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제 검은볼캡을자기가 뺏어 쓰며 난입한 놈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김태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당찬 목소리가 신기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즐긴다는 건 참 미친 짓이라 똑똑히 생각하게 됐다. 근데 더 중요한 건 처음이라는 거다. 무용담에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게.
“너는....”
“지연 누나. 지우 누나가 아직도 시키는 거에 막 말리지 마세요. 어떻게 나랑 연애할 때보다 더 소심해졌어.”
“....”
“근데 우리, 사람은 팔지 맙시다.지민이이제 정신 차렸어요. 아마, 아. 누나 남친이 마지막 이었잖아.”
이제 그만가, 뭐 해.지민은 태형에게 속삭이며 옷가지를 잡아끌고 인파 사이를 나왔다. 명 문대 경영학과 여신의 굴욕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저를 잡고 무슨 짓이냐 물어보지 않았 다. 그냥 좀 특별한 가족의 가정사가 아주 살짝 까발려진 거다.지민은 피식 웃고는 담배를 물었다.
“밥 먹을 거냐?”
“난 담배 피우고 밥 먹은 적 없어. 원래 식후땡이 젤 좋은 거거든.”
“...이상한 취미네 그거. 뭔가 입맛이 돌던데, 입맛이 확 살아서. 설탕이 들었잖아.”
“어쩌라고, 다이어트 중인데.”
“그런다고 그 고상한 사람이 너 봐주겠냐. 그리고 나 민윤기 알아.”
“어?니가어떻게 아는데. 이름은 또 언제 알았어?”
“알지 당연히. 지연 누나 인스타에 오늘 떴거든. 우리 아빠가 대기업 쪽, 차장님이신 건 알지? 거기서 무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며 그는 내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실적 1위.”
“실, 실적 1위?”
“그래, 그럼 돈이 얼마나 많겠냐.”
“다 가졌네. 재수 없어.”
“보건 선생님 보고 첫사랑에 빠진 중학교 2학년생처럼 굴던 걔는 어디 갔냐?”
“무슨 비유가 그러냐, 난...중학교 2학년생이 아니라 중학교 1학년생이 2학기에 하는 사랑 을 하는 거다. 것도 8월 치.”
라이터를 꺼내 들어 제가 물었던 게 세븐 스타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결코 세븐 스타 가 아니면 안 됐다. 그런데 하필 오늘인가. 오늘은 아무리 운이 안 좋더라도 남아있길 바랬 는데. 태형은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아까 말을 크게 내뱉으려고 마신 물이 한이었다.
“경영학과 온 것도 인연이네, 모르는 거 물어봐. 알려주겠지.”
“근데, 실적 1위인 사람이 왜 그렇게 작은 데서 살까?”
“숨겨둔 방 있는 거 아냐? 명품 존나게 즐비해 둔 비밀 방.”
“...가능성 있는데, 근데 되게 낡은 정장을 입고 있었어.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처럼 보였고.”
“의외네. 실적 1위 주제에 가난마저도 사겠다, 이건가?”
그런 거면 완전 정 떨어지겠다. 난 서사 같은 거 싫어하는데. 지민은 한 번 미소를 짓다 창문 밖 하늘을 바라봤다. 이걸 기회로 그 사람이 한 번 더 캠퍼스에 와준다면 좋을 거 같 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지민은 호시탐탐 윤기를 노렸다. 솔직히 반은 악의가 없지 만, 또 다른 반은 악의가 있었다. 이제 장난질은 그만하고 결혼하는 거다. 약간, 좀 성의 없나?
“근데, 이번 놈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냐?”
“결혼.”
“뭐?”
“결혼이라고.”
“진심이야?”
“어. 그 전에 깨지면 또, 나만 작살나겠지만 뭐.”
박지민은 박지민을 오래전부터 믿지 않았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라고. 애정 하나에 끊임 없이 만족할 수 없는 놈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끌렸던 거다.
“조심해라.”
“뭘.”
“까딱하면, 또 집안 풍비박산 날 거니까.”
“그땐 뭐...윤기 형 데리고 몰디브로 토끼는 수밖엔 없겠지.”
“돈은 누가 대고?”
“형 통장이 대 주는 게 당연하잖아? 아마 잘만 대줄 걸, 내가 워낙...잘생겨서.”
태형은 가끔 그런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긴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뭐든지 잘 될 거라 생각한다는 게 기본으로 깔린 놈이라는 점이 대표적이지만, 문제는 그게 너무 많은 사람에게 노출당한다는 것. 지민은 평화롭게 한 발짝 두 발짝 걸어 가다 이내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사실 그는 친구가 없는 게 아니었다. 소문에 의해서 아싸 가 된 것도 누군가가 입김을 불었다는 것도 전부 해당하지 않는다. 그냥, 지민의 급에 맞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김태형마저도, 지민과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면야...그저 박지 민을 염원하며 과제나 하고 있었을 게 뻔한 인물이었으니까.
“지연아. 뭐라고?”
“오빠, 나 좀 데리러 올 수 있어? 지금 쯤이면 퇴근할 때인 거 같아서 전화했는데.”
“그럼 지민 씨도 같이 데려가야겠네?”
“...그냥 오빠랑 나랑 둘만 가면 안 돼?”
“안 돼. 시간도 없고 이따가 회식이 있어서. 집도, 멀잖아.”
윤기는 시간을 확인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삑 하고 화이트 포르쉐가 반짝였다. 지민을 태운 차와는 완전히 다른 차. 윤기는 퇴근과 출근의 차가 달랐다. 당연히 돈이 많으니까 가 능한 일이었다. 지연은 한숨을 쉬었고, 가끔 그녀에게 윤기는 회의를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먼저 사귀자고 했던 그 모습을 상상하며 여전히 내면의 윤기들은 싸우고 있었다.
“...알겠어. 그럼 지민이랑 같이 정문에서 기다릴게.”
“어, 전에 보니까 너무 밖에 나와 있더라, 좀 뒤로 가 있어.”
“응 오빠.”
윤기는 한숨을 쉬었다. 지연이 애당초 자기 사진이 아니라 지 동생 사진을 먼저 보여준 게 마음에 걸렸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로 한 시점에 호모섹슈얼을 의심하는 거 자체가 틀린 거 아닐까. 지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다.
익숙하게 집에 들어왔더니 신발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화이트 계열이지만 검게 얼룩진 컨버스. 티브이도 켜 두지 않고 냉장고의 아이스크림도 하나도 줄지 않았는데, 쪽지가 하나 붙어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 지연 누나 많이 좋아 해주세요 제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
빨간 불인데도 멈출 수 없었다. 심장 박동이 거세져서인가. 그게 아님 다리 밖 강물이 파 도를 닮아가서였나. 윤기는 그 말만 떠올리면 혼동하게 되어버렸다. 지연은 왜 저에게 먼저 그 사진을 보여주고 예쁘냐고 물어봤을까? 그리고 지민은 왜 그렇게 에너지바 위에 쪽지를 붙여 뒀을까?
“거기 안 가고 뭐 해요?”
정신을 차린 것은 사람들의 고함과 함께 경적이 수어 차례 울린 후였다. 윤기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다리를 건너갔다. 아직도 몽롱했다. 에어컨을 틀어놓고서 이불을 덮고, 아직 따뜻했던 에너지바 위에 놓인 쪽지가, 나는 그렇게나 신경 쓰일까. 문득 거울을 보며 미간 을 찌푸리니 살짝 붉어진 제 두 뺨이 보였다. 왜 이러지, 왜 이리 뜨겁지. 넥타이를 살짝 느 슨하게 한 채로 핸들을 잡았다. 나는 남자 같은 걸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인데.
잠시나마 이상한 생각을 했던 제가 미웠다. 스쳐 지나가는 미래의 상상들이 보였다. 지연 이 결혼반지를 내던지는 것. 그리고 지민이 아무런 기회조차 없이 평가당하는 것. 사실 지 민의 경우 다를지도 모른다. 이 가족은 어딘가 결함이 심하게 있으니까. 창가에 팔을 기댄 채로 바람을 느꼈다. 서울의 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더웠다. 지민은 또 그 복숭아 향이 나려나.
“지민아.”
“어, 누나.”
“윤기가 너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아, 어 그래야지. 나 마침 강의도 다 끝났어.”
“그래? 그럼 정문으로 나와.”
솔직히 누나의 전화는 받을 때마다 꺼림칙했다. 김태형의 보조배터리로 어떻게든 회생시 키긴 했으나, 누군가와의 대화가 이렇게 아까운 거였던가? 지민은 분명 잘못을 했지만, 저 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이리 누나에게 적대적일까.
“윤기 씨가 누나랑 같이 데려다준대?”
“...어. 이따가 회식이 있대.”
“그래? 대기업 쪽이면 삐까뻔쩍한거 많이 드시겠다.”
“윤기 씨가 대기업 회사원인 건 어떻게 알아?”
“그게, 태형이가 말해줬는데, 자기네 아버지가 그 사람을 좀 잘...알더라고. 실적 1위라던데?”
“...지민아.”
“어.”
“나 진짜 잘해 보고 싶어 이번에는.”
“어, 잘 해봐.”
여우는 가면을 쓴다. 지민은 속으로 누나를 비웃고 있었다. 잘해 보라고 말은 했다. 어린 양처럼 굴면 적어도 조용하게 넘어가니까. 근데 아무래도 이 결혼은 한 달 안에 깨질 것이 다. 장담컨대 그렇다.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봐 왔으니까. 때마침 학교 앞에 멈춰 선 차는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훔쳤다. 지민은 윤기의 옆에 앉았고, 지연 누나는 뒷좌석 에 앉았다. 갑자기 시간을 재는 듯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 다 문득 지민을 바라봤다. 옷은 싹 다 세탁기에 넣어 둬서 없다더니...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왜 신경 쓰이는지 정작 저는 몰랐다.
“누가 옷 사줬어요?”
“네?”
“아니, 다른 옷 입고 계시길래.”
“이거 태형이 거에요. 친구.”
“...친구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걘 친구도 아니죠. 근데 뭐...지금까지 오기에는 옆에 걔밖엔 없었으니까. 친구가 맞을지 도 모르겠네요.”
유난히 시선이 갔다. 평소 맡던 냄새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윤기는 별생각 하지 않으려 쓸데없는 노력이란 노력은 다했다. 아마 처음부터 그는 지민에게 농락당했을지도 모른다.
지민이 알 턱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 자기 모습이 어땠는지를. 백금발의 살짝 푸석푸석 한 머릿결에, 붉은빛이 도는 입술...그리고 뼈가 연분홍빛으로 살짝 뛰어나온 손목마저. 민윤 기 자신이 남자에게 관심이 없더라도 지민은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그는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상은 콩가루 집안에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집도 없는 낭떠러지에 몰려 있었다.
보통 1920년대의 파리의 분위기를 닮은 사람이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게 흔한 일인가? 윤기는 지민을 볼 때 그 생각을 했었다. 아마 코코 샤넬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지민을 모델 로 했겠지. 모두가 패션을 배우러 파리에 오고는 한다. 하지만 지민은 서울의 쓰레기가 널 린 아스팔트 위에서 고고히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 봤음에도 강렬 하게 담아냈으니 기억한다. 무료한 일상에 별빛이 살짝 첨가된 느낌.
“그런데, 윤기 씨는 몇 살이세요?”
“형이라고 해요. 내가 나이가 좀 많아서요.”
“전 스물둘.”
“스물일곱.”
“그렇게 안 보이는데?”
“오빠, 아직 멀었어?”
“아니, 이제 곧 집 도착해.”
“....”
아 맞아, 또 티 내버렸다. 지민은 머쓱해서 괜히 스마트폰 액정만 쳐다봤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별거 안 나온다. 그냥 망할 기본배경화면이 보일 뿐이니까. 민윤기는 모른다. 지가 얼마나 핫하고 다정하며 유부남인지. 물론, 세 번째는 몰라도 된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세요.”
“네, 누나도 얼른 들어가.”
“....”
누나는 이쪽 따위 봐주지 않는다. 민윤기의 시선 안에서만 행동할 테니까. 정말 간절하긴 할까? 손가락만 까딱이면 자기 연봉 집안 스펙 과시하며 달려들 남자가 몇인지. 누나는 생 각조차 해 보지 않았겠지. 나머지 세 누나가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 세상이 말세였을 거다. 집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갑자기 화난 이유는 확실하다. 첫째 누나의 쓰레기 번호 뒷자리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바꾼다고 바꿔 놓고, 왜 이 번호지? 그러다 손가락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설마 민윤기가?”
그럴 확률은 내가 백 쌍둥이로 태어날 확률과 같았다. 민윤기가 설마, 첫째 누나의 쓰레 기일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절대로. 애초에 그렇다고 해도 내가 먹을 거다. 누나는 지금 아 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해서 아직도 과학 공부만 존나게 하고 계시니까. 그 망할 쓰레기 따위 는 잊었겠지. 하필 화장실 자취의 마지막을 생각해보면 첫 번째 쓰레기만 존나 조용했다. 왜 그랬을까? 왜?
악몽 같은 상황을 확신하게 됐는데, 첫 번째 쓰레기하고는 잠만 자고 헤어졌다. 왜 쓰레 기라 지칭하냐면 매너가 영 꽝이었기에. 처음이 아니라고 하더니 초짜마냥 허리도 못 쓰고 그냥 힘자랑만 오지게 했던 놈이었던 게 기억에 남았다. 솔직히 테크닉 보단 크기더라도. 테크닉도 어느 정도 중요한 법인 게, 그건 박지민이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섹스 였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하고자 일면식 없는 사람을 부른 거였는데. 하필 그 게 첫째 누나의 뜨거운 사랑이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첫째 누나가 울던 날을 기억할 수 없는 이유는 누나가 바로 대학을 자퇴하고 바로 아이비 리그 대학에 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누나는 타고난 천재였다. 유일하게 짱구가 잘 돌아 가서 선생님들이 첫째 누나만 칭찬했던 게 기억에 남았다. 아니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윤 기가 만약 첫 번째 쓰레기면 어쩌자는 거였다. 습관처럼 신발을 벗어 던지고 침대로 달려가 서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동거인.으로 하나 저장된 게 보였다.
“동거인?”
내가 이런 걸 저장해뒀던가? 지민은 바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민 씨?”
“윤기 씨가 왜 전화를 받아요?”
“어제 내 폰 뺏어서 저장 해뒀잖아요.”
“아 진짜로? 아니,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혹시 우리 누나 이전에 다른 여자 만나고 그랬었어요?”
“...그럴 리가요. 난 지연 씨가 처음인데.”
“....”
확인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따 윤기가 집에 들어오면 사과라도 하겠지 싶은 심 정에 일단은 누워서 머리를 식혔다. 여름을 흉내 낸 밴드가 금방이라도 티브이 앞에서 음악 을 연주하는 것처럼 귓가가 울렸다. 감동해 버린다...한심함에도 그에게 둘러댈 사랑의 어리 광을 모색하고 있었다. 기타리스트에게 물어봐도 아무런 완벽한 조언 하나 듣지 못한다. 나 는 내 마음을 한 번도 그에게 고백한 적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벌써 같이 살게 된 지 하루가 이틀이 지나가는데. 10년이 딱 지나 애 가 초등학교 가는 그 시절까지 손가락만 빨게 된다면. 이대로 좋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나 는 박지민이니까. 끝도 없이 애정만을 원하고 갈망하니까. 언젠가 이 반짝이기만 하는 마음 을 보여줘야 하는데.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근데 나는 그쪽만 보면 여름밤에 설익은 복숭아 향기가 나더라고. 어디서 파는 향수에요?’
뇌 속에 방금 스쳐 간 그 알싸한 말, 대체 뭐지? 지민은 머리를 붙잡고 주변을 확인했다. 여름 밴드는 없다. 시끄러운 음악도 멍청한 풀벌레도 없었다. 제 옷을 잡아 냄새를 맡아보 니 복숭아 냄새가 나서, 아마 몇 분을 그렇게 황당해하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 아닌 걸까? 윤기가 말했을 거다. 윤기가, 그렇게 말해줬을 거다.
샤넬 향수와 어딘가에서 섞인 냄새가 잔잔하게 어우러져 몸에 밴 걸까. 기분이 이상해졌 다. 금방이라도 사라진 열정을 찾게 된다. 죽어버린 애정들을 보살피던 제가 이젠 새것을 원한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민은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이 마음도 이 감정도 제 대로 지워지지 못한 아픈 추억들마저도. 그 사람에겐 털어놓고 싶지 않지만, 아픔마저도 애 정으로 바꿔낼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랑한다던가 사랑했다던가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정작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 장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 전부 끝이 아팠으니까. 사실 사랑이란 건 끝이 아플 수밖에 없다. 죽음이 고통스럽듯 사랑에도 죽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엄마는 미소를 짓 고 있었다. 아빠를 사랑했다면서, 꼭 그런 사랑을 하라면서. 그 여름 병실 문을 열고 따뜻한 유자차를 해주겠단 핑계로 집에서 직접 달여왔다고 하려고 했는데. 사실 그 유자청은 시장에서 사 온 거였다. 그냥 폼만 좀 잡으려고, 사랑 좀 배워보려고 했던 건데. 교육 값으로 내려고 했던 거였는데도. 엄마는 그렇게 죽었다.
머리를 헤집으며 장례식장을 되짚는다. 아빠는 소주병을 엄마의 영정사진에 던졌다. 그리고 집안이 망하는 지름길이라며 장례를 관두라고 육개장을 마구 퍼부었다. 장례비 따위 생 각 할 필요도 없다고, 매일 먹던 따뜻한 밥이 생각났다. 지민은 아직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사랑을 어떻게 하는 거고, 어떻게 받는 지도. 그런데 다 빼앗아간 주제에 여전히 그는 바보 처럼 굴었다. 바보가, 쓰레기가 된다는 것은 그런 거라고 누나가 가르쳐줬다.
“아빠는 뭘 알아요?”
“너,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어? 왜, 니 애미랑 같이 떨어져 죽으려고?”
“나 아직 너 죽일 수 있어.”
“너, 죽일 수 있다고.”
열여섯에 집을 나간 것은 그 이유다. 누나들이 내가 정말 아빠를 죽일까 봐. 그때의 나는 당찼다. 배울 기회가 많을 거라고 착각했고, 누군가가 내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줄 까 봐. 그래서 그렇게 못되게 굴었다. 사실 누나들이 날 고소하거나 심한 조처를 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서로 서로의 힘듦을 이해하기 때문인가.
그래도 나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여겨질 텐데. 옛날에는 여름의 청춘 낭만 이딴 걸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쓸데없이 눈을 뜬 질풍노도의 맛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니까. 아마 모두가 그렇게들 겪었을 것이다. 지민은 적어도 고등학교 때 삼촌네 집에서 처음 딜도를 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삼촌이 가끔 낯선 사람들을 부르고 두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던 이유 는 궁금하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결과 출렁이는 뱃살이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보통 낭창한 사람들이 주로 들어와서 저녁을 같이 먹은 적도 있었다. 거기엔 태형도 껴 있었다. 집에 같 이 놀러 왔다가 하필이면 삼촌 방에서 야동을 보는 바람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침대 밑으로 들어가서, 세 시간 동안 덜컹 이는 침대의 감정을 공유 당했다. 저 덩치에 침대를 석 달 주기로 바꾸는 이유가 있었다. 어쩐지 매트리스가 애매한 부분만 푹 꺼져있더라.
“근데, 니네 삼촌은 탑일까 바텀일까?”
“누가 그딴 거 궁금하대? 난 씨발 저 돼지 새끼가 얼른 뒤지고 보험금만 뱉어냈음 좋겠어. 벌써 부순 몸무게가 몇 개야.”
“그렇게 심하게 말하진 마라. 저렇게 잘생긴 놈들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야. 물건이 존나 큰가 봐.”
“....”
삼촌네 집에서는 고3 끝자락에 벗어날 수 있었다. 태형이네 집에서 자고 또 자다 결국 성 인이 됐으니 몸가짐을 똑바로 하라. 이딴 말이나 들으며 화장실 자취를 시작하게 된 거였 다. 김태형네 집에서 몇 년을 사는 것도 좀 그래서 방을 구했다는 핑계와 함께 화장실 자취를 시작하고...인생은 그렇게 느리게 고달파진다.
“...나 진짜 언제까지 이러고 살지?”
응? 대답 좀 해봐. 이 사람아. 지민은 결국 그렇게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늘어져서, 그렇 게 축 반절쯤 죽었다. 나는 어떻게든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었다. 지민은 적어도 그렇게 몽 글몽글하고 모양이 불분명한 애정을 원했다. 맞지 않는 퍼즐이라도 깎아서 맞추면 된다. 그 러니까, 또다시 신에게 빌었다. 눈을 감으니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번에는 절 묶어놓을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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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연이는 잘 만나고 있어?”
“...어 이제 한 달 좀 넘었지.”
“...근데 왜 이렇게 축 처진 건데.”
“...내가 원래 막 줏대 없이 사는 사람이야?”
“...그건 아니지. 니 줏대 존나게 고집하면서 실적 1위까지 쌓았잖아.”
잔에 또 투명한 물이 차오른다. 물인지 술인지도 모르겠다, 이젠. 윤기는 점점 알 수 없었 다. 제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그렇지...난, 난 줏대 있는 인간이야. 나는....”
한없이 고민한다. 술을 열심히 들이켜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그랬을까. 지민은 누구를 사 랑해줄까. 차라리 옆의 김석진과 갑작스럽게 배드신을 들켜 주길 바랬다. 그럼 싫어 라도 하는데, 지독하게 경멸하고 미워할 수 있는데. 접점 따윈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윤기는 피하는 게 어려웠다.
“실적 1위도 별거 아니네.”
“내가 그래도,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충분히 퍼질러 놀지 그랬어. 이십 대 청춘 다 회사에 바쳐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고 지랄이야.”
“그래서 하잖아. 결혼.”
윤기는 짠하고 네 번째 손가락에 껴든 결혼반지를 보여줬다. 석진이 경악했다. 머지않아 그 자리에 모였던 모두가 경악했다. 그 와중에도 윤기는 제가 아침에 지민에게 차려줬던 오 므라이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석진은 차분해지는 게 불가능했다. 오징어 다리를 쪽쪽 빨면 서 설마 진짜 하는 거냐고 노발대발 난리를 피웠다.
“어. 진짜로.”
근데 누구랑 할지는 모르겠어. 마지막 말은 마음에 푹 담가 놓은 채 꺼내지 않았다. 윤기는 그렇게 뻗어버렸고, 석진은 윤기를 언제나 그렇듯 이겨냈다. 밤거리는 서늘한데도 네 번 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는 술기운이 부드럽게 남아있었다. 그들은 일찍 술자리에서 퇴 장했다. 어쩐지 마음이 찜찜해 보이는 윤기가 더 술을 마셨다간, 해선 안 될 말까지 해버릴까봐.
민윤기는 힘들게 성공한 사람이다. 썩어빠진 이 바닥에서 못 마실 술 안 마실 술 구분도 못 하면서 몇 년을 악바리로 일했던가. 부서 실적 1위가 가져다주는 부는 어마어마했으나, 낡은 정장을 아직도 7년째 입고 다니는 걸 보면 휴식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니가 결혼한다니까 이제 그 낡은 정장 안 볼 거 같아서 마음이 좀 편하네.”
“...난 결혼 마음에도 없었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느낌. 아세톤을 식도에 들이부은 것처럼 목 구멍이 따끔거리고, 눈은 전혀 새롭게 떠지지 않았다. 사실 윤기는 결혼을 갈망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딸꾹질하듯 뱉어내는 게 맞선 자리였는데.
“근데, 결국 결혼한다는 건 좋아한다는 거 아냐?”
“...그것도 잘 모르겠어 그냥, 당장이라도...사과해서...다 없던 일로 하고 싶어.”
멈칫했다. 석진의 힘 있던 걸음이 결국 멈췄다. 윤기랑은 입사 동기라서 힘든 일 어려운 일 좋은 일 같은 걸 제일 먼저 나누고는 했었다. 그런데도 결혼 소식은 좀 늦어서, 사실 안 듣길 바랐다. 사람 다루는 데 서툴고, 다뤄지는 데는 더 서투른 놈이니까. 설령 자살이라도 할까 봐, 이미 느리게 육신에 자살을 걸어놓고 더 가속을 가할까 봐. 두려운 감이 없지 않 아 있긴 했다. 인간이 변한 환경에 아무리 적응을 잘한다고 해도, 민윤기는 아니다. 더없이 쏟아지는 것들엔 한없이 약한 사람이었으니.
“근데 민윤기. 넌 지금 혼자 위염 걸린 게 몇 번째인 줄은 아냐?” “...무슨 호사라고 그런 걸 세.”
“...결혼할 상대가 그런 것마저도 알아줄까, 해서.”
“...착한 사람이야. 근데, 나한테는 너무 과분해.”
“사랑에 과분하고 미약하고가 어딨는데.”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만을 반복했다. 서로는 서로의 인생을 폄하한다. 그리고 응원한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닫기까지. 그리고 김석진이 박지민과 눈을 마주할 때까지. 또는 아 리송한 미소를 볼 때까지. 윤기가 집에 들어갈 때 석진은 무엇을 봤던가. 문이 닫히면서 현 관 등이 깜빡였다. 처음 느껴본 따뜻한 기분...분명 민윤기 첫 여친보다는 나은 사람인 거 같아서. 아, 이 사람 술을 왜 이렇게 마신 거예요? 하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나올 수 있었다.
“윤기 씨,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오늘 회식이라고 했잖아요.”
“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는 양반이 왜....”
“나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제대로 신발을 벗지도 않고 그는 현관에 바로 누웠다. 얼굴은 빨개져서, 대충 풀어헤친 넥타이 탓에 살짝 보이는 가슴골도, 그리고 듬성듬성 흰 붉은 팔마저. 모든 게 과다한 음주를 보여줬다.
“...누가 봐도 많이 드셨으니까요. 피부가 이렇게나 벌건 거 보면 체내에서 알코올 분해도 잘 안 되시는 거 같은데.”
“그건 경영학과랑 상관없잖아.”
“기본 상식이에요.”
“그쪽은 말이죠. 꼭 내 앞집에 떠도는 고양이 같아요.”
“하긴, 내 꼴이 참 이집 저집 찌르고 다니는 아주 극악무도한 길고양이랑 다를 바 없겠네요.”
다 똑같네. 이 일대는 소문이 쫙 퍼진 거야 아님 지연 누나가 입을 턴 거야. 지민은 짜증 이 났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죽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술에 취해서 내일은 하나도 기억 못 할 텐데. 욕이나 실컷 하고 펑펑 울어서 밥이나 얻어먹어야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아니, 생긴 거요.”
딸꾹거리면서 어떻게든 말을 똑바로 하려는 게 이상했다. 대체 이 사람은 평소에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얼마나 많았던 거야? 이해할 순 없지만 궁금했다. 완벽한 사람의 결점이 란 다들 궁금해하는 거니까. 일단은 신발을 살살 벗겨주고, 소파로 그를 옮겼다. 애초에 이 렇게나 벌게지는 거면 술이 아예 몸에 안 받는 건데. 실적 1위면 충분히 거절하고 집에 와 서 잠이나 잘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왜 마셨을까. 이런 말들을 내뱉기 위해서인가? 내 일 아침 되면, 또 기억 안 난다고 하려고?
“생긴 게 뭐요.”
“...그 고양이도 이렇게 생겼거든요. 꼬질꼬질한 데다 털도 제대로 정돈되어있지 않은데, 다른 고양이들 데리고 다니는...본투비 연예인, 그런 거 있잖아요.”
“....”
술에 취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건가 싶었다. 지민은 점점 윤기를 알 수 없게 됐다. 조절은 참 잘할 거 같은 인간이 술에 푹 꼴아서 지연을 부르거나 지연의 집에 가는 게 아니 라. 오히려 자기 집에 와서 나한테 술주정을 늘어놓는다는 게. 이상하고 적응도 잘 안 돼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나, 나중에 이 사람 친구들한테 뒤에서 존나게 까이는 거 아냐? 지 민은 괜히 찜찜해서 심술이 났다.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걸로 짜증 나 는 사람이 아닌데. 이젠 제가 어른인지도 아이인지도 모르게 되는 마법이.
“칭찬이죠.”
“네?”
“난 그런 스타일 좋거든요. 허구한 날 수학 풀고 책 읽고...그러다 보니까 옆에 친구가 하 나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 지민 씨를 보면 꼭...속에 데킬라를 왕창 들이부은 거 같아요. 내가 지금,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잘 서술...된 말인지는 모르겠어도 칭찬이에요. 닿았으면 좋겠네요.”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요. 칭찬 한 번도 안 해 보셨네.” “칭찬이에요.”
“일단 잠 좀 자세요. 내일도 회사 나가셔야 하잖아요?”
“...양치, 해야 해요.”
내가 내일 그쪽 얼굴을 상쾌한 모습으로 보고 싶으니까. 복숭아를 보통 해장용으로 먹지 는 않잖아요. 지민은 그 말에 갑자기 얼굴이 벌게졌다. 뭐지, 대체 뭐지. 이 사람 이거 술 취한 거 아니네. 왜 갑자기 이렇게 막, 막 이래도 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다 하는 걸 수도 있다. 근데 확실한 건...그냥 존나 지금 몸이 제대로 기능을 못 하겠다고 판단해버렸다.
“...지연 누나가 싫어진 거예요?”
반은 진심이다. 사실 반보다 조금 더 보탰지만. 당연히 싫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그러나 진심은 놓아 지지 않았다.
“그건 아니지만 내일 아침에 양치를 두 번 하기에는 귀찮아서요.”
“...칫솔 갖다 드릴게요.”
은은하게 퍼지는 술 냄새가 싫어도 뭐 하나 바르게 나아지는 게 없었다. 벌써 삼 일이다. 삼 일 안에 사람들은 전부 빠져들고는 했었으니까. 항상 제 손바닥에서 노닥거리다 끝내 질 린다 싶으면 집에 들어갔었는데. 손가락마저도 빨아주려 하지 않는다. 칫솔 위에 치약을 짜 며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에 도대체 뭘까.
아무도 없는데. 그쪽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은데도. 화장실 밖으로 쳐다본 그 모습에 뭐 하나 비춰낼 수 있는 건 초라한 저밖에 없었다. 뭐 하러 나 같은 걸 좋아할까 생각이 들기 도 했다. 칫솔을 손에 쥐여주면서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민윤기가. 사람을 이렇 게 사랑해주는 것도, 흔하지 않다. 그려 낼 수도 뿌리 끝까지 표현해줄 수도 없지만 확실하 다.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건.
치약이 툭 떨어졌다. 정확히는 칫솔이 떨어지며 뭉개졌다. 윤기는 그새 잠들었단 소리였 다. 한숨만 나왔던가. 칫솔을 치울 겨를도 없이 민윤기를 업어서 침대 위로 데려갔다. 침대 위에 그를 눕혀 놓고 이불마저도 잘 덮어줬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어디 있지? 싶을 정도 로 나는 친절했다. 것도 과다하게. 양치는 두 시간 전에 했으니까. 지민은 윤기의 옆에 조용 히 누웠다. 매트가 살짝 꺼지는 느낌이 좋았다. 이불을 덮을 새도 없이 그렇게 잠들어버린 게, 체력을 저주하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