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을 달라면 돈 줄게요. 예전에 윤지가 엄마 때문에 잠도 잘 못 자고 먹을 것도 다 토하고... 그러니까 제발 오늘만 부탁할게요."
간절함을 호소하는 윤기와 지민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힌다. 지민은 어떤 마음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윤기를 응시한다. 분명 민교수가 남한테 저렇게 부탁하는 사람이 아닌데. 굳이 이러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내가 예상하는 그 것 그대로겠지. 오로지 윤지만을 위해서.
"...오늘까지만이에요."
앞에서 눈물을 내비치는 어린아이 앞에서는 지민은 한없이 약해지곤 한다. 결국 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윤기의 제안을 승낙했다. 엄마... 엄마...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 사실상 부르자면 아빠가 더 가까울 텐데.
앞에서 여전히 훌쩍훌쩍 울고 있는 윤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윤지가 지민의 다리를 꼭 껴안았다.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곰돌이 인형을 안던 것처럼.
"...어마 다녀오셨어요"
"..응 윤지 이제 코야하러 엄마랑 가자 엄마가 재워줄게"
"우웅..."
조그마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안방으로 향했다. 자다 깨 엉망인 이부자리를 정리해주고 곤히 잠들 때 까지 옆에서 배도 토닥토닥. 부디 이 아이의 밤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다 재우고 나니 조그마한 불 하나만 켜진 주방에서 윤기가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면 교수님의 밤 또한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지민이 쭈뼛쭈뼛 그런 윤기의 옆으로 다가갔다.
"..교수님 저도 같이 한잔해도 될까요"
"옆에 앉아요 거기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
자연스레 윤기의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주방에서는 잔을 꺼내는 달그락 소리, 와인을 따르는 꼴꼴 소리 그리고 시계소리와 둘의 대화 소리만이 존재한다.
"미안해요. 이번에는... 내가 좀 교수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윤기의 옆모습이 초췌해 보인다. 며칠을 앓은 사람 마냥.
"..교수님도 윤지 때문에 그런 거 알라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엄마... 사실 윤지 낳고 나서 와이프가 좀 아팠어요. 그냥 그때는 괜찮겠거니 했는데 일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음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요. 근데 윤지한테는 사실대로 말 안 했어요. 오히려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런데 내가 실수했나봐요. 아까 윤지가 하는 말... "
"...."
미처 알지 못 하는 사정이 저런 일이었구나. 예견없는 이별은 항상 이렇게 누군가의 가슴에 돌멩이를 남긴다. 그리고 그 돌멩이는 평생을 마음이란 주머니 안에서 함께하기 마련.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리겠지.
"미안해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죠. 또 실수했네요."
여전히 초췌한 윤기의 얼굴 표정이 영 반갑지 않다. 지민은 마시던 와인잔을 탁 내려놓고 깡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남의 집안일에 나는 관심이 왜 이리 많은 건지.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당장 사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줘야 한다거나,
"..."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자고 나와요. 아침에 학교 데려다줄게요. 강의 몇 시 시작이에요?"
그리고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최종 결론은 결국 이거였다. 술에 취했을 거란 알딸딸하고 구질구질한 변명과 함께.
"쪽"
"...?"
제 멋대로 윤기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짧게 맞췄다 뗀다. 어린 아이를 달래는 법은 잘 알아도 어른을 달래는법은 잘 모른다. 너무 충동스러웠다는 생각에 입술을 떼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시선도 자연스레 아래를 향한다.
"..사모님이라면 분명 교수님 옆에 있어 주시고 싶었을 거에요..."
"..그게 무슨"
지민의 말을 들은 윤기의 모습이 퍽이나 당황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표정을 당췌 읽을 수가 없는 게 무슨 상황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만 같았다.
"물론 제가 그 대역에 맞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교수님이 너무 슬퍼 보여서.."
"...."
"정말 그것 뿐이었어요. 그것 말고는... 으븝"
지민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윤기가 지민의 뒷목에 자신의 손을 두르고 입을 맞췄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뽀뽀였다. 까슬하게 각질이 인 교수님의 입술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제는 민교수의 혀가 나의 입술에 대고 어서 열라는 듯이 톡톡 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키스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교수님의 희고 긴 손가락이 나의 뒷목을 은근히 주물거린다. 나도 괜히 공중에 머무는 손이 미워 교수님의 허리를 감쌌다.
주방 안을 어색한 두 남자가 숨을 나누는 소리, 혀가 섞이고 타액이 섞이는 춥춥 소리로 가득 채운다. 괜히 술에 취했을 거라는 변명을 빌어본다.
비로소 어색한 둘의 밤이 저물어 간다.
*
"으으음...몇 시야아..."
밤새 소파에서 구겨서 잔 건지 허리가 찌뿌둥하다. 그리고 등 뒤에 무언가 덩어리가 있는 듯한 느낌이 영 별로다. 아무리 큰 소파라지만... 괜히 불편한 느낌에 뒤를 돌아서 보니 민교수가 내 허리에 자신의 팔을 감싸고 자고 있었다.
"..! 뭐야..?"
다정한 손길로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잠을 청하는 민교수 덕에 나도 모르게 절로 큰 소리가 나왔다.
뭐야 그러면 나 소파에서 교수님이랑 껴안고 잔 건가.
귀가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리고 교수님의 얼굴을 보자 어젯밤의 키스가 생각나서...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얼른 교수님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가는 게 내게 주어진 최선의 방법이다
지민이 윤기의 눈앞에 손을 몇 번 흔들어 보였다.
"교수님...주무시죠..?"
"..."
"맞는거죠...?"
그리고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서둘러 가방 짐을 챙기고 후다닥 집을 빠져나왔다. 아마 저 집에 더 있는다면 무슨 대참사가 벌어질지 모른다.
*
교수님 댁에 갔던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던가. 피해 다니기에 바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알아차리지 못 했을 정도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피해 다니기 바빴고 두 번째로는 괜히 자꾸만 교수님과의 키스가... 생각나서 강의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무지 그 날의 키스가 잊히지 않아 수업을 그만 듣겠다며 메일도 보냈다. 물론 답은 없었다. 달랑 메일 하나 퉁 치고 수업을 그만둔 지도 어느덧 한 달,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에 중도에서 공부를 하려고 새벽 6시에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늦잠을 잤겠지만 그래도 시험 기간이니까 최소한의 양심은 챙기는 거로.
씻고 나와 밥을 먹고 입을 옷을 찾으려 옷장을 뒤적거렸다. 아... 꼭 나갈 때만 옷이 없는 기분. 그러다 눈에 꽤 괜찮아 보이는 셔츠가 들어왔다. 어? 내가 이런 셔츠도 있었나 하며 셔츠를 꺼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게 이런 셔츠가 있을 리가. 전에 받았던 민교수의 셔츠다. 교수님의 셔츠에서 나던 블랙베리 향 덕에 내 다른 옷에서도 온통 교수님의 향기가 났다. 괜시리 아침부터 얼굴이 붉어진다.
암튼 그건 그렇고 흐음... 셔츠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걸 돌려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도 내 셔츠는 아닌데... 다시 얼굴을 보자니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그래도 내 꺼는 아니잖아... 또다시 유교남 기질이 출동하는 순간. 결국 눈 한 번 딱 감고 윤기에게 메시지 한 통을 덜렁 남긴 지민이었다.
"교수님... 저 박지민 학생인데 그때 셔츠 돌려드리려고 연락 드렸어요. 오늘 점심시간 조금 넘어서 가져다드려도 괜찮으실까요...?"
문자를 보내고 나서 드는 묘한 수치심에 침대에 핸드폰을 던지고 벌렁 누웠다. 아 박지민 일 쳤네. 괜히 보냈나... 걱정들이 머리를 빙빙 싸고돈다.
*
으음... 뭔가 찌뿌둥한 기분. 분명 방금 전에 침대에 누운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새 깜빡 잠들은 모양이다. 응? 나 지금 잤어? 몇 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어느새 12시 30분. 미쳤나봐 어떡해. 대충 눈에 보이는 체크 남방과 후줄근한 츄리닝 바지에 몸을 쑤셔 넣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갈 때 교수님의 흰 셔츠를 잊지 않는 것은 덤. 지민이 머리칼을 마구 헤집으며 집을 뛰어나갔다.
"허억... 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뛰는 와중에 핸드폰에 알림이 와 있나 봤다. 그러나 민교수에게 온 답장은 0. 이미 셔츠는 가지고 나왔고 연락은 안 보고... 그러면 직접 찾아가봐야지 뭐..
오늘따라 교수실로 가는 길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가. 그리고 저 멀리서 어린 꼬마 아이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누군가의 손을 꼭 붙잡고. 그런데 잠깐... 여기는 대학교인데 꼬마 아이가 왜 있어?
"압빠!! 쩌기봐봐 찌미어마 와써"
아... 윤지다. 그것도 옆에 민윤기의 손을 꼭 붙잡고. 민교수를 보고 아빠라고 하고 나를 보고 엄마라고 한 윤지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한다. 이건 진짜 미친 게 분명하다.
"어마 오늘은 왜 와써여??"
"어?"
"압빠가 찌미어마 이야기 윤지한테 엄청 마니 해좃는데... 어마도 들을래여??"
하... 복도에서 언제까지 엄마 아빠라고 부를 건지. 당황한 기색을 하고 윤기를 보니 교수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안 들어올거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 열었으면 말 좀 해주지. 꼭 저래야 하나.
교수실에 들어오자마자 역시나 어색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내 손을 조물딱 거리며 엄마, 엄마 하는 윤지는 덤. 서둘러 이 곳을 빠져나가려 횡설수설 말을 한다.
"음... 그러니까 교수님 연락을 했는데 안 보셔서... 셔츠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그거 말고 다른 용건은 없고 저는 중도에서 오늘 시험공부 할 거라 가볼게요 죄송해요 안녕히 계세요. 윤지도 안녕 아저씨 갈게"
고개를 푹 숙이고 흰 셔츠를 교수님의 손 위에 턱 하고 쥐여줬다. 그리고 바로 뒤 돌아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민교수가 그런 나가려는 나의 팔을 턱 하고 잡는다.
"...?"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띄운다.
"중도 오늘 공사한다고 문 닫았어요"
"...."
"기왕 온 거, 차 마시고 가요. 오늘 나도 일정 없어서 학생 답안지 채점 할 거고... 나는 괜찮으니까 여기서 공부 하다 가도 괜찮고. "
"저... 그 교수님"
"다른 거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저 대학원 오라고 이렇게 잘 해주시는 건 아니시죠?"
맙소사. 긴장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막 튀어나온다. 덕분에 민윤기가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봤다. 쪽팔림 1 더 추가..
"허..ㅋㅋ 박지민 학생 원래 이런 캐릭터에요?"
"...."
"대학원... 뭐 나쁘지 않네요 더 오래 볼 수 있으니까."
"....?"
"그냥 한 말이에요. 여기서 공부하다 가요. 윤지도 오늘은 조용히 한글 공부 하기로 했어요."
.... 내가 코로 숨을 쉬나 아니면 귀로 숨을 쉬나. 도망가려고 했는데 딱 붙잡힌 꼴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내게 왜 잘 해주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게다가 나는 중간에 수업도 빠진 놈인데... 덕분에 책을 펴고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
커어어... 흡! 머리를 책에 박기 직전까지 졸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덕분에 대차게 졸았다. 공부 하겠다는 의지는 어디로 가셨나요. 너무 긴장되다 보니까 오히려 잠이 더 쏟아졌나. 교수 연구실에서 학생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꼴이란. 다행히도 침은 안 흘렸다. 그것마저 했다면 정말 희대의 수치플..
앞을 보니 윤지도 어느 새 고개를 박고 연필로 세계지도를 그리고 있다. 꾸닥꾸닥. 조그만 머리통이 앞뒤로 진자운동을 한다. 반면 민교수는 잠도 안 오는지 뿔테 안경을 쓰고 묵묵히 채점만 할 뿐이다. 진짜 최고로 독한 사람. 일 밖에 모를 사람. 그러다 내 쪽을 한 번 바라봐주더니,
"잘 잤어요?"
"아... 교수님 그러니까 이거는.."
괜히 양심에 찔려 변명을 중얼댔다.
"너무 열심히 자길래 일부러 안 깨웠는데."
"....."
사실 지민이 열심히 잤다기 보다는 그냥 졸고 있는 지민과 윤지의 모습이 신기하리만큼 닮아 있어서. 판박이 처럼. 그 모습을 더 바라보고 싶었다. 괜히 웃음이 피식 나올 정도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채점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 전에 일 때문에 내가 사 주는 것도 있고." "에,에.. 저녁이요 벌써?"
"7시가 넘었는데... 배 안 고파요?"
시계를 보니 7시가 진짜 맞다. 와... 장장 4시간을 엎드려 잤구나. 어쩐지 허리가... 좀 그렇더라고
"윤지야 아빠가 밥 먹으러 가쟤. 이제 일어날까?"
"우웅... 어마 나 졸려 안아죠오.."
잠에 취한 윤지를 깨우려고 했는데 오히려 지민의 품을 파고들며 떼를 쓴다. 거절하자니 자꾸만 그 날의 아이가 떠올라서...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다. 결국 윤기가 채점을 다 끝내고, 교수 연구실을 나와 윤기의 차에 탈 때 까지 윤지를 품에 안고 있던 지민이었다.
"꼬르르르륵....."
윤지를 뒷자리 카시트에 앉히고 조수석에 올라타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번에도 모자라 이번에는 꼬르륵 2차전. 아... 조용한 차 안에 내가 낸 소리가 가득 찼다. 교수님도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 지민씨 지금 배고프죠"
"...음... 어 약간...?"
"잠시만 기다려 봐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윤기가 바나나 우유 하나를 꺼내 지민에게 건넨다.
"윤지가 좋아해서 오늘 오는 길에 두 개 사 왔어요. 윤지 자니까 몰래 비밀로 하고 먹어요"
"...넵"
윤기가 비밀이라는 듯이 쉿 하고 손가락으로 제스처를 취한다. 배가 고파서 서둘러 윤기가 준 바나나우유를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지민이 쪽쪽 바나나우유를 마시는 소리만이 차 안에 가득하다. 몸을 배배 꼴 정도로 어색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면... 전부터 생각해놓은 말을 꺼낼 때 인가.
"교수님 제가 윤지하고 교수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몰라도... 저는 그냥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
"그냥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날도... 그러니까 너무 막 나쁘게 생각하시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
지민은 손가락을 꼼질거릴 뿐이고 윤기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운전만 하기에 바쁘다.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도 알아요. 지민씨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
"근데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랑 지민씨 생각은 조금 다른 거 같아서. 아무래도 선이 필요하지 않나 싶었어요. 근데 그게 또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교수님이 생각하는 그런 거는 뭔데요"
괜히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 사람이 대범해 진다.
"..윤지가 지민씨 보고 엄마, 엄마 하는 거 장난 아니에요."
"..."
"교수씩이나 됐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들 투성이에요. 감정이 서툴러서. 이거 하면 지민씨가 좋아할까, 아 좀 부담스러워할까 하면서 한참을 고민해요."
"..."
"근데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헷갈리고 무섭고... 한 번 사랑을 잃어봐서 그런가 유독 더 그러네요."
"..교수님"
"...."
"저는 교수님하고 윤지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사모님하고 똑같은 존재는 못 되어 드려도... 좋은 아빠는 할 수 있어요."
좋은 아빠. 지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기가 갓길에 차를 끼익 하고 급하게 세운다.
"방금 그 말, 뭡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교수님의 얼굴 표정.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당황과 다른 감정으로 점칠되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췌 알 길이 없었다. 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 그러니까 요약해 보자면 어디서 나온지도 모르는 용기를 내어 할 말 못할 말 구분도 못 하고 자기 감정을 모조리 쏟아냈단 말이다.
"그러니까... 저도 교수님이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지만 그게 싫지는 않아요. 윤지... 처음엔 미웠지만 자꾸만 제가 저 아이를 돌봐주고 싶고... 그냥 그래요. 되게 기분이 이상해요. 교수님만 봐도 귀는 빨개지는데..."
"... 좋은 아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교수님... 저 아무래도 윤지랑 교수님이랑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며칠을 고민했는데... 역시나 나쁘지 않다. 가 제 답이에요. 물론 아무도 안 물었지만."
윤기의 표정이 순간 굳는다. 난 이제 망했다. 나는 교수님과 키스도 하고 고백도 한 최악의 미친 학생이다.
"...지민씨"
"네"
솔직히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대차게 까일 준비도, 쪽팔릴 준비도 완료. 지민이 눈을 질끈 감고 윤기의 대답을 기다린다. 심장이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어온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 들은 윤기의 대답은,
"방금 그 말, 고백으로 알아들어도 되는 거예요?"
상상치도 못한 대답.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줄이야. 지민은 망설이는 표정을 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린다. 우리 모두가 부디 외롭지 않으면 좋겠다.
"... 저는 후회 안 해요."
"....키스.. 해도 됩니까."
사실상 허락을 묻기 보다는 통보의 물음이 맞다. 하지만 지민은 또다시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더 이상의 후퇴도, 도망침도 없다. 지민의 오케이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윤기가 마치 그 날 처럼 지민의 뒷목을 자신의 손으로 옭아맨다. 뒷자리에서 곤히 자는 윤지는 못 봤을 거라 믿으며.
두 사람이 혀를 나누는 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 채운다. 오늘 들은 소리들 중 가히 가장 흥분되는 소리라 함은, 바로 이 소리. 윤기가 지민을 잡아먹을 듯이 격정적으로 지민의 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지민의 허리를 감싸온다. 슬슬 숨이 가빠온다.
"...교수님.."
"....."
"..제가.. 좋은 엄마는 못 해줘요. 그래도... 좋은 아빠는 노력 해 볼게요"
만 원으로 연애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더라. 역시나 사람 일은 오래 살고 볼 일인가 보지. 달달한 키스의 맛은 바나나 우유. 방금 전 일은 어른들만의 비밀로.
괜히 뒷자리에 앉아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된다. 그리고 윤기의 손이 지민의 손 위를 덮어 살며시 깍지를 낀다.
윤지야, 비록 내가 너한테 좋은 엄마는 못 해주지만 좋은 아빠는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적어도 우리, 외롭지만은 말자.
만원으로 민교수님과 연애하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