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카페에서 누군가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다. 찢어진 살이 붉은 선 혈을 내뱉고 있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지 다른 쪽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본다.
“민윤기!!!”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카페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온다. 그 사람의 입에서 터져나온 민윤기라는 이름은 분명 작고 검은 인영을 지칭하는 것일 게 분명하다.
“형 왔네.” “너 인마, 애가 연락도 안 받고!”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봐 줘.”
“... 뭔데.” “방금 그린 건데, 어때.”
형은 난감한 듯 아주 잠시 침묵했고, 잘했다며 입을 뗐을 때는 이미 윤기가 돌아선 후였다.
“됐어. 나도 알고 있는데 그냥 물은 거니까.”
“... 그래...”
윤기는 내밀었던 그림을 아무렇게나 구겨 카운터 쓰레기통에 꾹꾹 눌러 버린다. 아깝게 왜 버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말들은 다시 목구멍 속에 숨어버리고 만다.
“집에 가자.”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스케치북을 쑤셔 넣고 널부러진 색연필을 필통에 넣다가 그 중 두 개는 손에 집는다. 색연필에는 색깔의 이름들이 5살 쯤에 썼을 법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다. 형을 따라 카페 밖으로 나간 윤기는 달마저 보이 지 않는 검은 하늘을 한 번, 손에 들린 하늘색, 노란색 색연필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분명 내가 아는 것들이었는데, 점점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형은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십수 년도 더 지났음에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소중한 늦둥이 동생이 처음으로 색을 잃던 그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시작은 붉은 계열이었다. 윤기는 그렇게 좋아하던 사과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좋아하던 동화책의 삽화를 낯설어했다.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빨 갛게 염색했던 누나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치며 “누나, 깜장머리!”라고 했을 때였다. 그때의 정적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갔지만 모두 처음 듣는 일이라고만 했다. 그러는 동안 윤기는 차근차근 색을 잃어갔다. 적색, 녹색, 청색... 마지막으로 노란색.
“내일 학교 가지?”
“응. 가야지.”
윤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색을 잃고 난 이후로 생긴 버릇이다. 저러다 피라도 나겠다 싶어 말리려고 입을 뗀 형은 그보다 먼저 내뱉어진 말에 의해 가로막혔다.
“맞다, 친구 아는 동생이 우리 과로 입학했대.”
“그래? 그 친구랑도 친해지겠네.” “그거야 모르지.”
나랑 안 맞을 수도 있고. 뒷말은 삼켰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낯선 친구인 데다 봄이라 싱숭생숭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괴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윤기야, 우리 학교 후배였던 애가 조소과로 온다네. 너랑 같으니까 잘 좀 챙겨주라.‘ 카카오톡 채팅방 으로 보내진 두 문장에서 오는 묘한 느낌은 그래,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감정과는 확실히 달랐다. 쉬이 정의 내릴 수 없는, 그런 뒤섞인.
윤기는 뜬눈으로 밤새웠다. 불면증은 초등학생 때부터 있었다. 온통 흑백인 세상, 눈을 감으면 딱 검은색밖에 없는 좁은 공간. 밝기의 차이만 있는 검은색들은 윤기를 옥죄었다. 그 불쾌는 눈을 감았을 때 갑절 더 심해진다. 숨이 턱 막힌다. 떨리는 손으로 집었던 붓은 이내 바닥 으로 추락하고 푸른색의 물감이 걸어뒀던 바지에 튀었다. 윤기는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일 입으려던 바지는 검은색, 튄 물감의 색은 프러시안 블루. 허여멀건한 것이 튀었으면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윤기는 예의상 맞추어 놓은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어 갔다. 먼저 일어나있던 누나는 반갑게 웃었다. 윤기의 등을 팡팡 치며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 도 잊지 않는다.
“우리 막내, 오늘 파이팅?”
“... 응, 누나도.”
머리를 말리며 옷을 갈아입고, 아침으로는 대충 시리얼을 부어 먹었다. 더 먹지 않겠냐는
형의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윤기는 시계를 흘깃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_
“형, 나 걷고 싶으니까 좀 멀리서 내려 줘.”
“편하게 가지, 왜?” “그냥.” “알겠어.”
그의 바람대로 오 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내린 윤기는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나뭇잎을 바라봤다. 나뭇잎은 초록색, 이 타일은 주황색, 저기 달린 열매는... 빨간색이었나? 그럼 뭐 해, 색을 알아도 모르는데.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가족 외에 그의 상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였다. 아마 벤치 어딘가에 앉아있겠지. 직접 찾는 게 빠르겠다 싶어 윤기는 전화를 끊고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윤기야! 여기.”
“빨리 왔네?” “응, 할 말 있어서.”
시원한 포카리 한 캔을 건넨 석진은 왜 전화를 끊냐며 투덜거렸다. 윤기는 별다른 대답 없이 캔을 따 단숨에 들이켰다.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던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윤기를 끌어 앉힌다.
“색은 좀 어떻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고, 윤기는 대답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말 안 해도 알겠네.”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일어나려 했지만 그보단 석진이 빨랐다. 다시 자리에 앉히며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이민다.
“자.” “... 이게 뭔데?” “이름은 박지민이고, 신입생인 건 너도 알고. 곧 이쪽으로 올 거야. 난 먼저 간다, 바빠서!!”
“뭐?”
윤기는 더 짙은 어둠이 찾아오는 것도 무시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던 것에 석진의 도움이 컸던 것은 맞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건 중학생 때의 일이고. 지금은 나름 괜찮은데.
“얘는, 나를 알기나 하고?”
그래도 부탁받은 일을 소홀히 할 만큼 양아치는 아니라, 윤기는 정문 쪽을 힐긋 쳐다보지만 한참이 지나도 비슷한 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윤기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딱 오 분만 더 기다려 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는다면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벤치에 등을 기댄다.
_
지민은 이어폰을 꽂은 채 덜컹거리는 버스에 타 눈을 감았다. 유난히도 푸르른 하늘은 지민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 딱 좋은 요소다. 먹구름이라도 꼈으면 좋았을 것을, 구름마저 그를 하얗게 비웃었다.
그는 푸른색을 가장 싫어한다. 그 다음으로는 노란색이다. 노란 것보다 푸른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낮의 하늘은 푸른색, 바다도 푸른색, 태극기에도 푸른색이 있으며, 거리의 버스는 대부분 푸른색이며, 방 벽지마저도 하늘을 옮겨놓은 것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그의 검 은 세상에 노란색보다 푸른색이 많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버스는 학교 앞에서 멈추었고 지민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 이 남았지만 문제는 석진 형이 소개해 준 한 선배. 지민은 석진의 말을 곱씹었다. “학교 소개 해 줄 사람은 필요하지 않겠어? 민윤기라고, 너랑 같은 과니까 잘 지내봐.” 혹시나, 정말 그 선배가 자신을 기다릴까 봐 얼굴을 떠올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윤기가 시간을 다시 확인하며 이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저 멀리 비슷한 아이가 보 였다.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사람이 박지민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가 윤기를 보고 어! 하는 작은 소리를 내뱉었을 때다. 아예 사진을 받은 것인지, 휴대폰 한 번, 윤기 한 번 쳐다보고는 빠르게 달려와 윤기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민윤기 선배님... 맞으시죠?”
“네.”
둘은 어색하게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얼마나 끌어올렸는지 파르르 떨릴 지경까지. 그러다 시선이 엉켰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은 언짢은, 그리 좋지 만은 않은 감정이. 윤기도 마찬가지였다. 지민의 검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으니 어찌 좋은 감정이 들 수가 있겠나. 그렇게 애매한 기류가 흐르던 중, 지민은 잠깐
고개를 내린 사이 그의 바지 한쪽에 살짝 튄 물감을 발견했다. 푸른색은 흑백의 세상에서 너 무나 눈에 띈다. 지민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의 기분은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평소보다 그 색을 보기 편하다는 것.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 싶어 잠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봤지만 똑같이 불쾌했다. 윤기에게서 보이는 그 색만, 괜찮았다.
“그... 저기, 선배님.”
생각보다 괜찮아 모른 척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라 바지에 묻은 푸른 존재를 알려 주기로 했다. 그래야 닦든지 뭘 하든지 해 제 눈에 띄지 않게 할 것 같아서.
“바지에 물감이 묻은 것 같은데.”
지민은 혹시라도 윤기가 무안할까 봐 슬쩍 말을 건넸다.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없다.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 위한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한 일이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하니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민이 다시 한번 말하려고 입을 뗐을 때, 윤기는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대충 “그래.”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물감을 닦으려는 제스쳐는 취하지 않았다. 호의를 무시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윤기의 상황을 모르는 지민에게는 무시한 것과 다름없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슬금 보고 있으니 지민이 이상함을 못 느낄 리가 없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개뿔. 윤기는 입술을 꾹 물었다. 눈 꽉 감고 도와달라고 해 볼까? 근데, 쟤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무례할 수 있긴 하지만요.... 혹시, 제가 도와드려야 해요?”
지민은 표정을 잘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대답하기 전 잠시 머뭇거리던 것을 알아챈 지민은 윤기 대신 도움을 입에서 꺼내 작게 물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윤기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고, 지민은 작은 희망을 피웠다.
윤기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지민을 데리고 갔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난감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지민은 묻은 자국이 그리 크지도 않고, 앞부분에 있어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물감이 어느 부분에 묻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아마 새벽의 일 때문일 것은 분명한데, 당최 알 수 없으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달라고 말을 할까 말까, 윤 기는 몇 번이고 다시 고민했지만 쉽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이대로 흘러가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혹시 물감, 이 어디에 묻었는지...”
결국,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윤기의 말을 들은 지민은 놀란 듯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도 금방 대답해 주었다. 이쪽에 파란색 물감이 묻었노라고.
“고마워요.”
더이상 오가는 대화 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 소리만 화장실 안을 메웠다. 지민은 윤기의 말 을 듣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색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한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와 같은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 이제 된 것 같은데요?”
윤기는 수도꼭지를 내려 잠갔다. 별다른 말은 여전히 하지 않았다. 조용히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지민은 그에 따라 조용히 뒤따랐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 하자 여러 생각이 물밀듯 들어와 쿵- 쿵 심장을 시끄럽게 울렸다. 그냥... 던져 봐?
“그래도 바지가 검은색이고 물감은 되게 진한 색이라서 다행이에요. 선배님 윗옷처럼 살구색이었으면 엄청 티났을걸요.”
제발, 제발 걸려라. 일부러 색을 많이 언급했다. 지민의 속을 모르는 윤기는 ‘그렇지’ 하며 듣다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오늘 입은 게 그 색인가? 난 분명 하얀 셔츠를...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고, 정정하기엔 쟤가 일부러 저럴 이유가 없고.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어지럽게 엉켰다.
“저 오늘 살구색 셔츠 입었어요? 이상하...”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내뱉은 것은 차마 뒷말을 끝맺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멈칫한 지민을 보면서 든 생각은 단 하나. 아, 망했다.
“그, 제 말은...”
“선배님, 학교 구경 시켜주시고, 점심도 같이 먹으면 안 돼요? 저 학식 진짜 기대했는데 친구가 없어서요.”
결국 저항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_
윤기는 지금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얘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일렁이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고, 색을 못 본다는 것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눈치만 슬그머니 보는 와중에 지민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대학 로망 중에 하나였거든요.” “...많이 드세요.” “아, 그리고 아까 아침에도 말하고 싶었는데, 말 놓으세요. 저보다 네 살이나 많으시면서....” “그래도,” “제가 선배님 소리 입에 안 배서 그래요. 선배님은 저한테 말 놓으시고, 저는 형이라고 할게요.”
이게 무슨 막무가내인가 했지만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탓에 결국 “그래.”라고 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만족스러운 듯 웃은 지민은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달싹였다. 말해 보라는 듯 고개짓을 하니 지민은 고맙다며 바로 입을 열었다.
“형 혹시 김남준 교수님 수업 들은 적 있어요?”
“네, 아니, 응.” “어때요?” “팀플 좋아하셔.”
이후로도 단순한 대화가 오갔고, 밥을 다 먹어갈 때 쯤 지민은 머뭇거리다 조용히 형- 하고 불렀다.
“뭐 하나 더 물어도 돼요?”
“싫다고 해도 할 것 같은데.”
“눈치 빠르시네요.” “......”
“혹시, 이거 무슨 색으로 보여요?”
지민은 고민하지 않고 노란색 파프리카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윤기는 질문을 듣자마자 몸을 움찔거렸다. 제아무리 예상했어도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다. 보이는 것은 밝기만 다를 뿐인 검은색들이라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은 윤기 가 대답하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나는 검은색인 것 같거든요? 형은 어때요.”
저게 검은색일 리는 없다. 내게서 어떤 대답을 이끌기 위해 도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윤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민은 대답을 기다리며 돈가스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그냥 보이는대로 말해 줘야 해요, 꼭.”
지민의 목소리에는 왠지 사실을 끌어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결국 윤기는 “회, 색... 검은 색.” 이라 답하고 머리를 푹 숙였다. 왜 하필 밥 먹을 때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안 그래도 지민을 볼 때만 아픈 머리는 지금 특히 심하게 울렸다.
“형. 내가 뭐 하나 말해 줄까요?”
지민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다. 윤기는 시끄럽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고개를 슬쩍 들어 지민의 답을 기다렸다. 몇 초간 공중에서 시선이 얽히고, 또다시 속이 울렁거린다. 뱃속이 꼬인 듯, 또 어딘가는 간지럽게.
“일단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전 이거 노란색으로 보이거든요.”
“...” “근데,”
지민은 숨을 들이마시곤 이어서 말했다.
“다른 건 다 검은색으로 보이더라고요.” “...어?” “형만 까면 좀 억울할 것 같아서요. 저도 형이랑 거의 똑같아요.”
지민은 멍한 표정의 윤기를 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정말로, 나 말고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나만 버려진 게 아니었구나. 윤기에게서 푸른색이 보였어도 다른 때만큼 불쾌하지는 않았던 이유를 찾은 기분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물감 묻은 건 봤으면서.”
하지만 윤기는 지민과 달랐다. 지민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기만 했고, 그 모습을 보던 윤기는 다시 한번 물었다. “너, 색 안 보이는 거 진짜야?“ 라고.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게다가 석진 형 친구분이신데. 반가워서 말한 것 뿐이에요.”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윤기도 알고 있다. 그저 치부를 들켰다는 두려움 때문에 날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물론, 저 애를 보고 있으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린다는 것도 큰 한 몫을 했고. 지민은 혼란스러워하는 윤기를 두고 다시 입을 뗐다.
“저는 딱 두 개만 볼 수 있어요.”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로 브이를 만들었다.
“노란색이랑 파란색. 그래서 형 바지에 묻은 물감도 본 거구요.”
윤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나는.” “... 그래.” “동질감 이런 게 아니고...! 그냥, 왠지 형이랑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 뭐라고 해야 하지? 묘하게... 그런 느낌이 있어요.”
윤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쟤를 상대하면 기운이 쭉 빠진다. 깨작깨작 먹던 것을 슬쩍 내려놓고 곁눈질로 지민을 쳐다봤다. 염색 한 번 한 적 없을 것 같은 까만 머리칼. 아니, 아니지. 난 색을 모르니 검은색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쟤도 색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니 염색을 할 리는 없나. 빤히 쳐다보던 시선을 느꼈는지 지민은 고개를 들어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윤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너는 색을 볼 수 있으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래도.” “음....... 미술관, 이런 데 가 보고 싶어요. 색을 다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급히 지어낸 물음의 답은 허망했다. 미술. 윤기가 차마 손에 쥐지 못한 것. 그래, 색을 보면 예쁘겠지. 솔직히 말한다면 지민이 부러웠다. 단 두 색 뿐이라 해도.
윤기는 미술을 좋아했고 좋아하지만 색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배울 수 없었 다. 결국 중간점을 찾은 것이 조소이다. 물론 여기서도 색이 필요하긴 하다만, 다른 것에 비하 면 쓸 일이 없으면서도 아주 멀어지지는 않은 것. 그래서 평생 소원은 예쁜 물감으로 가득 채워진 나만의 팔레트를 갖는 것. 거기까지 멀어진 윤기는 급하게 생각을 털어냈다.
“... 다 먹었으면 갈까?”
“네.”
각자의 강의실을 찾아가야 하지만 어쩌다 보니 노선이 계속 겹친다. 윤기는 조용함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학생들의 시끄러운 소음이 주변을 떠돌았지만 그것이 둘의 침묵까지 파고들지는 못한다. 어색한지 자꾸만 멀어지는 윤기를 쳐다보던 지민은 조용히 그의 셔츠 끝을 잡아당겼다.
“왜 자꾸 벽으로 붙어요?”
“아... 내가 그랬어?”
“네. 형 지금 되게 멍한 거 알아요?”
지민의 말처럼 윤기는 넋이 나간 듯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걸었고, 그 위험한 행위는 계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민이 잠시 휴대폰을 꺼내는 사이, 윤기는 잡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낮은 첫 계단에 발을 디뎠다. 검은 타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바빠 윤기의 상태 를 눈여겨 보지 못한다. 잠깐 휘청거리는 것은 어젯밤의 숙취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는 이들이 여럿 있으니까.
아주 잠깐 사이 옆에서 멀어진 윤기를, 두 번째 계단에서 휘청거리는 윤기를, 지민은 놀라 단숨에 다가가 손을 잡아끈다.
“형, 형!!”
간신히 붙잡아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잡힌 손의 힘이 빠져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저 형도 놀랐나 싶어 아까보다 세게 잡았지만 그 행동은 이끌려 같이 쓰러지는 결과만 낳을 뿐.
분명 사고로 이어질 뻔한 것을 막았는데 대체 왜?
지민은 초조한 듯 보조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었다. 쓰러진 윤기를 업고 곧바로 주변 병원 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 탓이었다. 언제 눈을 뜰지는 아무도 모른다. 입학 첫날부터 수업에 빠지기는 뭐해 석진에게 연락을 해 두었지만 그 역시 들어야 할 수업이 아직 남은 바람에 윤기를 혼자 둔 채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가는 길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왠지 모르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죽죽 늘어뜨리며 간신히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의 말씀은 이미 멀리 보낸 지 오래며, 머릿속은 오직 윤기 형 언제 일어나지? 라 는 걱정 뿐.
윤기는 생각보다 더 오래 누워있었고, 그 덕에 수업이 끝나면 병원으로 가는 것은 지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쯤이면 깨어날 때도 됐는데. 의사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달의 숫자가 하나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윤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도 그를 찾아간 지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작 딱 하루 본 사람이고, 쓰러질 때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 외엔 아무런 접점이 없는데 왜 굳이 매일 찾아가는 것인지. 윤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떠올랐다. 마치 너는 그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지민은 다리를 꼬고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윤기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야외 작업장에 놓고 온 수첩이 생각나 걸어두었던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학교가 병원과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지민은 수첩을 챙기는 김에 작업장을 빙 둘러보았다. 한쪽 구석에는 지민이 윤기를 떠올리다 만들었던 동물 조형물이 있다. 의도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지민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수첩을 주머니에 찔러넣고는 혹시나 윤기가 깨어났을까 봐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아픈 사람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왠지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난다. 지민은 제 뺨을 툭툭 쳤다. 제발 생각 좀 그만 하라고. 속으로 되뇌며 신호를 기다리던 중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폰이 지잉- 지잉 요란하게 울린다. 발신자는 석진이다.
“네. 왜요, 형?” “지민아, 지금 윤기 일어났거든? 빨리, 빨리 와 봐.”
언제나 차분하던 석진의 목소리가 급박하다. 마음이 놓인 건지 전보다 한층 짐이 덜어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스물의 촉이 말해 준다. 지민은 신호를 무시한 채 병원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