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오늘도 교수님께 된통 깨졌다. 환자의 상태를 컨설팅해 교수님, 레지던트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에 고개를 툭툭 떨어트렸다.
“거기, 학생.”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툭툭 떨구며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것이 온전히 지민의 탓은 아니다. 모든 컨퍼런스가 끝나고 입꼬리가 찢어지게 하품을 하던 지민은 병원 정문 앞에 서 있는 하얀 머리를 가진 남자를 보자마자 “저 새끼를....” 하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형!”
지민과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입 동굴이 보이게 웃으며 지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윤기는 정문 로비에서 나오 는 지민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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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사이에는 접점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다른 고향, 다른 학교, 다른 취향 같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학과 훗날 되 고 싶은 꿈 딱 그 정도였다. 그런 둘이 만난 것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5월 축제 시즌이었다. 정기전에는 곧 죽어도 제 학교 이름이 앞에 와야 한다며 어린아이처럼 치고받고 하던 둘의 모교도 축제 시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네 학교가 내 학교고 내 학교가 네 학교지.라며 하나가 된다.
지민은 이제 곧 있을 PK 실습 직전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한다는 사명감에 절여져 있었다. 비단 지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눈에 불을 켠 하이에나들이 득실득실했다.
이번 라인업은 어른나 분홍검정 내코 나온다더라. 다들 봤어?! 월요일 아침마다 있는 시험을 얼레벌레 치르고 쓰러져있던 지민과 동기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말이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죽은 듯이 있었던 그들의 생기를 되찾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빨간 심장을 가진 그들도 파란 물결에 휩싸여 축제를 즐겼다. 넘치게 신났고 넘치게 재미있었다. 흥에 취한 동기들은 지민의 양 팔을 잡으며 뽕 뽑으러 가자며 수많은 천막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가 남아있는 곳에 착석해 파전 하나와 막걸리 두 병이요 를 외치는 동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청춘에 취한 듯이 2병으로 시작했던 처음이 무색하게 점점 병의 개수는 늘어 났고 그에 따라서 곧추세웠던 지민의 허리는 점점 흐물흐물해졌다.
지민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술 잘 마시기로 “나름” 유명했다. 그런 지민도 흐물흐물 제 팔을 끼고 천막에 들어온 동기들도 흐물흐 물 파전을 서빙하던 파란 청춘은 저들의 모습을 보고 큰일났네..를 연호하며 그들을 깨웠다.
“저기요. 일어나보세요.”
“으어..”
“저기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괜찮으세요?”
“어...ᄋ....”
준혁아 내가 할게 애쉬계열 머리색을 가진 얼굴 하얀 남자가 그의 손을 저지했다. 아는 사람이야? 음 곧 알 사이? 차가운 첫인상 과는 다르게 그는 방긋 웃는 게 귀여운 남자였다. 내가 이분 맡을 테니까 나머지 두 분은 네가 깨워 봐. 지민은 제 의지와 상관없 이 일으켜지는 제 몸을 보며 헤헤 웃었다. 우와 내 모미.. 움직여... 음.. 으아... 윤기는 그런 그의 잠꼬대에 입 동굴을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저의 과 천막을 제치고 들어온 지민을 본 윤기는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됐다. 하얀 얼굴에 뽀둥한 볼 그런 얼굴에 비해 날렵한 눈매와 마른 몸 선 제가 원하던 이상형이었다.
지민이 눈을 떴을 땐 싸구려 디퓨저 냄새가 났다. 음?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제 몸이 몸이 아닌 것 같음과 깨질 것 같은 머리의 고통이 느껴졌다. 또 제 몸을 감싸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뇌의 전두엽이 활성화되며 어젯밤을 기억해냈다.
지민은 단것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그것이 음식이든 자신을 대하는 태도이든 하등 상관없이 달콤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래서일까 제 옆에 누워서 색색거리며 자는 하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밤새도록 저에게 속삭인 달콤한 것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행색은 상관하지 않고 기본적인 것들만 주워 입고 방문을 열어 뛰쳐나왔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신발 은 제대로 신지도 못한 채 저를 향해 달려오는 택시에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자신이 있음을 알렸다. 택시에 타자마자 00동이요!를 외치고 지민은 쓰러졌다.
병원에서 제일 단정하고 반짝이는 구두에 구김 없는 가운을 입은 어려 보이는 사람들은 백발백중 PK다. 지민은 지금 그저 떨리는 마음만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병원은 무척 바빴고 PK 실습으로 온 학생들이라고 해서 우리를 챙겨주는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흰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노장의 교수님은 뱀처럼 여러 선생님을 꼬리처럼 달고 다니셨다. 흰 가운에 로퍼 를 신은 레지던트 선생님의 브리핑에 정신이 없었고 노장의 교수님은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학생 의사 DM(당뇨병)의 합병증에는 뭐가 있지? 라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했다. 물론 모두 어버버하며 죄송합니다만 외칠 뿐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긴 바늘이 5에 다다르자. 모두 짜고 친 듯이 일어나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며 줄행랑쳤다. 한결 가벼워진 지민 은 얼른 집에 가서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데워 먹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요”
낮은 목소리가 지민을 잡아챘다. 뒤를 돌아보니 솜사탕처럼 하얀 애쉬계열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지민은 갸우뚱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구지.. 뇌의 전두엽은 태엽을 돌리듯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기억 안 나요?”
“누구세요?”
“5월 신촌 막걸리 모텔이래도 기억 안 나나?”
모텔? 모텔.... 모텔... 천천히 돌아가던 전두엽이 멈추었다. 누군가 지민의 머릿속에 스크린을 내리고 그 스크린에 빛을 영사시키기 시작했다. 뻐근했던 몸과 깨질 것 같던 머리, 달콤했던 키스와 젖어있던 자신의 목소리
“어?”
“나 기억났죠. 왜 먼저 갔어요. 한참 찾았네”
윤기는 원래도 하얬던 지민의 얼굴이 더 하얘진 것을 보고 웃으며 얘기했다. 사람 사이에 정이 있는데 그렇게 홀라당 혼자 가면 쓰나. 눈 떴는데 옆자리가 허전한 걸 본 그 심정을 알아요? 지민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투성이였다. 분명 하룻밤의 불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 남자는 저의 모교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아니 애초부터 자신의 모교는 어떻게 알았지?
“ᄋ.... 어떻게 왔어요?”
“지하철을 타고 왔는데요. 합정에서 갈아타면....”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윤기는 웃으며 자신이 쥐고 있던 무언가를 지민에게 건넸다. 익숙한 검은색 메신저백인데 이게 뭐지.... 가늘게 떠 있던 지민의 눈이 동그래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걸 왜 댁이 가지고 있어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당신 그거 범죄예요. 왜 남의 것을 훔쳐요!”
“훔치다니 이게 뭔 개소리야.”
“훔친 게 아닌데 왜 제 가방이 그 쪽한테 있냐고요!”
“당신이 흘리고 갔고 그걸 내가 주웠다고는 생각 안 해요?”
멈췄던 전두엽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모텔을 뛰쳐나온 그 순간 제 손에는 핸드폰밖에 없었다. 세상 문명이 발달해 지 갑이 없어진 것을 알았지만 휴대폰으로도 결제할 수 있는 시대니까. 분명 제 동기들이 가방과 지갑을 챙겨줬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 다. 오늘 아침 정신없이 회진을 도느라 못 물어봤을 뿐 그리 믿고 있었는데.
“......”
“할 말 없죠?”
“주세요 가방.”
“싫은데요.”
“이제 진짜 절도예요”
“가방 받고 싶으면 밥이라도 한 끼 사던가요. 사례 뭐 그런 건 없나?”
“지금 제가 그쪽이랑 얼굴 보며 밥 먹고 싶겠어요?”
“안될 건 또 뭐예요?”
전 싫어요. 그냥 가방이랑 지갑 그쪽이 가지시던가요. 지민은 윤기를 지나쳐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 졸졸 따라오는 윤기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지민은 애써 모른척했다. 하룻밤의 불장난. 사실 싫은 건 아니었다. 윤기는 정말 달콤한 눈빛을 가졌 고 그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를 가졌고. 그보다 더 달콤한 미소를 가졌다. ‘근데 시작이 좀 그렇지 않나?’ 그런 생각이 둥둥 떠다니며 지민을 괴롭혔다.
“밥만 먹자는 건데 참, 사람 매정하네.”
“.....”
“밥 먹자고 애써 둘러댔지만 나 그 쪽한테 관심이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
“.....”
“반했어요. 첫눈에.”
하.... 기가 차다 듯한 지민의 한숨에 둘의 발걸음은 멎었다. 운명? 운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홱 뒤 돌은 지민은 낮고 곧게 윤기 에게 이야기했다.
“그쪽이랑 맨정신에 얘기한 시간 고작 오늘 5분밖에 안 되고요.”
“우리는 서로 알아가기도 전에 이미 배부터 맞춘 사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이 저한테 반했다면 그건 비정상이에요”
제 말만 하고 다시 뒤돌아선 지민은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윤기에 의해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제 가방을 인질 삼아 저와 밥 을 먹자며 제게 추파를 던지던 방금의 윤기와 제 손목을 잡아 되돌려 세운 윤기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쪽이 맨정신에 동기들이랑 얘기하고 술을 먹고 웃고 떠든 거 족히 1시간은 넘고요.”
“미안하지만 배부터 맞춘 거 그거 제가 당신 욕심나서 꼬신 거고요”
“이렇게 예쁜데 안 반하면 그게 비정상 아닌가?”
지민의 양 볼에 빨갛게 꽃이 폈다. 받아칠 말도 잊어 입만 뻥끗하는 지민을 보며 윤기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나 별생각도 없는 사람 꼬실 만큼 헤픈 놈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거든요? 협조 좀 해주시죠? 윤기는 지민의 어깨에 자 신의 손을 올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 근처에 엄청 맛있는 해장국집 있대요. 거기서 밥 먹어요. 우리”
“해장국?”
“메뉴는 좀 그럴 수 있지만, 우리 그날 같이 해장국 한 그릇도 못 먹었잖아요. 누가 먼저 가는 바람에”
“아니....”
“아아아아- 갑시다. 갑시다!”
지민은 윤기가 이끄는 대로 길을 나섰다. 그러면서 제가 이 사람한테 단단히 꿰였다는 것을 깨닫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