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S141013 박지민. 물체 단계 5. 1차 시도. ]
기계음이 몇 가지 안내사항을 내뱉고 지민이 자신의 앞에 놓인 쇠로 이루어진 고체에 정신을 집중했다. 지민의 위에서 밝게 빛나던 불빛의 세기가 점점 흐릿해지고 그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묘하게 싸해졌다. 지민이 눈을 살짝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미소를 살짝 짓더니 감았던 눈을 떠 자신의 앞에 있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구의 모형을 하고 있던 쇠는 끼긱거리는 흔한 소리 하나 없이 조각이 나버렸다. 몇 조각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해체가 된 모형은 몇 초 뒤 다시 가루의 형태로 변했다.
“녹이기라도 할까요?”
지민이 제 앞에서 가루로 변해버린 쇠를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아마도 그가 있는 방 밖에서 지민의 행동들을 모두 빠짐없이 살펴보았을 사람들에게 묻는 것 같았다. 지민의 말에 대답하듯 쇳가루가 놓여져 있는 탁자의 안에서 어떤 틀이 하나 올라왔다. 존나게 성의 없네. 지겹다는 표정으로 지민이 쇳가루가 담긴 틀을 한 번 바라보더니 손을 한 번 휙 움직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그의 뒤에는 틀에 딱 맞추어져 녹아버린, 이젠 더 이상 ‘구’라고 부를 수 없는 쇠가 놓여 있었다.
***
지민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약통을 탈탈 털며 그 안에 있는 동그란 알약들을 꺼냈다. 대부분의 흰색인 그 알약은 지민과 항상 함께하던 것이었다. 참 뭣같지만 그렇다고 버리고 가 버릴 수도 없는 그런 관계였다. 지민과 약은. 약통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손바닥 위에 하얀 알약들이 몇 개 떨어지자 지민이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그리고 통을 몇 번 더 기울여 안에 있는 약을 더 꺼내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그락 소리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지민이 약통 안을 들여다보고 조용히 욕을 지껄였다. 짜증스러운 마음에 그걸 집어던지자 벽과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나긴 했지만 역시 약이 움직이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 또 떨어졌네.
박지민. S 급 센티넬. 국가가 총애하는 유망주. 능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복 받은 센티넬. 지민을 설명하려면 이런 수식들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민의 생각은 달랐다. S 급이든 C 급이든 결국 가이딩과 약에 의존해야 하는 자유롭지 못한 저주 받은 존재. 결국 모두 다 윗대가리들의 권력 다툼과 싸움들에 이용될 텐데 능력을 무엇을 쓸 수 있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이 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이라든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모두 똑같은 과정을 밟고 똑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센티넬과 가이드를 양성하는 소위 한국 최고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센티넬, 가이드들이 그러하듯이.
International Sentinel & Guide Training University [ ISGTU ] - 국제 센티넬 & 가이드 양성 대학.
한국에 여러 양성 대학들이 있었지만 서울에 위치하고 있는 ISGTU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하려 교환학생들이 오기도 했고 외국으로 교환학생을 보내기도 하는 명성 높은 대학이었다. 보통 고등학교 때쯤 발현되는 형질에 맞추어 센티넬, 또는 가이드들은 훈련 학원을 먼저 거쳐야 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능력과 컨트롤 같은 여러 공부들을 하고 필기와 실기 치험을 치른 후 좋은 성적을 받아야 비로소 ISGTU에 입학할 수 있었다. ISGTU에 들어갈 때는 등급 검사를 거쳤고, 입학 후엔 자신에게 맞는 등급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국내 최고 대학인만큼 ISGTU에 들어가려면 등급 발현이 최소 C는 나와주어야 했다. 정말 공부를 잘하지 않는 한 그 밑의 등급 센티넬, 가이드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대학이었다.
센티넬들은 S-S, S-A, S-B, S-C 등으로 분류되었고 가이드들은 G-S, G-A, G-B, G-C 등 으로 분류되었다. 너무 발현이 약하지만 공부에 특출난 D 이하 등급 학생들은 센티넬, 가이드 구분 없이 모두 Z 반으로 편성이 되었다. 이들은 훈련보단 공부 위주의 연구를 진행해 다른 등급의 센티넬, 가이드들에게 도움을 주는 형태로 양성되었다.
이렇게 꽤 냉혹한 현실 안에서 지민은 S-S로서 꽤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음에도 항상 모든 시스템에 관심이 없었다.
***
“또 약이 떨어졌어요?” “네. 그냥 6개월치로 처방해 주시면 안 되는 건가요?”
지민이 약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서 서있는 하얀 가운의 남자는 자신을 항상 도와주고 싶어하는 그런 사명 있는 약사였다. 그래서 약국에 찾아갈 때마다 제일 먼저 찾기도 했고.
“누누이 말했지만 지민씨, 제가 그렇게 약 처방 해주면 양 조절 안 하고 다 털어 넣을게 뻔해서 안된다니까요.” “잘 조절해서 먹을게요. 네?” “이렇게 한 달 치만 처방해야 지민 씨가 자주 약국 와서 제가 상태를 확인할 수 있죠.”
“.............” “버티기 힘들면 가이딩 받아요. 그거 죄짓는 거도 아니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대학에 서 센티넬들한테 제공해 주는 가이드 이용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해요.”
지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약사의 입에서 ‘가이딩’라는 말이 나오고 나서부터였다.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이 지민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어린 동생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귓가에서 울리는 흐느낌 소리는 꽤 오랫동안 지민을 떠나가지 않았다. 지민보다 4살이 어렸던 동생 은 보통 아이들보다 발현이 이른 편이었다. 지민의 동생은 훈련 학원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학원을 몇 개월 다니지 못한 탓에 자신의 몸 보호와 능력 조절에 더욱 미숙했다.
그리고 늦은 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센티넬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존재였다.
능력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해주게 된 동생은 불안정한 가이딩 때문에 폭주하게 된 센티넬로 인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 지민이 뒤늦게 그 순간을 목격했지만 그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였다. 지민은 차게 식어가는 동생의 몸을 붙잡고 흐느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일렁이는 기억들 속으로 날카롭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 치듯 울려퍼졌다. 지민이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한숨을 쉰 뒤 말했다.
“...... 약, 받아 갈게요.”
억제제를 받아 약국을 나온 지민이 그 자리에서 약통을 열어 알약을 몇 알 털어 넣은 후 핸드폰을 열고 시간표를 확인했다. 입안에서부터 퍼져가는 약 기운에 혼란했던 마음이 점차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기억들은 꽤 자주 지민을 찾아왔고 그를 잠식하며 집어삼키려 했다. 그렇지만 지민의 과거 일과는 별개로 시간은 나 몰라라 계속 흘러갔고 투정 부릴 새도 없이 대학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지민이 약을 받은 다음으로 해야 하는 것은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과목은 ‘페어’였다. 페어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페어링과 연애에 대한 것을 배우는 수업이었다. 인기가 많은 교수님이 수업을 진행하시고 수업 방식도 꽤 독특해서 수강을 원하는 학생이 꽤 있는 교양 과목 중 하나였지만 지민은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원래는 신청을 하지 않으려까지 했지만 S 급 센티넬이었던 자신에게 많은 교수님들이 권장하신 과목이었기에 신청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언의 압박 때문에 신청한 과목치곤 나쁘지 않은 학점을 받으며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관심은 생기지 않았다. 그보단 차라리 센티넬 필수 과목에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민이 수업을 위해 A동으로 이동하며 수강신청 당시를 떠올렸다. 교수님이 아무리 뭐라고 하셔도 그냥 역사 들을 걸 그랬나... 투덜거림도 잊지 않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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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과목 센티넬 1. 등급 분류 과목 1-1. 능력 컨트롤: 센티넬의 능력 조절과 사용 1-2. 실전 전투 기술: 전투 과정에서 능력 사용과 전략
2. 등급 미분류 과목 2-1. 센티넬의 삶: 센티넬의 자질과 마음가짐
2-2. 센티넬 양성: 능력 있는 센티넬의 예시와 삶
가이드 1. 등급 분류 과목 1-1. 능력 컨트롤: 가이드의 능력 조절과 사용 1-2. 가이딩과 폭주: 가이딩 방법과 가이딩 시 폭주 대처
2. 등급 미분류 과목 2-1. 가이드의 삶: 가이드의 자질과 마음가짐 2-2. 가이드 양성: 능력 있는 가이드의 예시와 삶
교양 과목 1. 마인드 컨트롤: 보다 용이한 능력과 실전을 위한 바탕
2. 생존 기술: 실전 투입 시 살아남는 방법과 지식 3. 전투와 전쟁: 무기와 전략 그리고 전쟁의 역사 4.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 상대에 대한 이해와 화합 5. 센티넬과 가이드의 역사: 발전 과정과 발자취 6. 페어: 페어링과 애정 그리고 가이딩 --------------------------------------------------
ISGTU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꽤 여러 개가 있었다. 먼저 그중에서도 센티넬이라면 필수로 들어야 하는 ‘능력 컨트롤, 실전 전투 기술, 센티넬의 삶, 센티넬 양성’이 있고 가이드라면 필수로 들어야 하는 ‘능력 컨트롤, 가이딩과 폭주, 가이드의 삶, 가이드 양성’이 있었다. 능력 컨트롤과 실전 전투 기술은 센티넬 중에서도 같은 등급끼리 강의를 들었기에 S 급인 지민의 훈련, 공부 강도는 센 편이었다. 그에 비해 센티넬의 삶, 센티넬의 양성은 등급 상관없이 반을 나누어 센티넬끼리만 들어 비교적 널널한 과목이었다. 가이드들이 듣는 과목 체계도 비슷했다. 능력 컨트롤, 가이딩과 폭주는 같은 등급의 가이드끼리 수업을 들었고 가이드의 삶, 가이드 양성은 등급 상관없이 수업을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교양과목. 교양과목은 센티넬, 가이드 상관없이 수강신청을 한 인원대로 수업을 들어서 유일하게 센티넬과 가이드가 등급 상관없이 함께 수업을 듣는 과목들이었다. ‘마인드 컨트롤, 생존 기술, 전투와 전쟁,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 센티넬과 가이드의 역사, 페어’ 중 필수로 두 과목을 들어야 했다. 지민은 마인드 컨트롤, 전투와 전쟁, 페어 이렇게 세 과목을 듣는 중이었고. 꽤 급박하게 마우스를 클릭한 수강신청은 뭐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머릿속으로 과거 여행을 마친 지민이 A라고 쓰여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졸업은 해야지. 지민이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야, 너 과제 다 했냐?”
“어.”
윤기가 동기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했다. 뭐... 그를 같이 다니는 ‘친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칭할 정도로 친밀감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윤기는 항상 그를 ‘동기’ 딱 그 정도로 생각 중이었다.
“와씨 존나 빠르네.” “내일이 제출일인 건 생각 안 하고?”
윤기가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하여튼 말만 많은 새끼들이 느리기는 가장 느려서 할 거 제일 안 해. 물론 이건 속으로 생각했다. 굳이 이 말을 입 밖에까지 내뱉어서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다. 따라오는 제 동기의 시선을 무시한 채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노트북과 공책, 필기도구 등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은 윤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 다. 지금 나가면 시간 맞겠네. 그가 나가려는 것을 눈치챈 듯이 윤기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던 남자가 간단한 물음을 던졌다.
“너 수업 들으러 가냐.”
정말 당연한 대답이 따라올 물음이었다. 이번에는 고개만 대충 끄덕인 윤기가 ‘페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무슨 수업을 들으러 가냐고 물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페어라는 단어에 동기의 눈이 커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 이 교수님 수업 듣지. 페어.” “어. 그건 왜.” “야 왜라니. 그 수업에 박지민 있잖아. 박지민.”
윤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살짝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와의 대화에 몇 분을 허비하고 있어서 였으리라.
“그게 누군데.” “너 진짜 학교생활하는 거 맞지? 박지민, S 급에 국가가 주시하고 총애하는 센티넬이잖아.”
“나랑 걔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래.” “아니, 교양 페어로 들으면 커플로 데이트하고 그런 수업도 있잖아. 팀플 같은 거도 많고. 걔랑 해서 한 번 후려봐. 가이드 인생 필지 누가 알아.”
윤기가 더욱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 더해보라는 것처럼 눈썹을 까딱거리며 잠자코 있었다. 아 지금 나가야 되는데 계속 붙잡네. 윤기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에 신나 보였던 동기의 표정이 한순간에 안타깝다는 낯빛으로 바뀌었다. 말을 살짝 머뭇거리던 남자가 웃음을 살짝 흘리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근데 너는 C라서 안되긴 하겠다.”
아 좆같네. 윤기가 욕을 내뱉으며 기숙사를 나왔다. 본인도 B 급 정도밖에 안 되면서 누구한테 고나리질이야. 본인 못난 거 조금 잘나 보이려고 나 끼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거 같나 보지. 저 새끼 내가 언젠가는 족친다. C 급 가이드로 살기 진짜 졸라게 힘드네.
민윤기. C 급 가이드. 학번은 G-C130309. 학교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학생 정도.
딱히 존재감은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거나 인간관계가 넓은 것도 아니었다. 친화력은 더더욱 없었다. 대학은 나와서 뭐라도 먹고살긴 해야겠으니까 공부를 꾸준히 하긴 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비슷한 이유로 ISGTU에 입학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현이 그다지 잘 된 편은 아니었고 그 때문에 등급이 매우 중요한 ISGTU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공부는 성실하게 해서 학점은 잘 나왔지만. 차라리 그냥 일반인이면 열심히 공부만 해서 잘 되기라도 하지.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처지가 완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에 속상해하고 좌절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 하면서 세상을 욕할 시간에 차라리 잠이라도 1분 더 자지. 지금 상황도 그랬다. 부조리한 이 상황들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는 그런 망상을 하며 시간을 허비한다던가, 아니면 이 상황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울어버린다던가. 그런 짓을 하기보단 그냥 내 앞에 놓인 일부터 해치우는 것이 더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윤기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A동으로 이동했다.
***
“출석자 확인했으니 수업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페어 수업은 페어링의 영향과 센티넬, 가이드의 연애에 대한 내용이었다. 강의실을 한 번 둘러보신 교수님이 학생들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수업을 시작하셨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페어링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이론이었다. 학생들은 필기를 열심히 따라가고 수업을 녹음하며 집중했다. 사실 수업 자체에 집중하기보단 그 뒤에 있을 팀플에서 잘하기 위한 의도가 컸을 것이었다. 페어링에 대해서 배울 때면 항상 짝을 지어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으로 유명했던 탓에 학생들은 이론 수업보다 그 후에 있을 팀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기대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엄청난 집중력 때문이었는지 이론 수업은 원만하게 진행되었고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짝을 추첨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페어는 과목이 과목인 만큼 센티넬과 가이드의 비율이 1 대 1 이었다. 그래서 짝을 지을 때면 센티넬과 가이드가 남는 인원 없이 다 맞아떨어졌다. 이 순간 강의실에 있는 모든 가이드들은 자신이 박지민과 같은 번호를 뽑길 바 라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박지민을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민윤기만 빼고.
“종이 돌릴 테니 번호 확인한 다음 같은 번호 뽑은 사람끼리 팀 하시면 됩니다. 과제 자료 는 앞에 있으니 한 부씩 가져가세요. 제출기한과 더 자세한 설명도 그곳에 써져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윤기가 자신에게 돌아온 종이를 받아들고 그것을 펴 숫자를 확인했다. 7. 그때 강의실 한쪽 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많은 학생들이 사람 한 명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7번! 야 박지민 7번 뽑았대!”
학생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려고 한 윤기가 ‘7’이라는 숫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같은 번호네. 윤기가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는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리 지어 있는 학생들에게로 걸어갔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달리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 존재감이 없던 윤기가 너무도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정확하게 자신들에게 걸어와서 였는지 많은 학생들이 자리를 비켜주며 갈라졌다. 7번인가 봐. 설마. 저 사람이 누군데.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윤기가 학생들의 중앙에서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이 사람이, 박지민이구나.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7번이에요?”
윤기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지민의 손에 들린 종이에 ‘7’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그려져있었다. 이 복잡하고 귀찮은 상황을 초래한 7이라는 숫자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 7 덕분에 능력 있는 센티넬과 함께 과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다 해도 노력해야 출세길이 열리니까 열심히는 하겠지. 윤기가 그 종이에 써져있는 숫자를 빤히 보다 자신의 종이도 꺼내 보여주었다. 윤기의 숫자를 확인한 지민의 얼굴은 평온했다.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보단 조용한 사람이 더 낫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어느 쪽이던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윤기가 종이를 다시 집어넣은 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다이얼을 켜 지민의 앞에 내밀었다. 번호를 교환하자는 의미였다. 지민도 윤기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 내 윤기에게 건넸다. 윤기가 자신의 번호 11자리를 모두 누른 후 이름도 함께 저장해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저장한다고 해도 뭐라 저장하지. 민윤기? 고민의 종류는 그런 것이었다. 그다 지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답이 확실히 보이지 않고 난감한 그런 고민.
“윤기 형, 맞으시죠?”
“내 이름 아네요?”
네, 뭐... 지민이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로 말 끝을 흐렸다. 윤기의 고민거리가 쉽게 해결되었다. 지민이 평소 자신에게 관심을 두었을 리는 없고, 단순히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외운 듯 보였다. 그거 꽤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인데. 센티넬이라 머리도 좋은가?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한 윤기가 이내 지민의 핸드폰을 되돌려주었고 지민도 윤기의 핸드폰을 도로 전달했다. 서로의 전화번호부에 ‘박지민’, 그리고 ‘민윤기 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번호가 새로 생겼다.
“만나서 과제하는 날짜는 문자로 연락드릴게요. 괜찮으시죠?”
지민의 물음에 윤기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 었다. 자신과 지민을 관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다. 자기 할 일 하고 팀 찾아서 가면 되지 왜 이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아... 살짝 심기가 불편한 속 마음관 다르게 윤기가 표정을 관리하며 긍정의 표시를 하자 지민도 눈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 켰다. 지민이 강의실을 나가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도 우수수 흩어져 자 신들의 짝을 찾아갔다. 갑자기 흩어지는 모양이 꽤 우스웠다. 사탕을 몰래 먹으려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퍼져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윤기도 자연스레 강의실을 빠져나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자신의 뒤에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이라고 부르는 거 상관없어요?”
윤기가 지민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웃긴 질문이기는 했다. 호칭은 딱히 상관없는 데. S 급 센티넬이 C 급 가이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며 선배 노릇해주는 것이 애초에 있는 경우긴 했나. 자신의 기억 속엔 없었다. ISGTU에서 나이, 학번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보다는 등급으로 학생들의 지위가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보단 센티넬이 어깨를 펴고 다녔고 C 급보단 S 급이 인기가 많았다. 막말로 지민이 자신에게 ‘야’라는 호칭을 써도 할 말은 없었다. 그게 이 학교의, 윤기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였기에. 많이 진화했다곤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편한 대로 불러요.”
윤기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강의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