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좀 들어요?”
윤기가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온 세상이 백색이었다.
“본인이 누군지 알겠어요?” “민, 윤기...요.......” “많이 혼란스러운 거 압니다. 본인은 S 급 센티넬을 가이딩하다 잠깐 혼절한 거뿐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가이딩, S 급 센티넬... 백색,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빠졌을까, 무언가 빈 자리인 것 같은데...... 그게 무얼까.
“박지민.”
빠진 조각을 찾아냈다.
“박지민. 지민이, 괜찮나요?”
“폭주 센티넬 말하는 거죠?”
윤기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지민이 진정되었거나 심정지로 인해 급사했거나... 두 가지일 텐데. 제발, 제발. 윤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옆 병실에 누워있어요. 보러 갈래요?”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다른 말은 필요없었다.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 결과입니다. 두 분 건강 상태 확인을 위해 피를 체취 후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는데 꽤 긍정적인 결과가 나와서 알려드리려고 해요.”
윤기와 지민이 손을 꽉 맞잡았다. 그렇게 잡고 있는 것이 1시간 째였다. 윤기가 일어나자마자 지민을 찾아갔고 지민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몇 시간가량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이례적인 일이에요. 폭주하는 S 급 센티넬을 가이딩한 C 급 가이드가 살아남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장기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치료 불가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죠.”
지민이 침을 한 번 삼켰다. 윤기가 안심하라는 의미로 지민의 손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의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멀쩡한 몸 상태에서 알 수 있다시피, 윤기 씨 몸은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게다가 검사 결과 둘의 매칭 정도가 매우 높게 나왔어요. 역시나 S 급 센티넬과 C 급 센티넬 사이에선 힘든 일입니다.”
지민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윤기도 그것에 보태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지민의 폭주를 멈춘 것은 윤기였다. 마지막에 분사형 약품이 뿌려지긴 했지만 그것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항상 약만 복용하던 지민에게 100%에 가까운 가이딩은 매우 안정감을 주었고 폭주를 멈추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윤기는, 검사 결과 특이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높은 가이딩에 성공하면 센티넬의 급이 어떻게 되든 페어링이 이루어져 센티넬에게 완벽한 가이드가 되는 매우 희귀한 형질이었다.
‘가이딩이 상당히 잘 된 사례라 아마 이미 둘은 페어가 되었을 겁니다. 민윤기씨는 페어링 된 상대에게 S 급 가이드보다 뛰어난 가이딩을 제공 가능하고요. 박지민 씨는 이제 페어링 된 상대가 아닌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고, 거부 반응이 없다 해도 원만한 가이딩이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둘이 그러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서서히 페어링의 영향을 줄여나가는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 확률이 높진 않지만 서로에 대한 영향을 억제할 순 있죠.’
의사의 말이 둥둥 떠다녔다. 둘 밖에 없는 병실 안의 공기가 살짝 어색했다. 그러나 손은 아직 맞닿아있는 상태였다. 머뭇머뭇거리던 윤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원하면, 기숙사는 붙여주고, 아니면, 따로 가는 거지.”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말이 뚝뚝 끊겼다. 심호흡을 한 번한 윤기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는 너랑, ” ... “같이 가고 싶어. 너만 원한다면.” “나는 너 좋아하거든.”
윤기가 말을 뱉은 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긴장과 걱정을 씻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맞붙은 손이 살짝 떨렸다. 윤기의 눈이 진정하게 빛나고 있었고, 또한 지민의 진정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지민이 고개를 살짝 숙여 표정을 관리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기를 바라보았다. 지민의 눈도 한없이 깊고 맑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나도 좋아해요 윤기 형.”
지민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윤기도 그의 표정을 보고 따라 웃었다. 모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단단하게 굳었던 얼음이 깨지기 전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처럼. 윤기와 지민이 서로를 바라보고 가벼운 키스를 나누었다. 살과 살이 맞닿을 때마다 뜨거운 자취를 남기며 달콤한 말들을 속삭였다. 지민이 윤기의 아랫입술을 물고 핥으며 장난을 치다 조용히 말했다.
“나 지금 기분 좋은데 이거 가이딩이에요?”
몸이 가벼워서 날아갈 거 같고, 그러면서 심장 한 쪽은 간질거리다가 채워지는 느낌이 너무 따뜻한데. 이대로 이 순간에 빠져 죽어도 행복할 것 같은데.
...
“아니, 사랑이야.”
***
ISGTU의 기숙사에는 센티넬동, 가이드동, 그리고 공동입주동이 있었다. 공동입주동에는 대학생활을 하다가 자연스레 사귀고 그로 인해 페어링이 된 커플들이 입주했고, 일적으로 붙어 살게 된 국가 가이드와 학생 신분의 센티넬도 입주했다.
윤기와 지민은 페어링이 된 커플 신분으로 공동입주동으로 방을 옮기게 되었다. 장소가 학교일 뿐이었지 말하자면 동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겨우 새로운 기숙사로 들어온 윤기가 옷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 앉아 손톱을 살짝 물어뜯었다. 지민이 곧 있으면 기숙사로 돌아올 것이다. 어떻게 어떤 표정으로 맞이하지? 윤기에겐 꽤 중요한 문제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함께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는데 주체가 될 마음이 아니었다. 윤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볼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민이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지고 윤기가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곧게 핀 다음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지민아, 왔어?”
지민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는 윤기를 발견하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지민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의 등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입고 갔던 옷이 온통 땀에 절어 몸의 윤곽을 모조리 드러내고 있었다. 지민의 입을 드나드는 호흡이 멀리 서도 들릴 정도로 거칠었고 불규칙했다.
“실전, 훈련 들어갔었어...?”
윤기가 조심스럽게 묻자 지민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지 민의 상태에 윤기가 본능적으로 그를 껴안았다. 원래 약을 복용하며 상태를 지속하던 지민이었는데 페어링이 맺어지고 난 뒤 상황인 현재, 가이딩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지민의 몸과 윤기의 몸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맞닿았다.
“지금 가이딩하면, 형 다쳐요....”
“지금 가이딩 안 하면 네가 다쳐.”
지민이 윤기를 밀어내려 손에 힘을 주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윤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민을 끌어안았다. 네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해. 널 안 아프게 할 수 있는 게 난데 내가 어떻게 널 그냥 둬.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윤기의 토닥임이 그렇게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지민의 몸에서 힘이 점점 빠졌다. 아무런 저항 없이 윤기의 몸을 받아들이고, 또 그 자 체를 원했다.
윤기가 가이딩을 시작했다. 따스하면서도 화한 느낌이 지민의 몸을 감싸며 뼛속까지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이곳저곳 들어차는 생기 있는 느낌에 지민이 윤기의 품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가며 안정을 되찾았다.
“더 해줘요. 응?”
지민이 애닳은 표정으로 윤기를 올려다보았다. 지민의 숨이 아직 거칠었다. 폐 깊숙한 곳부터 들끓는 불안한 숨소리가 낮게 깔려있었다. 윤기가 지민을 불안한 상태를 온몸으로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똑바로 가이딩을 해주어야 한다. 지민이 덜덜 떨리는 팔을 윤기에게 휘감으며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맞추었다.
두 번째 키스였다. 둘 다 제정신에서 온기를 나누는.
아직 안정을 되찾지 못한 지민이 급하게 입술을 깨물고 자국을 남기려 하자 윤기가 지민을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그리고 지민의 입술을 핥아 맛보듯 조심스럽게 머금었다. 무언가 쌉싸름한 맛이 맴돌고 지민이 이번에 손을 살짝 내려 윤기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분명 윤기가 지민을 채워주는 중이었는데, 윤기의 빈 곳에 지민이 들어차며 스며들고 있었다. 한참 동안 둘의 체온이 섞이고, 지민이 가쁜 숨을 내쉬며 윤기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어냈다. 윤기의 아쉬운 듯이 입술이 따라오다 떨어졌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겨우 진정되었지만 다른 곳이 가라앉지 않아 볼을 붉게 물들인 지민이 윤기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도톰한 입술도 매우 매력 있는 다홍색이 퍼져있었다.
“형이 이게 사랑이라고 그랬죠?”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민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그의 손이 아주 살짝씩 흔들리고 있었 다. 떨리는 손에 윤기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간질거림이 참 좋았다.
“나 형 사랑 더 느끼고 싶은데... 그래줄래요?”
“방으로 갈까?”
윤기와 지민의 심박수가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조차도 이젠 어색하지 않은 것이 참 신기했다. 아무 말 없이도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다 읽은 것 같았다. 둘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맞붙었다. 마치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인 것처럼. 지민의 몸이 윤기를 부드럽게 받아내었고 윤기의 속삭임이 지민의 속으로 파고들어 깊숙이 자리했다. 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거칠 고도 부드러운 쾌락이 따라왔다. 윤기의 손길이 깨지기 일보 직전인 피사체를 다루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졌다. 지민의 손톱이 윤기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밑으로 타고 내려오며 자신의 흔적을 곳곳에 새겨 넣었다. 둘의 입술이 서로의 흰 살에 숨결을 불어넣을 때마다 붉은 울혈을 그리며 끝없는 애정을 말했다.
사랑이 속삭이는 따스함 그 위에서 둘의 몸이 몇 번이고 꼭 그대로 맞붙고, 제자리를 찾아 갔다.
지민이 윤기의 속눈썹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이 사람이 제 앞에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생기가 도는 이 생소한 느낌도 마찬가지로 너무 신기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민은 자고 있는 윤기의 얼굴을 대략 한 시간째 보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사실 윤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가슴을 진정시키고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윤기를 관찰했다. 내가 형한테 사랑해달라고 달라붙었고, 함께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마도 남은 평생 동안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지민이 윤기의 팔을 자신의 몸에 두르고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윤기도 잠결에 지민의 몸을 자신에게로 더 당겨 안아주었다.
“...깼어?” “응, 잘 잤어요 형?”
지민이 윤기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윤기가 웃으며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지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형, 좋아해요.”
윤기가 지민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자신의 가슴에 아직도 얼굴을 묻고 있는 지민을 살짝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지민은 더욱더 깊이 윤기에게로 파고들었다. 지민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이 가이딩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 윤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이딩 해줄까?”
윤기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세차게 몇 번 저었다. 지민의 심장이 밖으로 나올 것처럼 크게 두근거리며 뛰었다. 이 소리가 바로 제 옆에 있는 윤기에게 들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아 니라, 온 세상에 울려 퍼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들 정도로 기분 좋게 떨리고 있었다.
“좋아해요 윤기 형. 형이 내 가이드로 잘 맞아서가 아니라.”
“......” “민윤기를, 좋아해.”
윤기의 심장이 지민의 것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튀어 올랐다. 두 따뜻한 심장이 만나 서로를 어루만질 것 같이 반짝였다. 지민이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윤기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별이 박힌 듯이 반짝였고 그의 볼이 여전히 예쁜 색을 띠며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윤기가 열이 오른 지민의 얼굴을 살짝 만져주며 가벼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난 너 사랑해, 박지민.”
윤기의 눈이 진실하게 빛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실한 빛을 담고 지민을 담고 있었다. 입술에 걸쳐서 뱉기 간지러운 말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려 몸부림쳤다. 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마침내 지민을 뱉었다.
“너도 날 사랑해 줘.”
윤기의 고백에 지민이 웃음기를 띠며 윤기의 가슴을 꾹 눌렀다.
“글쎄요? 사랑은 아직.” “넌 이제 나 없이 못 살잖아.”
윤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눈이 짝을 잃고 홀로 남은 외로운 맹수처럼 흔들렸다. 제 앞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이 사람이, 가이드가, 자신의 연인이 민윤기라는 사실이 만족스럽게 다가왔다.
“이제 내 사랑 없이 못 사는 건 형이에요.”
윤기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지민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오늘만으로 온기를 몇 번이나 함께 나누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로 죽고 못 사는 거, 꽤 괜찮네.”
***
“USB 챙겼어요 형??” “어, 프린트한 거 가방에 넣었는데 확인했지?”
“네. 갈까요?”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준비한 페어 수업의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함께 살게 되며 편한 시간 언제든 상의를 하고 발표 연습을 할 수 있었기에 어려운 일은 없었다. 준비도 완벽했다. 손을 꼭 붙잡고 기숙사를 나온 윤기와 지민이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바람이 둘을 감싸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우리 수업 끝나고 커플링이라도 맞추러 갈까요?”
“커플링? 그럴까?”
그러자. 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지금처럼 사랑하면서 지내자.
“그래서 우리는, 이제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가 어떠했든,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발전해야 하며 서로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미래의 페어는 사랑의 형태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더욱 강하게도 만듭니다. Fair 2 Pair (페어 투 페어) 이것이 저희가 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함께 페어를, 짝을 맺기에 충분하며 타당합니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린 센티넬과 가이드가 아닌 상대를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한 존재로서 빛날 수 있습니다. 그렇 게 ‘둘’이 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윤기와 지민이 인사를 하고 질문을 몇 가지 받은 후 자리로 돌아왔다. 열심히 준비한 것에 비례한 결과도 뒤따랐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기쁘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윤기가 지민에게 수고했다는 눈빛을 보냈고 지민도 웃음으로 그 에 화답했다. 꽤 행복한 해피엔딩이네. 윤기와 지민이 동시에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뭐, 해피엔딩이다 그런 건가? 왜 그렇게 감싸고도나 했더니 꼬셔서 뒹군 사람이 여기 있었네.”
지민이 한숨을 쉬며 윤기의 소매를 붙잡았다. 둘은 A+를 받고 수업이 끝난 후 강의실을 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민을 욕했던 가이드에게 또, 발목이 붙잡혀있는 중이었다. 왜 자꾸 이렇게 시비를 걸까. 지민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윤기가 지민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고 몸을 살짝 돌려 조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가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C라서 호구로 보이는 건지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뭐로 보이는 건지. 머리 빈 건 알았는데 이렇게 티 낼 줄은 몰랐는데.”
남자가 윤기를 보며 손가락으로 몇 가지 모양을 만들었다.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동그란 외향을 만들었고 왼손의 검지로 그 사이를 다녀가는 표시를 했다. 딴 건 모르겠고 이거엔 관심 있는데. 노골적인 의미에 윤기의 얼굴이 더욱 차게 굳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윤기가 혀로 입안의 연한 살들을 몇 번 훑고 생각을 정리했다. 열이 올랐던 머리가 서서히 식으며 윤기가 평소의 냉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의 표정보다 더 당당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띤 윤기가 고개를 숙였다가 눈을 치켜뜨며 무식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가이드를 노려보았다.
“내가 MCM 조작했다,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고 싶은 건가?” “뭐??” “가이드니까 증폭 설정을 스스론 못할 거고. 요즘 센티넬 하나랑 같이 다니는 것 같던데, 네 말마따나 꼬셔서 뒹군 다음에 부탁한 건가?”
정곡을 찔린 것인지 말문이 막힌 가이드에게 어깨를 몇번 으쓱거린 윤기가 지민의 허리를 감싸고 몸을 서서히 돌렸다. 뻔한 결과였다. 그러게 왜 안 되는 머리를 굴려서.
“퇴학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그동안 더 잘 즐겨둬. 아, 손잡고 같이 퇴학 당하면 남는 게 시간이라 더 뒹굴 수 있으려나?”
윤기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는 가이드가 손을 덜덜 떨며 소리를 질렀다.
“다, 다 박지민 때문이라고. 씨발 걔가 센티넬으로 태어나서!!! 나는 좆같은 가이드라서 안 되고 잘나신 그분은 다 가졌지.... 아아아악!!!!!!” “세상 원망하기 전에 네 인생이나 돌아봐. 노력은 했는지.”
윤기가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광경을 구경하던 학생들도 흘끗 거리며 피폐해진 가이드의 모습을 몇 번 더 쳐다보다 떠나버렸다. 복도에 남은 것은 이제 그 가이드 하나밖에 없었다.
“그다음 시간 뭐예요 형?” “전공 하나. 넌 다음 시간 훈련 들어가야 하지 않아?”
“네. 전투 실전 있어요.” “데리러 갈게.”
윤기가 지민을 보며 웃자 지민도 윤기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캠퍼스를 걷던 둘이 손을 더욱 꽉 고쳐잡았다. 함께 잡은 손은 언제나 따듯했다. 서로 닿으면 불꽃이 이는 것처럼.
“형은 나 안 무서워요?” “응? 뭐가.” “그냥... 잘못되면 폭주하고, 훈련 다녀오면 만신창이고 그렇잖아요.”
지민의 말에 윤기가 생각을 더듬으며 자신의 머릿속 지민을 그려보았다. 처음 말을 나눈 날 부터, 함께 과제를 했던 날과 지민이 폭주한 날. 그리고 같이 살게 된 지금까지.
“난 내 앞에 있는 사람밖에 안 보이는데.”
“.......” “예쁜 사람.” “그, 그게 뭐예요 형.”
윤기가 시원하게 입을 틔고 웃자 지민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윤기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윤기가 지민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아 빼내지 못하게 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꽤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지민아. 너 가이딩 필요한 거 아니야 지금? 얼굴 빨개.”
“형이... 그런 말을, 하니까.”
지민이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윤기의 팔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꼬집었다. 윤기가 팔을 내어주며 더욱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지민이 그 표정을 빤히 바라보더니 잠깐 생각을 해 본 후 윤기를 따라 웃음을 머금었다.
“가이딩 필요하다 그러면 지금 해줄 거예요?”
“응. 네가 감당 가능한 정도만.”
으음... 지민이 입술을 몇 번 꾹꾹 누르며 여러 가지 대답을 떠올렸다. 알고 보니 은근 능글맞은 형 머릿속엔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까.
“내가 감당 가능한 정도가 어느 정도인데요 그럼?”
“그건 해보면 알겠지.”
말을 끝으로 윤기의 입술이 지민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켜들어갔다. 영화에서 나오는 연인들이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살을 맞대는 것처럼. 지민이 곁눈질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생각했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사람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넘실거리며 부드러운 느낌이 지민에게 타고 들어왔다. 사실 이제는 이 사람이 좋아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가이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한참 진득하게 혀를 섞은 윤기와 지민이 입술을 천천히 떼어냈다.
“잘하고 와 지민아.” “이따 봐요, 형. 다 이기고 올게.”
윤기가 지민에게 가볍게 키스를 한 번 더 해준 다음 손을 흔들었다. 지민이 걸음을 옮기고, 또 멀어졌다. 여러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는 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많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민만 환하게 보였다. 눈에 가득하게 들어찼다. 몇 시간 있으면 다시 볼 사람인데도 참 애틋했다. 그렇게 한참 지민을 눈에 담던 윤기가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자신의 수업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윤기가 몸을 돌렸을 때 지민이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사랑해. 나의 센티넬, 나의 박지민. 그리고 나의 가이드, 나의 민윤기. 우리는 둘이 함께하여 페어가 되기에 온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