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어쩐지 편안했고, 가슴께는 푸근했다. 마치 강아지가 한 마 리 올라온 느낌. 눈을 뜨니 강아지가 아니라 이불이 덮어져 있었다. 놀라 옆을 보니 민윤기는 없었다. 이불은 확실하게 정돈되어있고 어딘지 모르게 편안했다. 갑작스럽게 놀라 팔을 휘적 이며 핸드폰을 찾는데, 국자를 누군가가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헤집으며 지민은 핸드폰을 들고 의자 위에 앉았다. 윤기가 콩나물국을 끓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몇 분을 머뭇거렸을 때 콩나물국에 국자를 넣어 간을 보 는 민윤기가 눈에 띄었다. 저기...하고 말을 걸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잠겨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삑 거리면서 비밀번호를 두 번 정도 틀리는 굉음이 들렸다. 잠금장치가 좀 된 거라고 했던가. 아니, 그런 말은 없었는데. 지민은 갑작스레 무서워져서 윤기의 손이라 도 잡고 싶었다. 그 손을 품 안에 품고 있으면 좀 안심이 될 거 같아서. 그런데 마침내 세 번 째에는 문이 열렸는데, 그다지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어, 윤기야.”
“...지연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반찬...좀 주려고. 밥 잘 안 챙겨 먹으니까...근데 요리는 언제 배웠어?”
요리를 언제 배웠냐는 말에 혹시 오뚜기 3분 콩나물국 이딴 거라도 있을까 지민은 쓰레기통 을 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가뜩이나 엉망진창으로 잘린 콩나물은 보였어도 말이다. 윤기는 지연의 말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듯이 보였다.
“지민이가 잘 해줘?”
“어, 애가 요리를 참 잘하더라고. 이것도, 어제저녁에 지민이가 끓여준...거야. 그냥 내가 데우고 있었어. 어제저녁에 우리 둘 다 술에 꼴아서.”
방금 이름만 불러줬다. 지민은 사소한 것에 콩닥거리는 제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설렜다. 왜 점점 나를 애타게 만드는 걸까.
“...같이 술이라도 마신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좀...겹쳤을 뿐이야.”
“오빠 나한테는 이런 거 별로 안 해줬잖아.”
“그전에는 시간도 없었고 노력도 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은 이제 나름 여유가 생겨서.”
그는 머리를 헤집다 그릇을 꺼내 콩나물국을 담았다. 콩나물 포장지는 옆의 쓰레기통에 흘리듯이 버리고서 두 그릇에 양껏 부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아 줬다. 지민은 제 까치집이 부끄 러워서 어떻게든 손으로 머리를 누르다, 숟가락으로 콩나물국을 한 번 떠서 먹었다.
“그래? 잘됐네.”
“어...그렇지.”
“근데 지민아.”
“어 누나.”
“너 한 번도 나한테 감사하단 말을 안 했더라.”
귀를 봤다. 역시나 흰 이어폰이 스쳐 지나가듯 보였다. 지민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 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순간.
“화장실 자취에서 구원해준 거, 고맙게 생각해.”
지민은 결국 거지꼴로 이어폰을 빼 제 귀에 꼈다. 지연은 당황해서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당하고만 사는 건 질렸다. 이젠 뿌리를 뽑아 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들 아침에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박지우.”
“....”
이어폰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옛날의 나를 사랑해주던 그 끈끈한 혈연은 이제 없다는 뜻이었다. 고작 쓸데없는 애정 하나에 부서지고 말다니. 지민은 박지우를 이해하 기 싫었고, 더는 화해를 하기 위해 애쓰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자 이제.”
별말 없이 통화는 끊어졌다. 지연은 윤기 앞에서 어쩔 줄 몰랐다. 윤기는 황당해서 그 상황 을 보고만 있다, 지민의 어깨를 한두 번 툭툭 쳐 주면서 의자에 앉았다. 지연은 윤기를 흘겨 보다 바로 집을 나갔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지민은 이어폰을 쓰레기통에 던 졌다. 아마 적막만이 흘렀다.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말 안 해줄 거죠?”
“...심각한 건 아니에요.”
할 말 다 해서 속이 참 후련한 듯이 보였는데. 꾹 참았던 눈물들이 나오려고만 했다. 바보 같았다. 윤기는 휴지를 건네주며 콩나물을 하나 더 먹었다.
“지연이가 나쁜 사람 같아요?”
지민은 눈물도 닦지 않았다. 휴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밥알의 개수를 세기 바빴다.
“...윤기 형이 보기엔 어때요?”
“나는 저런 점이 좋아서 사귀기로 했었던 건데요. 자기 말만 하고 바로 상황 누르는? 약간, 자기주장이 또렷한 거 있잖아요.”
“...지연 누나를 버릴 거예요?”
윤기가 이미 지연의 거짓을 눈치챘다는 걸 지민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윤기는 지민을 애 정 섞인 눈으로 바라볼 생각이 들지 않는 듯이 굴었다. 마치 애처럼. 한순간에 지민은 윤기의 트랩에 걸려든 거다.
“난 아직도 저 사람이 좋아요.”
윤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밥그릇을 싱크대에 던져넣었다. 만약 그릇 던지는 소리가 좀 성가 셨다면 출근 시간에 살짝 늦어서. 라고 핑계를 대고 싶었다. 지민의 기분 따위.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지민의 곁을 슬쩍 지나가며 몸이 조금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어깨 위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나. 이렇게 사랑을 다들 버려봤을 것, 하고 자위를 잠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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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왜 이렇게 덥냐?”
“...그러게. 진짜 죽겠다.”
“너 더운데 오래 있음 안 되잖아. 오늘은 오전 타임만 좀 꽉 찼지?"
“어...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에어컨이 고장 나고 지랄이네.”
“약은 먹었냐?”
“...그럴 리가. 돈도 없는데. 3년 전부터 우편함 텅 비어있길래 그냥 관뒀다.”
“이러다 쓰러지면 병원 데려다줄게. 그니까 사례비로 나중에 밥 사.”
“미친놈.”
지민이 그에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태형은 별말 없었지만, 지민을 은근 주시하고 있었다. 애당초 태형이 지민의 부나 누이에게 흘려들었던 말들은 똑같았다. 박지민이 쓰러지면 너밖에 없다고. 그 말을 굳게 담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많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밥을 사냐.”
“강의실은 여기보다 조금 뜨끈할 거다? 거긴 그래도 안쪽 자리 앉으면 되니까.”
“나 같으면 니가 쥐고 있는 그 선풍기 주겠다.”
“안 돼. 애 나랑 결혼했어. 오늘 애도 입양할 거야. 애는 너 줄게.”
“지랄도 유분수지. 가라.”
태형과 굿바이를 나눈 지민은 살짝 벌게진 목 부근을 벅벅 긁었다. 모두가 더위에 벌벌 기었 다. 선풍기를 임시방편으로 달긴 했지만, 아직도 이런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맨 뒷자리에서 가방에서 낡은 부채를 찾아 부쳤다. 손목만 아팠지만 나름 쓸만 했 던가.
“여러분도 더울 겁니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네요. 학교에서 중요한 손님을 모신다고 해서. 그걸 하는데 돈을 조금 많이 쓰는 바람에 오늘 하루만 에어컨을 못 틀게 됐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씨발.”
욕이 나온다. 안 나올 수가 없다. 전공 책 페이지에 얼굴도장 찍게 생겼다. 머리는 어지러운 데 몸은 이상하게 차갑고, 오한이 서리지만 한 편으로는 너무 더웠다. 왜 하필 오늘같이 폭염 주의보가 뜬 날에 에어컨이 저 모양이 된 걸까.
고장 났다는 건 그냥 허울 좋게 말한 것뿐이고, 이사장이 귀빈 대접에 좀 비싼 걸 썼나? 학 교 비리가 워낙 약해야지. 다들 알 건 다 안다. 아마 이 더위에 사람이 기절해도 뉴스 기사 한 줄도 안 뜰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 주인공이 내가 되게 생겼다는 말도.
지민은 결국 강의실에서 두 시간을 버티다가 윤기에게 15분 정도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12 시 반쯤 됐다. 하필이면 오늘 고장 나버린 걸까. 이판사판이다. 에어컨 틀어놓고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받은 상처가 아직도 저물지 않아서 그렇다. 이유를 대자면 구차 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란 본래 사소한 것에 심하게 극단적이니까.
“...윤기 형.”
“어, 지민아.”
“혹시 지금 바빠요?”
“이제 점심시간이라, 별로.”
“그럼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어.”
윤기는 점점 느려지는 지민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언제나 망가진 모습이었던 느낌이다. 그런 착각이 들게 만든다. 모든 게. 윤기는 회사에서 짐을 챙겨 회사 앞 편의점에 들렀다. 편 의점에서 익숙하게 탱크보이를 샀다. 분명 더울 테니까. 아주 사악한 배려였다.
아마 아이스크림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에 시동을 걸며 그리 느꼈다. 우린 분명 서로의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지민은 어디서든 잘 자라고 좋은 사랑을 만날 거다. 하지만 윤기는 달랐다. 조금씩 저를 훑고 지나가는 이지러진 추억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처음 만났던 날, 그리고 정을 알아서 떨어트린 날.
“나는 대체 뭘 하는 거지.”
지연의 말에 이리 빨리 움직인 적은 없었다. 핸들 밑에 차키에는 지연과 같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항상 어떤 핑계를 대서든 제 편리만을 추구했던 윤기가 어째서 이리 몸이 먼저 반응하는가. 지민이 그저 저를 이용만 하는 거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불안이 깊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든 게 거짓말 뿐이라면. 나는 대체 누굴 보고 살아가고 누굴 믿어야만 하지?
“....”
지민은 그늘 아래에서 윤기를 기다렸다. 이 근방에는 친절한 음식점이 없었다. 햇빛을 피해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먹을 게 아니면 나가라고들 했으니까. 죽을 거 같다. 이런 기분은 처음 이었다. 사실 처음은 아니겠지만 너무 강렬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거 같은 느낌. 마지 막 사랑이 이런 느낌일 거다. 내 모든 게 당연하게도 아스팔트 위 장미처럼 녹아내린다.
그렇게 쓰러진다. 다들 정신을 잃을 정도의 희열이나 두려움을 느껴 봤을까. 눈이 점점 흐리 게 감기고 나라면 나를 상처 입혀도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단점. 힘이 없는 다섯 손가락으로 끝을 잡는다. 아직은 죽을 수 없다면서. 이제 겨우 말도 텄으니까. 이제 겨우 서로를 서로로 바라볼 수 있게 됐으니까.
그냥 오늘, 고백해 버릴까?
포르쉐가 열기를 누르고 지민의 앞에 섰다. 지민은 썬팅 된 유리창을 보고, 창이 내려가자 윤기의 얼굴이 보여서 안심했다. 사실은 제가 윤기 형을 좋아해요. 형도 저를 지민아, 하고 다 정하게 불러 줬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고백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이 말을 씹어 넘기고 녹이고 있다.
“많이 더워요?”
“아, 그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 고백 해도 되는 게 맞는 걸까?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제 머리카락도, 감각이 없는 다섯 손가락도.
“여기, 탱크보이.”
그 순간 마음이 폭발했다. 괜찮은데. 진짜 괜찮은데. 또 뺨에 닿아서, 손가락에 제대로 닿지 않아서. 지민은 윤기를 몇 초 마주했다. 옅은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다 덜컥 아이스크림을 잡아들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민윤기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러나 내 손은 탱크보이를 잡고 느리게 내렸다. 뒷자리의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준 걸까. 땀에 젖은 손 아래로 민윤기의 결혼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차에 다 타지도 않고, 문도 닫지 않은 채로. 심지어 탱크보이 마저도 거절했다. 처음은 단순할 줄 알았다. 첫 키스와 다를 바 없을 줄 알았는데. 지민의 마음은 터 질 것 같이 달아올랐다. 마치 마지막 키스처럼. 그렇게 짧게 한두 번 더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패배, 들끓는 욕망이 평소와는 달라서 도망쳤다.
도망치며 본 것들은 빠르게 생선을 물고 가게 주인에게서 달려가는 고양이, 날아가는 새. 뒤 를 돌아보며 마주한 것은 아무런 미동도 없는 포르쉐였다. 행복하지 않았다. 이런 키스는 처 음이라 많이 후회가 됐다. 세상 모든 게 나를 빼고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그랬다는 거 다. 분명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나는 달리면 안 되는데. 집이 빨리 보이길 바랬다. 두 번째 주 머니가 찰랑거리는 걸 보면 열쇠는 아직도 들어있나.
아마 이렇게 달렸다면 이렇게 달려간다면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면서 심장은 살 짝 강해졌다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약했으니까. 하늘을 바라보며 빌었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하고 말이다. 지민은 터질 것 같은 숨을 부여잡고 결국 집 앞에 도착했다. 산소 호흡기라도 입에 붙여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럴 정신이 없어서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건 고급스러운 현관문과 살짝 포근한 차가운 흰 바닥,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탱크보이의 물기였다. 정작 아이스크림은 내 손에 없는데. 바보 같았다. 눈이 슬쩍 감겨간다. 도어락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오류를 드러내고, 문은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민윤기는 차 문을 닫았다. 닫고 생각을 했다. 일단은 대체 뭘 해야 하는지를. 하지만 아까의 키스가 기억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뭘 보여줬을까. 내가 준 건 상처밖 에 없는데. 이해를 못 했다. 분명 똑바로 살았다. 똑바로 행동했는데. 지민은 무슨 연유로 키스를 했을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토할 거 같았다. 나는 이쪽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랬는지. 사실 지연의 말 도 행동도 이해가 안 가는 것만 잔뜩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 동생을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지가 신기할 정도로. 여전히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고작 몇 분 전의 일이라서 잊지 못하나. 지연의 표정이 지민의 표정이 섞여서 더 복잡해졌다.
그때 펑 하고 하늘에 불꽃이 피었다. 누군가 불꽃을 쏘아 올린 건가? 하고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예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해의 파편이 밑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포근하게 저를 감쌌다. 마치 거짓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윤기는 차 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서서히 속력을 늘려가며 자취방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진 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갑작스럽게 섭렵했기 때문일까. 불안하다. 미친 듯이 불안했다. 종소리가 박자에 맞춰 정확하게 딸랑거렸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울린다.
해의 파편도 불꽃놀이도 다 끝나버린 하늘 아래, 지민이 늘어져 있었다. 윤기는 힘없이 쓰러 진 지민을 품에 껴안고, 이내 안아 들었다. 한 번 두 번 달리다 더 빠르게 달려서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기운 하나 없어 보이는 저 창백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병원에 가면서도 지민의 얼굴을 수십 번 확인하고, 좌절하고를 반복했다. 윤기는 그랬다. 적어도 열정적으로 굴 었다. 마치 허상의 열정을 바라본 것처럼.
“조금만, 조금만 참아.”
그렇게 중얼거리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한 번 두 번 몇 초가 중요할 거다.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와 물어보니 윤기는 심장이 약한데 더위에 장시간 있어서 쓰러졌다고 설명했다. 지민의 심장이 뛸까. 뛰길 바란다. 윤기는 지민의 손을 꼭 잡았다.
의사와 간호사가 분주하게 움직이는데도 머릿속에는 아까 해의 파편이 떨어지던 광경과 허상 의 열정만이 그려졌다. 허구의 상상을 좇는 열정. 박지민은 민윤기에게 그런 존재다. 해의 파편을 떨어지게 만든 것도 어쩌면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 것도. 그런 게 가능한 건 제 앞에서 간신히 숨을 허덕이고 있는 놈만이 가능케 했다.
너는 내 허상의 열정이야. 내가 널 그렇게 좋아하나 봐.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어쩌면 서늘한 그늘 밑에서도 연명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생. 윤기는 지민의 손을 간절하게 한 번 더 잡았다.
지민의 입에 산소 호흡기가 채워졌다. 머지않아 링거마저도 맞게 됐다. 다행히 심장에는 이 상이 없고, 호흡이 살짝 불안정해서 경과를 지켜봐야겠다고 하는 말에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 다. 안도를 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 점심시간은 조금 남았으니까. 지민이 그 안에 깨어 난다면 좋을 텐데.
“....”
허상의 열정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지금은 기억도 아무 것도 나지 않는다. 그 말이 왜 이제야 꽂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허상의 열정을 꼭 빼닮은 건 지민이라는 걸 어째서인지 부정할 수 없었다. 지민도 그 책을 읽어 봤을까. 손에 입을 짧 게 맞춰 줬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어나길 바래서.
시간은 점점 흘러가며 해의 파편은 자꾸만 떨어졌다. 유성이 떨어지듯 지구를 멸망이라도 시 키려는 건가. 사실 윤기의 눈에만 보이는 거다. 그 허상의 열정에서도 해의 파편이 등장했던 거 같다. 해의 파편에 천천히 노래하던 그는 마치 허상의 열정을 닮아 있었다...갑작스럽게 바 보가 된 느낌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30분이 지났을 때, 윤기는 나갈 준비를 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끝나면 귀찮아지니까. 그 런데 그때 지민이 제 소맷자락을 잡았다.
“...내가 그쪽을 좋아하게 두지 마세요.”
반은 눈물이 섞인 말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아마 거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나중에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떡해요. 결국 내가 정말 예쁜 추억 같은 걸로 꾸며 버리면 어떡해요?”
나는 예쁜 추억 하나 가질 자격도 없어요.
그 말에 윤기의 어딘가가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아 직도 모른다. 사람인 주제에, 읽고 먹고 듣고 쓰고 말하더라도 겨우 알아듣는 게 사람인데. 대 체 왜 자신을 저렇게 부정하는 거지? 눈동자에 담긴 그 연약한 모습이...땀에 젖어 힘없는 핏 줄 선 손가락들이 제 와이셔츠를 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의 손을 바로 잡아주면서, 천장을 바라봤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는지 수 십 번 수백 번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민윤기 자신이 나중에 힘들 거 같 았으니까.
“...그쪽은 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예쁘고 똑똑하고 뭐든 잘 해내니까. 물론 지금은 아직 많이 자라지 않아서 서투른 겁니다. 아직은 나한테 마음껏 쏟아내도 돼요.”
뺨을 쓰다듬어주고, 간이 의자에 앉은 채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잔인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말이에요. 사람은 금방금방 바뀌고 언젠가 바뀐 그 모습에, 아니면 처음에 기초한 모 습에 의지하고 익숙해져서, 착각하며 죽어가요. 아 이게 잘못됐구나, 아 이게 맞는 거구나. 근 데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겐 틀릴 수도 있잖아요. 그 차이야. 그쪽의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결국엔 다 잊혀질 거에요. 지연이도,”
결혼반지를 보여줬다. 결국 다 잊어버릴 거라고. 지민에게 강조하면서.
“내 말을 다 까먹었더라도 그거 하나 만큼은 기억하세요. 그쪽도 충분히, 예쁜 추억 하나 가 질 자격이 있어요.”
윤기는 병원비는 자기가 냈다고 지민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한 뒤 이따가 저녁 맛있는 거 해 주겠다고 예고까지 한 뒤 떠나갔다. 햇빛이 비친 바닥에 윤기의 그림자가 졌다. 눈물이 한 방 울 두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여전히 완벽했다. 박지민은 처음으로 한 번 더 사랑 에 빠졌다. 병상을 흠뻑 적실 정도로 눈물이 나왔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지연에게 사과할 일이 더 생긴 건지는 몰라도 지민은 결국 윤기를 포기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