새는 고칠 생각이 없나 보지. 응... ㅎㅎ 민교수의 집으로 향한다는 말에 또 다시 두 눈이 동그래진다. 한낱 학생인 내가 교수님 집에 들어가도 되기는 하는 건가... 음.. 이거 아무리 민교수가 먼저 제안했다지만 좀 선 넘은 거 아니야...? 넘어도 내가 넘은 거지 뭐... 별 생각을 다 한다. 민교수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나 강의실을 나가고, 주차장으로 데려가, 나를 자기 차 조수석에 태울 때 까지.
차에 올라타 벨트 매는 걸 깜박했다. 출발 전날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길래 뭐 하는 건가 했는데 슬금슬금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순간 교수님 뭐 하세요? 할 뻔. 근데 그냥 직접 벨트 매주셨다. 은근히 섬세하네 사람이.
차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민교수의 차 안을 가득 채운다. 벤츠 타시네. 하긴 뭐 교수니까... 밖은 온통 검정 천지인데 차 안을 힐끔 보니 뒤에는 온통 육아용품 천지. 애기 카시트에 곰 인형 분홍분홍 시트... 어련한 딸바보 인정. 근데 계속 이렇게 아주 말 없이 가자니 어색해서 엉덩이에 쥐 날 것 같다. 뭐라도 말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입만 달싹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연다.
"...그 교수님 윤지는 뭐 좋아해요?"
"당근 빼고 다. 그거 빼곤 다 좋아해요."
"아... 당근.."
"근데 교수님... 아무래도 집에 교수님 와이프 분도 계실 텐데 제가 가는 건 좀 실례일까 봐.."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차피 윤지랑 나랑 지민학생만 있으면 돼요 오늘은."
"네에..."
그 이후에는 대체 어떻게 뭘 어떻게 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어색해서 죽겠는데 괜히 가정사를 건드린가 싶어 머릿속은 엉망진창. 거기다 덤으로 멀미는 나서 속은 울렁울렁 뒤집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 새 교수님 댁 소파에 앉아있었으니까. 그리고 저 멀리서 윤지가 우다다다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예쁜아찌 오늘 왜 와써여?"
"으응 윤지랑 놀아주려구 왔지"
"헐 그러면 우리 압빠도 오늘 윤지랑 노라준다구 했는데 가치 노라여"
"그래 윤지 우리 뭐 하고 놀까?"
"소꿉노리 해줘여 아찌가 어마 하구 우리 압빠가 압빠 역할 하구 윤지가 애기 하면 대여"
강의 과제때문에 온 건데 공짜 베이비시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뭘까... 이럴 거면 그냥 다른 교양 할 걸...그리고 지금 내가 민윤기랑 애랑 소꿉놀이나 하고 있으라니 이게 뭔... 이건 월요일 아침 드라마에도 안 나올 장면이잖아
"아냐 윤지 우리 오늘 소꿉놀이 안 하고 다른 거 할 거야 삼촌 괴롭히지 말고 일로 와"
후. 안 그래도 난감하려던 차에 민교수가 윤지를 말리는 바람에 상황은 일단락 되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 아기 앞에만 서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해야 하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느 새 민교수랑 찻잔 짠 하면서 건배 하고 있더라고.
"압빠 어마 윤지랑 쨘~~"
"쨘.. 근데 윤지야 오빠가 윤지 엄마 역할인 거야?"
"웅!! 그리구 이제 겨론식도 하꺼야!! 압빠 빨리 와바"
"윤지 아빠 왜?"
"찌미 아찌랑 손 잡아"
"....."
얼떨결에 맞잡은 손 사이가 후끈후끈하다. 당황스럽기 보다는 어색함에 가깝다. 그리고 윤지의 폭탄 발언으로 그 어색함은 배가 되었고,
"압빠 어마 입짱!!"
"....."
"압빠랑 어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무네 오늘 겨론식을 함니당 이제 어마 압빠는 사랑애 키스를 해 주세여~~"
"...? 잠깐만 윤지야"
이제는 교수님 집에 와서 교수님이랑 뽀뽀까지 하게 생겼다. 첫 만남부터 뽀뽀는 좀... 아무리 어른의 연애라지만 유교보이 박지민한테는 좀 무리인데. 그렇지만 내 앞에는 뽀뽀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의 동심을 깨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교수님 미리 죄송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민교수의 입술 위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떼었다. 거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쪽"
"......"
"허얼 압빠 티비에서 코코몽 나온다!!"
.... 동심 지켜준다고 무작정 교수 멱살 잡고 한 키스의 꽃말은 코코몽이던가.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입술 닿는 장면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더니 티비에서 코코몽이 나오는 순간 윤지가 티비 앞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남은 건 나의 새빨개진 귀와 수치심, 그리고 교수님의 입술에 남은 나의 립밤. 거칠거칠한 교수님의 입술이 약간은 번들거려 보인다.
그래서 더욱 더 쪽팔린 거겠지. "쪽" 도 팔리고 쪽도 팔린다. 티비에서는 코코몽 노래가 나온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먼 산만 보기에 바쁘다. 충분히 민폐였단 걸 알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민교수를 보자니 더욱 더..
애꿎은 시계 소리만 째깍째깍. 어렵사리 입을 꺼내려 했지만 여전히 입은 열리지 않고 손톱만 잘근잘근 씹기에 바쁘다. 만약 그러던 중 처음으로 나온 소리가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라면 어떨까.
그리고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건 생각보다 쉽다. 적막을 깨고 배에서 천둥이 치는 것 마냥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끄러워. 도망칠까. 아침 먹을걸.
"....."
"..."
"배고파요?"
"네?"
"..밥 안 먹었죠. 시간도 저녁 시간인데 윤지 밥 먹을 겸 같이 밥 먹고 가요. 그냥 보내기도 좀 그렇고.."
"아뇨 교수님 저 괜찮아요. 이 시간까지 있는 건 민폐기도 하고 사모님 들어오시면 어떡하려..,"
"학생 배 사정은 안 그런 거 같은데."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려던 그 찰나를 못 참고 배가 꼬르륵 거렸다.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러면 오늘만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뭐 먹을래요? 집에 딱히 먹을 게 없네"
"압빠 오늘 꼬꼬 먹짱"
옆에서 윤지가 끼어들어서 꼬꼬! 꼬꼬! 하면서 닭 흉내를 내었다.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교수님도 어렸을 때 저랬으려나.
"치킨? 윤지 치킨 먹고 싶어?"
"우웅.. "
"괜찮아요 치킨 시키려는데?"
"아... 네! 저 상관 없어요"
*
치킨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맛있었다는 의미보다는 어색하다는 의미. 남은 치킨을 정리하면서 몇 번이고 닭뼈를 떨어뜨렸던가.
서투른 폼으로 교수님과 싱크대에 딱 붙어서 설거지를 하고, 윤지가 칭얼대며 자장가를 불러 달라기에 자장가를 불러줬더니 금방 재우는 데 성공했다. 대체 어디가 만 원으로 데이트 하기인지 모르겠다. 집까지 택시 타면 만 원 정도 뜨니까 이것도 인정해주나. 지민이 혼자 주방 식탁에 앉아 머리를 마구 굴렸다. 어쩌면 그냥 그만두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생각해요?"
윤기가 지민의 앞에 마시던 물컵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윤기의 방문에 지민이 어깨를 절로 퍼드득 떨었다. 덕분에 방금 전 살짝 맥주를 마셔 알딸딸한 정신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그냥 아무 생각 안 해요"
"분명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 다 아는데"
"...."
"오늘 일은 그냥 잊어요"
"그... 그래도 죄송해요 제가 괜히 그랬죠"
"미안할 거 없어요. 괜히 내가 윤지 덕에 일을 만들어서. 오히려 오늘 밤일은 좀 어떻게라도 보상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냥 교수님 교양 과제 했다고 생각해주세요 제가 너무 민폐여서..."
"보통 과제를 교수랑 뽀뽀하는 거로 하지는 않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윤지가 하는 거에 어울려 주고 싶었어요. 조금은 밉기도 하지만 아직은 어린애니까... 어린 애가 뭘 알겠어요"
".. 그래요 과제. 그거 때문이라 칩시다. 그래도 나는 그 이상의 감정은 허용 못 해준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더 그런 거에요"
"?"
"..저 교수님 교양 강의 인제 그만 하려고요. 괜히 저 때문에 자꾸 곤란한 상황만 생기잖아요."
속에서 응어리처럼 앓기만 하던 생각을 드디어 뱉어낸다. 차라리 나 하나가 빠지는 게 여기서는 제일 쉬운 방법이기는 하니까. 조목조목 내가 왜 교양을 그만두는지에 대해서도 전부 말씀드렸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민교수가 당황한 눈치인지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민교수도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눈치였는지 현관 앞으로 같이 따라 나왔다. 그리고 이제 문만 열고 나가면 다 끝인데... 예상외의 복병은 항상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
"어마 어디 가...? 압빠랑 겨론했짜나"
윤지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와 부스스한 머리로 지민을 찾는다.
나는 언제부터 저 아이의 공식적인 엄마가 된 거지. 지민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지가 막 나가려는 지민의 소맷단을 꼭 잡는다. 아무래도 잠결에 아까 전의 대화를 모두 들은 모양이다. 그리고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자신의 소매로 감춘다.
"겨론했는데 어디 가아..."
"압빠 왜 어마 버려? 어마도 윤지 버리지 마... 웅? "
눈앞에서 민교수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는 것을 봤다. 나 또한 어린아이가 저런 말을 뱉는 것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 한다. 하지만 얼른 아이를 달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 자신의 무릎을 윤지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리고 다정한 눈길과 함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아냐 윤지야 엄마 어디 안 가. 엄마 조금 있다가 다시 올 건데?"
이렇게 어린 아이가 눈물을 흘리는데도 그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내가 조금은 미워지려고 했다.
"안냐... 엄마 다시 안 올거자나 윤지는 다 알아. 압빠가 그랬단 말이야. 어마가 윤지 잘 때 도망간 거라고. 응? 어마 다시 안 올 거잖아 어마 윤지 버리면 안대.."
윤지가 지민의 품 안에 안겨 울음을 엉엉 터트렸다. 조그만 아이의 가슴팍이 들썩거리는걸 보니 괜히 마음이 미어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고 나도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민교수를 올려다보니 그쪽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윤기 또한 뒤돌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윤기 또한 숨이 턱 막히는 건 똑같았다. 분명 엄마가 죽었다는 말 보다는 엄마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이의 기억에 더 좋을 줄 알았는데, 저 어린 애가 무슨 생각을 했을 지 훤히 보여서... 잘못된 판단이 마치 저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만 같아서.
잘못된 판단을 돌릴 수 없다면 지금 이 상황만은 바꿔야만 한다. 그것이 간절한 부탁이라 할지언정,
"...애가 나보다는 엄마를 더 좋아해요"
"...."
애원보다는 간절함, 간절함보다는 오열에 가까운 부탁. 지민의 소맷단을 붙잡은 윤기의 손아귀 힘이 느껴진다.
"민폐인 거 알지만... 오늘만 윤지 데리고 자 주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