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마신 다음 살포시 내려놓았다. 컵 주위에 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윤기가 카페 밖 먼 곳을 응시하다 음료를 한 모금 더 들이켜려고 하던 바로 그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민 씨, 윤기가 지민을 소리 내어 부르기도 전에 지민이 빠른 걸음 으로 윤기의 쪽으로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에서 있었던 수군거림과 비슷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조용하게 터져 나왔다. 대부분 지민에 관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가 만나러 온 남자, 즉 윤기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이 섞여있었다. 웅성거림이 꽤 컸기에 한 번쯤 그곳으로 눈길을 돌리거나, 혹은 신경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 둘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아닙니다. 사정이 있었겠죠.”
윤기가 지민의 말에 어깨를 가볍게 살짝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윤기가 마주한 지민의 모습은 누가 봐도 훈련을 하고 온 모양새였기 때문에 윤기는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 비록 C 긴 했지만 자신도 가이드였기에 주위에 있는 센티넬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로 가이딩을 원하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훈련 강도가 좀 많이 높았나 보네. 윤기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지민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컵을 발견하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시켜놓으셨네요?” “얼마 하지도 않는데요. 뭘.”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냥 가장 기본적인 거 시켰어요. 윤기가 덧붙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가볍게 집어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간단한 이야기가 끝난 둘 사이에 정적이 생기기 전, 윤기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그럼 시작할까요?
‘센티넬과 가이드의 페어링’ 이번 과제의 주제였다. 페어링이 이루어진 센티넬과 가이드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페어링 방법과 같은 것들을 연구하는 주제답게 짝을 이루어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윤기와 지민 모두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함께 과제 준비를 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평소에 잘 알고 지냈던 사이가 아니었기에 조금 어색한 감은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유하게 풀어지는 분위기에 둘은 문제없이 과제를 어느 정도 마칠 수 있었다. 손을 몇 번 스트레칭 한 윤기가 먼저 지민에게 일어나자는 표시를 하며 다 마신 빈 음료 컵을 집어 들었다. 지민이 윤기를 따라 일어나며 자신의 짐과 윤기의 짐을 챙겼다. 카페를 함께 나온 둘이 캠퍼스 안 기숙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만났을 때보단 분위기가 살짝 풀어져 있었다. 몇 시간 동안 함께 과제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의견 충돌 없이 나눈 것이 그 이유일 것이었다.
“기숙사 바로 들어간다 그랬죠, 지민 씨?”
“네. 형은 수업 들어가세요?”
조금 이따 출발하면 시간 맞을 거 같아요. 윤기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민이 윤기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빈 곳을 채우려는 느낌의 끄덕임이었다.
“시간 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괜찮은데....”
지민이 중얼거렸다. 살짝 부담스러운 느낌도 있었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것도 아니고. 한밤중이면 몰라 지금은 대낮인데. 심지어 한밤중이라고 해도 윤기보단 지민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민은 남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었으니까. 지민의 그런 생각들 이 무색하게 윤기가 어깨를 매우 간단하게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괜찮아요. 윤기의 말에 지민이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참 투명하네. 직진이라고 해야 하나. 지민이 윤기에 대 한 생각을 하며 계속 미소를 짓자 윤기가 그의 표정을 확인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웃음 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지민이 윤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말은 언제 놓을 거예요?” “네?” “난 형이라고 부르는데, 형은 계속 존댓말만 하잖아요. 우리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윤기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어서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민은 윤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끈질기게 물음을 던지기만 했다. 마치 정해진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면을 보면 직진하는 사람은 나인 거 같기도 하고. 윤기에게 꽤 곤욕스러운 시간이 흘러가고 이제는 지민이 자신의 이름에 ‘씨’라는 호칭을 빼고 불러달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응? 한 번만 불러주면 안 돼요, 형?”
윤기의 팔을 살짝 잡고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웃는 지민을 거절하기는 참 힘든 일이었다. 조금 어색한데. 윤기가 어쩔 수 없다는, 포기한 표정으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지민이 기대하 는 눈빛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의 목에서 ‘지민’이라는 이름이 온전히 나오려던 그때, 학생 하나가 지민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더 옆에 서있었으면 정통으로 부딪힐 뻔한 상황에 지민이 깜짝 놀라 윤기에게 더욱 가까이 붙었다. 살짝 빠르게 뛰는 심장을 서둘러 진정시킨 지민이, 자신이 윤기에게 딱 붙어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헛기침을 하며 몇 발자국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학생이 뛰어간 방향으로 일제히 달려가는 풍경이 펼쳐졌다.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 의 공기를 뒤로하고 윤기와 지민이 학생들이 달려간 곳을 바라보며 주위를 살폈다. 매우 어수 선한 모습에 지나가던 학생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판단하는 중이었다.
“4학년 센티넬이 폭주했는데 학교가 공급하는 가이드가 다 달라붙어도 감당이 안 된대요!”
한 사람이 소리쳤다. 주위에 있는 학생들이 모두 그 얘기를 듣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들도 어디에선가 흘려들은 내용을 한마디씩 던졌다.
‘A 급이라잖아.’ ‘지금 가이딩 가능한 가이드가 다 갔다며. S부터 C까지 전부 다.’
‘1시간째라고?’
윤기가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유심히 듣다 자신의 옆에 서있을 지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윤기의 시선에 지민이 걸리지 않았다. 깜짝 놀란 윤기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자 그곳에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앉아있는 지민이 보였다.
“지민 씨, 지민 씨! 괜찮아요?”
지민이 계속해서 몸을 웅크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기가 황급히 몸을 숙여 지민의 머리를 자신의 팔로 부드럽게 감쌌다. 불안정한 센티넬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윤기에게 느껴졌다. 외롭고, 분노하며,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상태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들이 아리도록 꽂히는 화살처럼 윤기의 심장을 관통했다.
S 급 센티넬은 자신의 심리를 탁월하게 조절할 수 있다. 상대를 속여 심리 상태를 거짓으로 전달할 수도 있고, 가이드가 자신의 상태를 모르게 숨길 수도 있다. 그런데 C 급인 윤기가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지민의 상태가 느껴지는 것보다 더,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민 씨, 하... 지민아.”
지민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손이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사색이었던 지민의 얼굴에 혈색이 살짝 돌아왔다.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이제, 이제... 괜찮, 아요. 가요.”
지민이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여전히 말을 잘 듣지 않긴 했지만 몸을 일으킬 정도는 되었다. 윤기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기가 지민의 안색을 살피고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었다. 지민의 눈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어가며 부드럽게 내려왔다.
“진짜 괜찮겠어?”
윤기가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다시 한번 지민에게 묻자 지민이 윤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살짝 웃어 보였다. 호선을 그리는 지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러나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드디어 말 놓았네요.”
지민의 말에 윤기의 긴장이 풀린 듯했다. 말 놓는 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아니면 그냥 나를 편안하게 만들려는 간단한 농담이었을까. 윤기가 마른 세수를 하고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조 심히 지민을 바라보았다. 윤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민이 그 시선을 확인하고 정말 괜찮다며 아까보다 좀 더 입꼬리를 올렸다. 그 끝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윤기는 그냥 모른척해주었다.
“기숙사 데려다준다고 했으니까, 가자.”
***
지민이 강의실에서 나오며 머리를 한두 번 헤집었다. 지민의 뒤로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야, 실전 능력 필기 좀 보여주면 안 되냐? 수업 존나게 지루해서 졸았어. 지민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빨리했다. S 급이라고 목에 힘만 들어가서 자기 몸 움직일 생각 없는 사람들은 딱 질색이었다. 지민이 시간표를 확인하며 주위 소리를 차단하려 애를 썼다. 귓속에 막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한다. 다른 소리들을 모두 무시하고 생각을 한곳으로 모은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 훈련을 받으며 배운 방법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몸 안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며 다음 수업을 위한 강의실로 이동하던 지민이 걸음을 천천히 멈춰 섰다.
저 멀리에서 걸어가는 윤기의 모습이 보였다. 항상 걷던 길인데, 사람 하나가 눈에 더 띈다고 달라 보이는 것이 참 이상했다. 왜 그전엔 발견하지 못했을까. 분명 같은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길들을 지나치며 스쳐 지난 적이 있을 텐데. 왜 과거엔 그가 이렇게 잘 보이지 않았는지. 지민의 동공이 살짝 커지며 윤기를 오롯이 눈에 담았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지민이 자신의 행동에 놀라 걸음을 뚝 멈췄다. 센티넬의 능력을 이런 곳에 쓸 줄은 몰랐네... 지민의 입에서 어이없는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고, 몸을 돌린 지민의 등 뒤로 이번엔 윤기의 시선이 천천히 따라붙었다. 이 시간에 실기 수업 가는구나. 윤기가 지민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서로에게 꽤 관심이 생기면 안 보이던 상대도 보인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윤기와 지민이 공통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
“오늘은 페어링 방법 조사하기로 했죠, 형?”
지민의 질문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저번에 과제를 함께하던 그 카페,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윤기의 자리 앞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시원한 땀방울을 흘리며 놓여 있었고, 지민의 앞엔 스무디 한 잔이 놓여있었다. 윤기가 새롭게 추천한 딸기 스무디였다.
“고대와 근대, 현대 페어링 방법에 관한 내용 대충 정리해 온 자료 있는데 확인해볼래?” “응, 좋아요.”
--------------------------------------------------------------------------- -고대의 페어링 페어와 페어링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던 시기인 고대에는, 끌림과 편안함을 느끼는 센티넬과 가이드끼리 자연스레 교제하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형태를 취했다. 결혼 생활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페어링이 이어지는 경우들이 있었다. 둘의 교감이 높은 상태에서, 센티넬의 기운이 가이드에게 많은 양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페어링이 진행되는 사례가 가장 많은 것 으로 알려졌다.
-근대의 페어링 근대에는 페어와 페어링에 관한 연구들이 점차 진행되며 센티넬의 능력 향상을 위해 인위적으로 페어링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가이드의 인권 향상을 위한 운동들이 많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센티넬과 가이드 보호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페어링을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양측 모두 자의가 아닌 경우, 기계를 이용해 둘의 피를 극소량 혼합하고 다시 주입하는 방법으로 페어링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
-현대의 페어링 현대에는 센티넬, 가이드를 위한 기관들이 다양하게 설립되어 있으며 연구 자료들도 방대한 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페어링 정도는 가이딩과 동일하게 스킨십의 정도와 정비례하게 향상된다. 교감이 진행되는 상태로 센티넬의 기운이 가이드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면 페어링이 5%의 확률로 페어링이 가능하다. 센티넬이 치아를 이용해 가이드에게 오랜 기간 마킹을 하는 경우 페어링이 30%의 확률로 페어링이 가능하다. 가이드가 센티넬에게 최대치의 가이딩 수차례 시도하면 50%의 확률로 페어링이 가능하다. 센티넬의 폭주 중 가이드가 센티넬의 안정 시까지 접촉을 지속하면 75%의 확률로 페어링이 가능하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피가 섞이면 99%의 확률로 페어링이 가능하다. 한 번 페어링이 맺어지면 99.9%의 확률로 복구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인 방법 말고도 페어링이 가능한 방법들은 상당수 존재한다. 페어 상대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센티넬은 이전보다 1000% 향상된 정도의 가이딩을 느낄 수 있고 가이드는 가이딩 이후 느끼는 피로감을 줄일 수 있다. ---------------------------------------------------------------------------
“형이 거의 다 해왔는데요? 여기에 조사 더하고 발표 자료 만들면 될 거 같아요. 저번에 해둔 거도 더하고....” 지민의 말에 윤기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머리를 몇 번 쓸어넘겼다. 칭찬에 꽤 약한 모습을 보인 윤기의 모습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지민이 그 모습을 보고 어색하게 웃다 앞에 놓여있는 스무디를 한 입 마셨다. 내 말에 이렇게 반응이 작은 사람은 처음 봤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맛있,네요. 형이 추천해 준 거.” “다행이네. 좋아해서.” “아, 형 다음 시간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마인드 컨트롤.”
윤기의 말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 교수님?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같은 수업이네요. 왜 그동안 형 못 봤지....’’ “내가 워낙 조용하게 혼자 다녀서 그런 거 아닐까. 지민이 너는 항상 인기 있었고.”
윤기가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지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민은 확실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S 급 센티넬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도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
윤기와 지민이 함께 강의실로 들어갔다. 윤기가 먼저 앞장섰고, 강의실 한쪽 지민의 친구들을 확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지민이 편히 친구들과 앉을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아주 먼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우 가깝지도 않은 자리 선택에 지민이 멈칫하곤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같이 앉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그렇게 앉는다면 서서히 물들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윤기에게나, 지민 자신에게나 들켜버리는 것 같았다. 몇 번 봤다고 내 마음이 이러나. 웃긴 것도 있었다.
윤기와 지민이 자리에 착석한 후 다른 학생들도 순차적으로 강의실에 들어왔다. 많은 학생 들이 지민의 가까이에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늦게 들어온 학생들은 지민의 주위에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매우 아쉬워했고, 일찍 강의실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승리의 미소를 띠었다. 교양과목은 센티넬과 가이드가 등급 상관없이 듣는 과목이라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한 거 같았다.
“사람이 왜 모여있나 했더니, 또 박지민이야?”
그때 강의실 한구석에서 꽤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잣말이라기엔 너무 누구나 들을 수 있게 의도한 말이었다. 윤기가 그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린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지민은 그 상황이 익숙한 것인지 별 반응을 하지 않고 강의실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지민이 대응을 하지 않아서인지 볼멘소리를 뱉어낸 가이드가 다시 한번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누구 센티넬은 팔자 좋겠네~”
정확하게 지민을 겨냥한 말이었다. 말을 꺼낸 그 가이드의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키득거렸다. 모두 지민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윤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지민은 여전히 정면만 응시 중이었다.
“S 급부터 C 급까지 다 자자고 달라붙어서.”
윤기가 피식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부러 심기를 긁으려고 작정을 하네. 어떻게든 반응해 주기를 기다리고, 그것을 빌미로 몰아가고. 그럼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지. 윤기가 방금까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얘기하던 가이드를 향해 물었다.
“가이드건 센티넬이건, 입만 살아서 좋을 건 없지 않나?”
방금까지 의기양양한 표정의 가이드의 미간이 좁혀지며 썩어들어갔다. 윤기의 얼굴을 아래 위로 훑어 확인한 가이드가 헛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 어쩌라는 겁니까. 보니까 C 급인 거 같은데 가만히 있지?” “본인은 A라 다르다고 생각하나본데 급부터 따지기 전에 인간이 돼야지.”
그 가이드의 얼굴이 이제는 붉어졌다. 볼부터 시작해 귀, 그리고 목까지 빨개진 것이 우스웠다. 윤기가 흔들리지도 않는 눈으로 가이드를 똑바로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주위의 학생들도 윤기의 모습에 긴장한 듯 보였다.
“A라는 거 빼면 뭣도 없는 사람이 남 판단하는 게 좀 우습네.”
윤기가 말을 마치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주위 학생들이 이젠 그 가이드를 향해 비웃음을 보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가이드가 분한 마음을 표현하며 윤기에게 따지기도 전에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윤기에게로 달려나가려고 몸을 움찔 거리던 가이드는 머쓱하게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윤기가 그럴만한 용기도 없는 가이드 를 바라보며 애처롭다는 표정을 한 번 지어주었다. 너 같은 새끼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수도 없지.
“오늘은 마인드 컨트롤 실전을 해볼 겁니다. 여기 있는 MCM (Mind Control Machine)을 이용해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배운 내용들을 직접 확인해보는 수업입니다. 학생들 개개인에 맞는 강도로 진행할 것이고 평가에 들어가지 않으니 편하게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인간의 뇌에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주입한 후 그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MCM을 이용한 수업의 중점이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능력이 있더라도 실전, 전쟁에 투입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조종하고 잘 억누르지 못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앞장서는 센티넬에게 꼭 필요한 수업임은 물론, 혼란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진행해야 하는 가이드에게도 필수적인 수업이었다.
“MCM에 관한 이론 알아보고 간단한 휴식 시간 후에 바로 본격적인 수업 들어가겠습니다.”
MCM에 관한 이론 수업이 이어졌다. 신기술을 이용한 기계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기에 모든 학생들이 고도로 집중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론 수업 시간이 흐르고 짧은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교수님이 잠깐 강의실을 나가시고 학생들이 MCM 주위로 서서히 몰려들었다. 간단한 외관을 띠고 있었지만 인간의 뇌를 이용한 기계였기에 누구 하나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 하고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아까 지민을 모함했던 학생과 그와 친한 여러 학생들이 MCM에 몇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들끼리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멀어졌다. 윤기가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느낌만으로 상황을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찝찝한 시간이 지나고 MCM을 직접 쓰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컨트롤에 조금 더 능숙한 S 급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지민의 이름이 제일 먼저 불렸고 첫 번째로 MCM을 이용하는 학생이 되었다. 지민이 목과 어깨 쪽을 움직이며 몸을 한두 번 풀고 무표정인 상태로 기계 앞을 향해 나아갔다. MCM에 연결되어 있는 의자에 앉은 지민이 눈을 감았다. 훈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집중하는 것 같았다. MCM이 위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고 지민의 머리 위에 약한 불빛들이 떠다녔다. 그의 머릿속의 약점과 불안감들을 찾아내어 극대화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기계는 설정에 따라 증폭의 정도를 조정할 수 있었는데 1에서부터 100까지 변경이 가능했다. 100으로 갈수록 그 정도가 커졌고 어려워졌다. 지민이 비록 S 급이긴 했지만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학생이었기에 심하게 높은 강도는 버거운 상태였다. 또한 잘못하면 폭주, 혹은 심정지까지 올 수 있는 꽤 위험한 훈련이었기 때문에 강도 설정은 민감한 문제였다.
75로 설정된 기계 확인이 끝나고 본격적인 마인드 컨트롤 훈련이 시작되었다.
지민의 머리 위에 떠다니던 불빛들이 모아져 더욱 환하게 빛나며 반짝거렸다. 지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정신을 한곳에 집중했다. 눈앞에 동생의 잔상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지난날의 기억들이 울렁이며 다가오고 고개를 몇 번 저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노력한 지민이 오른손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이 화끈거리며 불이 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참아내야 했다. 능력을 조절해야 한다.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그때 갑자기 지민의 머리 위에 있던 빛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내 그의 체온이 순식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MCM에서 전기가 튀며 그 잔상이 날아다니고 지민과 가까운 곳 에 놓여있던 책상과 의자가 쪼개졌다. 쩌저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기구들이 괴로운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강의실 뒤로 주춤거리며 도망 갔다.
“다 대피해!!!”
소리치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모든 학생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코드 레드입니다. S 급 센티넬 폭주. 반복합니다. S 급 센티넬 폭주. B-3 강의실에 가이드 지원 바랍니다.’
긴급 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폭주 센티넬 억제 분사형 약을 가져오기 위해 교수님께서 강의실을 급히 빠져나가자, 상황을 살피며 눈치를 보던 윤기가 갑자기 지민에게로 달려갔다. 강의실 밖에서 학생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윤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넓은 보폭으로 순식간에 지민 가까이에까지 다가간 윤기가 지민을 끌어안았다. 위험한 것, 알고 있었다. 무모한 짓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한순간의 판단으로 인해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더욱더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였으니까.
“민윤기!! 미쳤어?”
아직 건물을 빠져나가지 않은 학생 한 명의 목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윤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민아, 나 봐. 여기 집중해 봐. 응? 너 할 수 있잖아.”
윤기가 지민의 볼을 가볍게 감싸고 입술을 맞붙였다. 윤기의 눈이 가만히 감겼다. 살갗이 태양에 그대로 노출된 듯 모두 타들어갈 것 같이 뜨거워지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 평온해졌다.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지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벌린 윤기가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말랑한 입술 사이로 뜨거운 살덩이가 부드럽게 자리했다. 동시에 윤기가 그의 반대 손으로 지민의 손을 잡고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손가락이 사이사이로 얽혀들어가며 윤기의 손등 위에 지민의 손톱이 깊게 박혔다. 그리고 그다음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따랐다. 윤기의 온 신경과 정신이 지민에게로 쏠렸고 그와 동시에 서로의 혀가 얽히고 타액이 이리저리로 엉켰다.
“괜찮아, 괜찮아 지민아.”
지민의 숨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윤기의 손길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둘의 몸이 하나가 된 것처럼 가까이 붙었고 환한 빛이 그들의 주위를 감쌌다. 고막이 찢어질 듯 높은 소리가 윤기의 귓가를 타고 들어가 머릿속을 괴롭혔다. 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금이 갔던 책상이 산산조각 났다. 윤기의 손에서도 피가 흘렀다. 지민의 손톱이 끝을 모르고 그의 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기는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지민을 붙잡아 주었다.
“박지민.”
윤기가 낮은 목소리로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계속해서, 속삭이듯 지민의 귓속에 그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내, 온 세상이 백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