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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
“아까 윤기가 나한테 전화했더라. 너 많이 아프다고.”
“...누나가 돈 대줄 거 아니잖아.”
“어, 안 대줄 거야. 신용 불량인 네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
“....”
“민윤기 걘 끝까지 니 걱정만 하더라. 똑같은 대학교 다니는데도.”
“...난 민윤기 못 버리겠다.”
“뭐라고?”
“누나한테, 못 주겠어.”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볼록 튀어나온 지연의 주머니를 꺼내 보니 담뱃갑이 있었다. 동시에 라이터도 떨어졌다. 와, 씨발.
“민윤기한테 물어봤는데, 담배 피우는 여자는 싫대. 최악이랬어.”
물론 지어낸 거다. 그런 거 들어본 적도 없다.
“...이거 내 거 아닌데?”
“손가락에서 냄새 다나. 몇 갑을 피운 건데 대체.”
“....”
“거짓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해. 아빠가 지옥에서 웃겠다.”
지민은 링거를 세게 뜯어내고 하품을 하며 병상에서 일어났다. 밤은 시원했다. 여름의 밤은 보통 그랬으니까. 지연의 어깨를 지나치고 병원을 나서는데 그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집까지 언제 들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밤은 짧고 걸어가면 언젠가 닿을 테니까. 내 마음을 진정 고백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겨버렸다.
밤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니 불꽃이 요란하게 터지고 있었다. 달의 파편처럼 느껴져서 예쁘 다고 생각했다. 지민은 그러다 아무런 이유 없이 멈춰 섰다. 고등학교 2학년에, 학교 도서관 문학 코너에서 꺼내 읽었던 책. 이름이 허상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이게 왜 지금 생각나는 지...심지어는 불꽃을 보며 왜 떠올랐을까. 기억을 따라가니 머리가 샛노란 남자가 보였다. 교 복을 다 풀어 헤친 데다가, 얼굴에 상처가 나 있는...그리고 명찰이, 민윤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그리고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어쩌면, 기억 속 그 인물과 똑같았다. 처음으로 만났던 인간적인 사람. 이상할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지 민은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왔어요?”
“형.”
“...몸은 좀 어때요.”
“...형은 나 어때요?”
의미심장하게 물어보던 말, 마음에만 담아뒀던 것.
“뭐라고요?”
“만약 제가,”
뒤집개를 잡고 있던 오른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비싸 보이는 결혼반지를 빼냈다.
“형이랑 정말 잘해 보고 싶다면요.”
결혼반지가 쓰레기통으로 굴러떨어졌다. 계란말이가 타는 냄새가 나서, 윤기는 당황했다. 이 내 한 번 지민의 입술이 맞닿았다.
“지민아, 그러니까....”
“부정하지 마세요. 나 지금 너무 힘들어요.”
“...내가 너랑 이러면, 이러게 되면.”
불이 나갔다. 창문 밖으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윤기는 그 불꽃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파노라마처럼 번져가는 것들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였나.
“...광원고 3학년 민윤기 선배.”
“...뭐라고?”
“기억나요? 그 책.”
지민은 윤기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허상의 열정.”
윤기는 지민을 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학교를 겨우 3달 만에 나와서, 꼴랑 책 하나 찾겠다고 비를 다 뒤집어 쓰고 도서관에 들어왔다. 모두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를 싫어했다. 그럴만했다. 첫째는 책을 훼손시키는 게 못마땅하거나, 둘째는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거나.
“책 읽으실 거예요?”
“...?”
“그럼 일단 이 수건으로 좀 닦고 보세요. 책이 젖으면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잖아요.”
“...아.”
윤기는 수학책을 품에 끼고 있던 학생을 바라봤다. 명찰에는 박지민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 이 아니라 수학 문제집 같은 건가? 지민은 문학보다는 수학의 정석을 더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기가 수건에 싸서 받아 든 책의 이름은 ‘허상의 열정’이었다.
“보니까, 문학 그렇게 관심 있는 거 같지도 않은데.”
“우와. 목소리 처음 들어봐.”
“뭐?”
“말 안 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이렇게 좋은 목소리 숨겨 둬서 뭐 하게요.”
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수학의 정석을 더 껴안았다. 아마 소중한 건가. 그러고 보니 교복에는 며칠 된 거 같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그을음. 폭력이라도 당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다. 행복을 갖지 않는다면 쥘 수 없는 미소를 띠었으니.
“...별로.”
“그 책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요, 낮에 하늘에 불꽃이 피어올라서, 마치 해의 파편처럼 천천히 우리에게로 떨어졌다. 에요. 어때요?”
“....”
“별로예요? 근데 그 책 진짜 좋으니까. 꼭 읽어 보세요. 알겠죠?”
지민은 그 말만을 남기고 도서관을 나갔다. 도서관 밖에는 일행처럼 보이는 사람이 보였다. 시력에는 자신 없었지만 분명 김태형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차례 나를 노려보다 그는 사라졌 다. 하지만 윤기는 지민의 얼굴보다는 지민의 몸이 더 기억에 남았다.
모범생같이 굴던 의아한 표정과 말투...마치 그들을 따라 하듯 연기하는 게 보였다. 또 살짝 벗겨진 소매 아래로 보이는 흉터. 평범한 학생이 아니다.
또, 도서관용 책에 커터나이프로 난도질을 해 놓는 것도. 모범생이 하는 짓은 아니겠지.
“그 책이 나는 유일한 창구였어요. 선배랑 나를 연결할.”
“...박지민이 너였다고?”
“이제야 기억나서 다행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제일 아끼는 그 책을 그냥 줄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선배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발전해. 지민아. 나 네 누나랑 결혼 약속한 사람이야.”
“누나가 다 가짜라는 거 밝혀졌잖아요. 소개팅이든 나한테 상습적으로 지랄하는 거든 다 들켰 잖아. 근데 왜 자꾸 누나 감싸줘요? 누나가 그렇게 좋아요?”
지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윤기는 그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아주 작은 두 손으로 벌벌 떨면서 그는 목이 메어 안달이었다.
“...어.”
“뭐라고?”
“난 그 점에 반해서 내 평생을 약속했어.”
“....”
“네가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는 그 애를 버릴 수 없어. 전부 꾸며낸 가짜라고 해도 그래.”
“...왜요?”
“불쌍하잖아.”
"뭐라고요?”
“불쌍하다고. 지연이가 네 악담만 했어. 그렇게 싫어하는 애한테 자기 전부를 빼앗기면, 그 애 자살할지도 몰라. 자살하면 어떨 거 같아? 너 그 대학교 포기해야 해. 그게 너한테 어떤 거던 전부던 간에!”
자연스럽게 지민을 유도한다. 이끌고, 그렇게 천천히 마음을 지워가는 거다. 거짓말로 얼룩진 거짓말은 점점 멍청하고 사악하게 변하니까. 지연이 지민에 관한 악담만 한 게 맞긴 해도. 솔 직히 말해 자신이 없었다. 지민과 잘해 볼 자신이.
“...사람들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요. 지연 누나도 그렇게 약하지 않고.”
“...뭐?”
“우리 누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나쁘고 멍청해도 내가 지금까지 버티게 도와준 사람이에요.”
“....”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지민은 그 길로 집을 나갔다. 한동안 모두가 조용했다. 달도 유성도 차 경적도 모든 게 멈춰 서 움직이지 않았다. 윤기는 허공에 떨어진 시선에 멍하게 서 있었다. 나는 실수를 했다. 지민 을 지금 잡아야만 한다. 어떻게든 사과해야만 했다.
그 길로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아직 지민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에 안도하며 빠르게 달렸다. 가로등 불빛이 깜빡일 때마다 더 가까워져서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그 모습을 결국 거머 쥐었다.
“...잘못했어요. 내가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
“나는, 나는 박지민 씨가 상처받을 줄 알고. 고등학생 때도 그랬잖아요. 힘들어서 손목도 그렇게 하고. 또...책도 그렇게 한 거잖아. 모를 줄 알아요?”
“...그래서요?”
“지민 씨가 원하는 걸 듣고 싶어요.”
“...나는 윤기 씨가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눈동자에 나는 없다. 검고 칠흑 같은 그 눈동자에, 내가 없다. 항상 있었던 그 자개 안에 내 가 없어서. 윤기는 지민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층 초라한 모습으로 그를 껴안았다.
“...시간을 줘.”
“....”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게 시간을 줘요.”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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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은 며칠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태형은 이를 갈며 담배 캡슐만을 찌그러트렸다. 하필이 면 담배 메이트가 사라져서 고민이었다. 민윤기 그놈 탓이냐 몇 번을 물어도 말이 없고, 그저 읽씹 뿐이었다. 처음이라 당황했다. 박지민은 친절이 기본 베이스라 아무리 귀찮아도 이모티 콘 하나 정도는 보내주는데. 아무래도 진짜 뭔 일이 있는 거다. 민윤기 그 망할 개자식이 박 지민을 망가트린 거라고.
박지민이 옛날에 자취하던 화장실 칸이 오늘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캠퍼스 화장실은 언제 봐도 기분이 더럽지만 항상 반겨주곤 했는데. 한잔 걸치고 들어온 듯한 그 얼굴이 볼 만했는데.
“...지연 누나.”
“어, 태형아. 무슨 일이야?”
“박지민 학교 며칠째 안 나오는 거 알아요?”
“...알지. 아파서 그래, 그거.”
“...진짜로? 죽은 건 아니고?”
“죽었으면 장례 치르러 갔겠지.”
“...말 진짜 존나 심하게 하네.”
“...난 이제 걔가 지겨워. 그래서, 말 좀 심하게 해 봤어.”
“솔직히 죽길 바라죠?”
“어.”
당연한 거 아냐? 밥만 축내는 식충이 병신 새끼. 지연은 그렇게 말하고 또각거리며 복도를 벗어났다. 둘만이 존재하는 복도라서 다행이었다. 태형은 핸드폰을 귀에 대며 한숨을 쉬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학교를 나가며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머리를 한 번 넘겨 봐도 “술 한잔할까?” 하는 박지민은 없다. 저런 가정에서 사람이 안 미치는 게 용할지도 모른다.
“민윤기. 어때?”
“....”
“이제 누가 더 미쳤는지 분간이 가?”
“....”
민윤기는 전화를 뚝 끊었다. 그래도 이걸로 바뀐 거다. 지민의 패가.
그는 회사에서 나와 캠퍼스로 향했다. 속력을 점점 올렸고, 이마에 뻗쳐오르는 오만가지 상 상들을 겨우 억눌렀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서 어지러웠다. 하지만 윤기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야 박지민. 잠깐만 학교 나와. 계좌로 택시비 쏴 줄 테니까.”
“...싫어.”
“민윤기가 학교에 오고 있어.”
“...그래서 뭐.”
“네 이야기를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학교에 와.”
“....”
한편, 민윤기는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지연은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있었고, 태형은 윤기를 노려봤다. 윤기는 할 말이 없었다. 아마 백 번이라도 할 말이 부족할 거다.
“오빠.”
“우리 헤어지자.”
“뭐라고?”
“이유는 묻지 마. 그냥 여기서 끝내자. 우리.”
결심이 섰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걸었다. 그 청춘을 따랐어야만 했다. 말하지 못한 진심도 입을 다문 현실도 전부 틀렸다는 걸. 민윤기는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아프다. 아프지만 참았 다. 그는 이제 더는 고등학생이 아니니까.
“...왜 이러는데 나한테.”
윤기는 지연을 사람들 앞에서 농락하고 싶지 않았다. 지연이 이 일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 바라는 것도 사람들이 지연을 비난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실이 끊어진 거라 다들 생각하길 염원했다. 그랬을 뿐이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속삭였다.
“태형이가 아까 너랑 나눈 대화를 나랑 통화하면서 그대로 들려줬어.”
“뭐...?”
“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사람과 사랑할 수 없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니까 안 끝내면 안 돼?”
“안 될 거 같다.”
윤기는 결혼반지를 빼 던져버렸다. 쓰레기통에 빙글거리다 들어간 그건 모두를 놀라게 만들 었다. 대화는 잘 들리지도 않는 데다가 날이 선 채로 흘러갔다.
“이제 다시는 나 볼 생각 하지 마.”
태형은 그 상황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연은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발짝 두 발짝 걸어가더니 이내 별관으로 사라졌다. 캠퍼스는 그렇게 한동안 웅성거 리다 자연스럽게 와해하였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서일지도 모른다. 윤기는 급하게 학교를 나갔다. 태형에게서 스치듯이 지민이 학교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숨을 헐떡이며 열심히 달렸다. 뭐라도 보일 줄 알고. 학교 밖을 나가자 지민의 뒷모습이 보 였다. 언젠가 봤던 그 모습이다. 윤기는 한 번 더 힘을 내서 지민을 끌어안았다.
“...제발 가지 마세요.”
지민의 어깨에 코를 부비고 마음을 얹었다. 숨을 깊게 내쉬면서, 조금이라도 진심이 닿길 기도했다.
“...상처받는 거 싫어하잖아요. 근데도 혼자 이렇게 돌아가면 뭐가 달라져요. 혼자 상처받는 것뿐이잖아.”
“...놓아주세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매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좋아하니까요.”
귀에 적절하게 닿은 말에, 지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윤기는 지민의 앞으로 걸어 가서, 결국 입을 맞췄다. 한 번 닿은 입술은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최고의 결말...지민은 그 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떨어지지 않을게.”
정말 소중한 것처럼 그는 나를 껴안고 놔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간 텅 비었던 속이 비로소 채워지는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당연하게도 불꽃이 해를 향해 터져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상의 열정이란 그런 것이다.
어떻게든 허구를 찾아가기 위해 그려내는 특별한 마음. 나는 결국 천사의 날개를 손에 거머 쥐었는가. 하늘에 보이지 않는 박힌 별들에, 떨어져 내리는 그 여름의 해의 파편에. 다시 한번 축복을 빌어본다.
가슴에 가득 찬 이 열정이, 허상의 열정이.
사랑으로 변해도 결국 그 어떤 것으로 변해 버리더라도 계속 남아만 있어 달라고. 어린 날 눈에 담았던 그 허상의 열정을.
이제야 겨우 만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