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잠에 취해 뒤척이는데 별안간 손에 무언가가 툭 하고 부딪혔다. 몽롱한 정신으로 더듬더듬해 보니 아주 단단하고 따뜻한 것이··· 잠깐, 따뜻? 아무리 내가 어제 개처럼 마셨지만, 설마 아니겠지 싶은 마음으로 잔뜩 부은 눈을 억지로 떴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정말이지 도로 눈을 감고 싶었다.
‘오. 신이시여. 지금 제 앞에 있는 너른 가슴팍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게다가 이 머리색은···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파졌다. 일단 급하게 옷가지를 챙겨 꿰어 입고 방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릴 시간 따위 없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시발.’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내 방으로 도망쳤다. 젠장, 사람을 어떻게 했길래 서 있는 건 물론이고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아파 뒤지겠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숙취도 장난 아니었다.
***
“도망가 버렸네”
어떻게 하나 잠자코 기다려봤는데 도망가다니, 그 조그만 머릿속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어제는 온갖 플러팅을 치길래 전부 넘어가 줬는데 말이다.
‘하는 짓도 생긴 것도 귀여워서 보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지금은 이렇게 도망가버렸지만 금방 다시 마주칠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만이 남았다.
***
“제이···.”
내가 방에 들어오는 소리에 룸메이트인 로완이 부스스 일어났다.
“파티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더니 뭐 하다 이제 들어온 거야? 그 제이가 외박이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뭐, 그럼 어디 있다가··· 너, 맙소사!”
로완이 놀란 눈으로 날 응시하다 곧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없지. 누가 너랑 자겠어? 너무 큰 비약이었네. 보나 마나 개처럼 마시고 어디 드러누워서 자다가 방에 들어온 거겠지.”
“아니거든!! 잤어!”
헙, 괜히 자존심이 상해 저질러버렸다. 망할 룸메이트 녀석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누구야? 테크닉은? 크기는 어땠어?”
“그러니까··· 아니, 잠깐. 내가 왜 아래야?”
로완이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에 휩쓸릴 뻔했다.
“그야 넌··· 잠깐! 제이, 그 화분에서 손 좀 떼줄래?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날 죽일 셈이야?”
“계속해봐. 네가 어떤 말을 지껄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뭐, 빵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알겠어, 알겠어. 미안.”
로완을 죽일 듯 노려봐주고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욕실로 들어섰다.
‘이걸 보고선 그딴 말을 한 거였어···.’
몸 상태가 아주 처참했다. 가슴은 얼마나 빨아 재낀 건지 팅팅 부어있고, 쇄골과 목에 가득한 키스 마크와 잇자국.
‘심지어 허리, 허벅지 안쪽, 발목까지. 아주 사람을 뜯고 맛봤네. 나 짐승 새끼랑 한 거 아니야?’
씻고 욕실을 나오니 이미 로완이 파스와 밴드를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제이, 혹시 짐승 같은 뭐 그런 거랑 한바탕한 건 아니지?”
“너도 그렇게 생각해?”
“선배로서 말해두는 거지만 이런 남잔 피곤해. 어떤 자식한테 걸린 거야?”
“하···. 나도 못 믿겠는데, 아마도 민.”
“진심이야? 민 이라고? 모두가 아는 그 민?! 이 앙큼한 여우 같으니라고! 도대체 어떻게 꼬신 거야?”
로완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민이 대학 농구 선수로 뛰는 데다가 실력도 좋아서 대학에서 꽤 이름을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이스도 괜찮아서 인기가 많다나 뭐라나. 또, 엄청난 철벽으로도 유명하단다. 하지만 사실 난 농구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른다.
“민이 그런 질척한 스타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꽤 진심인 거 아니야?”
“윽···.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로완. 적어도 우린 어제가 초면이었어.”
어느새 로완은 내 허리를 안마해 주고 있었다.
“혹시 몰라. 민의 짝사랑 일지도?”
“왜 이래? 한동안 애인도 못 만들고 방에 박혀있어서 미쳐버린 거야? 아악, 악! 으으···.”
“닥쳐 제이.”
분명 활짝 웃으며 말하는 얼굴인데도 살벌함이 느껴져 순순히 항복했다.
“미안, 미안.”
그렇다고 허리를 죽일 듯이 주무르다니.
‘사악한 자식.’
그래도 로완이 안마해주고 찜질도 해줘서 다행히 사람처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로완. 새벽부터 챙겨줘서 고마워.”
“천만에. 내 친구의 첫 경험을 최악으로 남길 순 없지!”
‘그 입만 좀 닥치면 끝까지 고마웠을 텐데.’
나는 애써 웃으면서 로완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오늘은 내가 점심 살게 나가자.”
“사랑해, 제이!”
***
오늘은 날이 좋아서 서브웨이에서 대충 점심을 사고 로완과 캠퍼스에 자리 잡았다.
“제이, 여기서 민이랑 마주치면 어떡할래?”
”걔를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미국 대학 캠퍼스가 얼마나 넓은데.’
그리고 이런 인파 한가운데서 날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난 그날과 달리 거지 같은 뿔테안경도 썼으니까.
”나도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주변이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던 소로리티 애들은 허겁지겁 거울을 꺼내어 들여다보면서 매무새를 정리했다.
‘최악이네.’
어디 가서 무교라고는 말 못 하겠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나 신을 찾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 신이시여.
”찾았다.”
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저 푸른 하늘색 머리칼은 분명 민이다.
”와우. 찾았다는데, 제이?”
캠퍼스 안의 이목을 제대로 끌었다. 정말 끔찍하군.
‘미쳤어. 이 상황은 부담스럽다고! 안경까지 썼는데 어떻게 찾은거람!’
”어제··· 읍.”
다급히 민의 입을 막았다. 정신이 나간 건가. 아주 대학 전체에 소문을 내려고 작정했나 싶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장난해?”
”그럼 나랑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래?”
”뭐?”
갑자기 민이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뛰기 시작했다.
‘얘... 얘,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람은 너무 당황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가보다. 도와달라는 의미로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니 로완이 상큼한 윙크를 날려주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잘해봐!”
‘잘해보긴 무슨 엿이나 먹으라지!’
농구 하는 애라 그런지 악력이 장난 없다.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난 그대로 끌려갔다.
”세상에, 엘린! 네 짝사랑 상대가 저러는 건 처음 보는데?”
엘린이라는 학생은 얼이 빠져서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곧 상황을 인지했는지 분한 말투로 소리쳤다.
”저게 무슨, 쟨 어디서 굴러온 호박이야!”
뒤에서 엄청난 말이 들린 것 같지만 무시하자. 소로리티 애들이랑 엮이면 감당할 수가 없다.
‘사실 이미 틀린 것 같지만.’
***
“여기면 괜찮겠지. 그나마 캠퍼스에서 한적한 곳이야. 그나저나 그 뿔테안경 귀여운데?”
나는 민에게 잡힌 손을 풀며 말했다.
”뭐 하자는 거야.”
”네가 사람들 시선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조용한 곳으로 데려온 거지.”
그 잘생긴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오른다.
”웃기시네. 유감이지만 거기서 날 데려온 것부터가 이미 실수야.”
”하하, 맞지. 무작정 끌고 온 건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망갈 생각이었잖아.”
‘잘 아는군. 재수 없는 놈.’
”오늘 새벽처럼 말이야. 일어나자마자 내 가슴을 더듬거리길래 한 판 더하자는.... 읍”
”너 깨어있었어?!”
민의 입을 막고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다급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다 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건, 그냥 잠결이니까!!”
민은 내 손을 잡아 내리면서 말했다.
”뭐, 그렇다고 해두자.”
그렇다고 해두기는 무슨! 하지만 더 이상의 말싸움은 진절머리가 나서 나는 빠르게 대화를 끝냈다.
”그럼 이제 된 거지? 너같이 인기 많은 애가 나랑 왜 섹스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제는 그냥 실수야. 우린 불장난을 한 거고, 오늘부터 다시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거야 알겠어?”
내 말을 들은 민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는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섭섭하네. 난 아무하고 안 자.”
순식간에 내 얼굴은 확 붉어졌다.
‘이건 또 무슨 뜻이야.’
얼굴은 더럽게 잘 생겨서는, 심지어 내 취향이다.
‘이래서 술 퍼마시고 들이댄 건가.... 취해서도 얼굴은 밝히는구나.’
”괜찮아? 얼굴이 너무 붉은데.”
다가오는 손을 피하고 소리쳤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아무튼, 내 말 명심해. 나, 난 이제 갈게.”
그렇게 그곳에서 황급히 벗어나 나는 주말 내내 기숙사에 틀어박혔다.
‘어차피 수업 시간도 다르고 겹치는 과목은 나만 잘 피하면 되겠지.’
***
‘...는 무슨!’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대놓고 날 찾고 있잖아!
‘내가 자자고 매달린 거 말고 더 잘못한 게 있나?’
그렇게 일주일 동안 캠퍼스를 돌아다녀도 농구장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과목이 겹치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뛰쳐나가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느새 대학에서 나는 민의 고양이가 되어있었다.
“민, 또 고양이 찾는 거야?”
“응. 자꾸 나만 보면 쏜살같이 도망가더라고.”
”저런. 어떻게 생겼는데? 나도 도와줄게.”
”음... 귀엽게 생겼어.”
”뭐? 좀 더 자세히...”
”귀엽게 생겼어.”
”아..., 으응....”
이러다가는 ‘민의 고양이를 찾습니다’라고 대자보라도 붙을 기세여서 어쩔 수 없이 민을 찾아갔다.
“안녕, 키티.”
‘저 재수 없는 능글맞은 웃음!’
”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네가 나만 보면 도망가는 게 꼭 고양이 같아서. 맘에 안 들어?”
”후....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도망 안 갈게.”
‘대학에 민의 고양이라고 소문나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시발.’
”그럼 인사라도 받아줘.”
또 그 표정이다. 이상하게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면 거절할 수가 없다.
”알겠어.”
민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깍지꼈다.
“그리고 저번에 네가 너무 급하게 가버려서 못 물어봤는데, 그 밴드들 키스 마크 때문이지? 미안해. 곤란하게 만들어버렸네.”
‘그래! 존나 곤란했어!’
“그런데 그날 네가 자꾸 매달리는 게 귀여워서 어쩔 수가···.”
“그만, 그만!! 그날 일은 꺼내지도 마. 알겠어? 솔직히 진짜 쪽팔리거든!’
민은 자신의 짓궂은 질문에 잔뜩 심통이 나서 귀엽게 튀어나온 제이의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젠장, 키스하고 싶다.’
민은 제이에게 갈증을 느끼는 자신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싫다면 뭐, 안 할게. 그럼 점심은 내가 살 테니까 나하고 캠퍼스 한구석에서 같이 먹어줄래?”
“뭐?”
“나 너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이렇게 훅 들어오는 멘트는 반칙이지. 이런 플러팅은 진짜 반칙이다. 얼굴과 목 뒤가 화끈화끈한 게 느껴졌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좋아! 그럼 내일 보자, 키티.”
‘그놈의 키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날 좋아하나?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내 마음속을 서서히 물들이는 하늘색을 애써 덮었다. 솔직히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직 이 감정을 마주 볼 자신이 없다.
‘그리고 나 같은 애가 민이랑 어울릴 리가.’
***
‘젠장....’
귀가 뜨겁다. 그냥 반응만 보고 조금 놀려주려 했는데.
‘그렇게 귀엽게 올려다보는 건 반칙이지···.’
아무래도 내가 당해버린 것 같다. 중요한 건, 이런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는 거겠지. 그리고 제이 앞에서 내 자제력은 0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완전히 사랑에 빠진 꼴이다.
***
“안녕, 키티.”
갑작스러운 귓속말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더니 민이었다.
”깜짝 놀랐잖아. 그리고 사람 많은 데서 그렇게 부르지 마!”
설마 여기서 그 이름으로 부를 줄이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정말 끝장이다.
“그래서 내 인사는 안 받아주는 거야?”
잘생기게 웃는 민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철벽으로 유명하다더니 그거 분명 다 개소리다.
“···안녕.”
“응. 그리고 데이트, 잊은 거 아니지? 나중에 봐 키티.”
민은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몇몇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고 최대한 민과 먼 자리에 앉았다.
“엘린 저번에 걔가 분명해. 뭐 저런 별 볼 일 없는 애가!”
”진정해 코트니. 그렇게 열 낼 필요는 없어. 내가 더 예쁘잖아?”
”당연하지! 엘린, 민은 그냥 심심풀이로 저러는게 분명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남의 것의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
나는 어느새 대학의 흔한 가십거리가 되어있었다.
‘민의 고양이로 말이지···.’
누가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그 중엔 나에 대한 비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냥 심심풀이 주제에 제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애인가.’
복잡한 마음에 캠퍼스로 나왔지만,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엿 같아졌다.
‘이런 식으로 기죽어있는 건 사양이야! 연습실에나 가야겠어.’
나의 유일한 도피인 무용. 정신없이 춤에 집중하면 잡생각 따위는 금방 사라진다.
“키티!”
“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그나저나 저 호칭은 바꿀 생각이 아예 없나 보다. 솔직히 이젠 나도 포기했다.
”자, 이거 받아.”
‘갑자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요즘 피곤해 보이길래.”
그러면서 씩 웃는 게 꽤 설레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이러니까 진짜 애인 같잖아···.’
”고마워 잘, 마실게.”
”내가 좋은 장소 알아냈는데, 갈래? 분명 너도 맘에 들어 할걸.”
”응, 가자.”
이건 커피가 고마워서 순순히 따라가 주는 거다. 저 기대에 찬 표정이 귀여워서가 아니다. 절대!
***
“와아! 너무 아름다워···.”
민이 날 데리고 간 곳은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는 캠퍼스 한구석이었다. 날씨도 따뜻하고 봄이기도 해서 더 아름다웠다.
”원래 여기 아무것도 없었대. 그런데 교수님 몇 분이 화단으로 가꾸어 놓으신 것 같더라.”
”난 전혀 몰랐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나 교수님들이랑 꽤 친해.”
‘선수로 뛴다길래 학업에는 별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자기가 하는 일은 전부 충실하게 노력하나 보네.’ 소문이나 남의 말만 듣고 만들어진 민에 대한 어떠한 틀이 깨진 것 같았다.
“좀 의외지?”
“아니.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해. 뭐든 열심히 하는 건 좋은 거잖아?”
“···고마워.”
이런 사소한 칭찬에 고맙다며 입동굴을 만들어 웃는 모습이 순간, 화면 속의 청춘 드라마 같아서 멍해졌다.
“내가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게 보면 좀 부끄러운데.”
“노, 농담하지 마!”
민은 가볍게 농담을 던진 후, 제이의 모습에 급히 눈을 돌렸다.
‘젠장, 얼굴을 발갛게 물들여서는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 ···너무 사랑스럽잖아.’
민은 갑자기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더니 어느 화단 앞에 떨어져 있는 페어리스타 몇 송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살며시 내 귀에 꽃을 꽂아주고 말했다.
“미안, 이걸로 봐줘. 귀여운 게 꼭 너 같아서 너한테 주고 싶었어.”
하늘색이 자꾸만 내 백지를 군데군데 물들인다. 아무리 하얀색으로 덧칠해도 계속 물들어간다. “...철벽이라더니 플러팅 기술이 너무 화려한데?”
“어디서 들은 건데, 사랑은 쟁취하는 거래. 그리고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게 되잖아? 난 그거 마음에 안 들어. 물론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 건 키티, 너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그건! 그리고 걱정 안 했거든?”
”다행이네.”
아. 이젠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하얀색을 덧칠해도 하늘색은 끝끝내 내 백지를 전부 물들이고 말 거라는 걸. 마냥 부담스럽게만 다가왔던 민을, 더 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절대 말 못 하겠어!’
”나 이제 강의실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 그러니까, 그, 꽃... 고마워.”
난 그대로 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무작정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많은 꽃 중 하필 페어리스타라니!’
민의 진심이 가득 담긴 듯 꽃 몇 송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처음 사랑의 맛을 본 어린아이같이 구는 나 자신이 한심한데, 분명 그럴 텐데. 눈치 없이 가슴은 자꾸 뛴다.
민은 멀어져가는 제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다 아쉬운 듯 농구장으로 향한다.
‘오늘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입안이 쓰다. 네가 아직도 날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문득 그 거지 같은 소문이 스쳐 지나간다.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인가?’
마침 그 소문의 근원이 될 만한 사람이 생각나 민은 급히 농구장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
“엘린, 나랑 얘기 좀 할래?”
민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엘린을 불러냈다.
“오, 당연하지! 코트니, 먼저 갈래?’
코트니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엘린에게 잘해보라는 제스쳐와 함께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민이 먼저 엘린을 찾아오는 건 처음이야! 드디어 그 호박에게 흥미가 떨어졌나 보네. 이참에 그 호박이 자기 분수를 제대로 알게 해야겠어.’
코트니는 운 좋게도 건물을 나오자마자 제이를 발견했다.
”얘!”
제이는 꽃을 기숙사에 가져다 놓고 연습실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뒤돌아봤다.
‘나 부른 건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에 생각에 잠기려는데 다시 그 학생이 소리쳤다.
”그래, 멍청하게 쳐다보는 너 말이야!”
‘갑자기 뭐? 멍청?’
나는 썩어가는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그대로 받아 치려고 했지만 뒷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민이 강의실 309호에서 기다린대.”
‘초면부터 무례한’ 그 학생은 이 말만을 남기고 가버렸다. 아마 민의 추종자 같은 그런 거겠지.
‘그런데 우리 조금 전에 헤어지지 않았나? 왜 부르는 거지?’
무엇인가 이상했지만 기다린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강의실 쪽으로 향했다.
***
코트니가 강의실을 나간 후 민의 사람 좋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무표정만이 자리 잡았다.
“본론만 말할게. 소문, 네가 한 거야?”
”맙소사, 내가 그런 저급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
”못 믿는 거야? 뭐, 좋을 대로 해. 그런데 너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 아니었어? 난 루머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애초에 나는 그 애가 너랑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겠거든.”
민의 표정이 점차 싸늘해져 갔다. 엘린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입을 더 열지 않았다.
”그럼 너는 그 망할 ‘재미’에도 해당이 안 되는 거네.”
”뭐?”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말이야. 안 그래?”
엘린은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가 생긴 건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좋아해. 진심으로. 날 고등학생 때부터 지켜봤던 너라면 아주 잘 알겠지. 그래도 오늘은 나 같은 놈한테 몇 년이나 허비한 게 안타까워서 기회를 주는 거야. 다음은···.”
끼익-
민과 엘린은 소리에 놀라 강의실 문을 쳐다보았지만 제이의 가방만이 떨어져 있었다.
”젠장, 제이!!”
다급히 제이를 뒤따라가려는 민을 엘린이 잡았다.
“여기 있어. 내가 따라갈 테니까.”
”뭐라고?”
“네가 가면 상황만 더 나빠질 게 뻔해. 내가 가는 게 나아.”
이 말을 남기고 엘린은 빠르게 제이를 쫓아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민은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멍해졌지만, 다시금 정신을 붙잡았다. 갑자기 엘린이 자신을 도와주는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도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강의실 309호에 도착했더니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전화 중인가···.”
혹시 몰라 가까이서 들어보니 민의 목소리가 맞았다. 하지만 어떤 여자의 목소리도 같이 들렸다. 목소리만이 들릴 뿐 대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기에 교수님일까 싶어 살짝 문을 열었더니 민이 말했다.
“좋아해. 진심으로.”
떠올랐던 기분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게 느껴졌다. 같이 있는 사람은 소로리티 멤버인 엘린. 엘린이 민을 좋아하는 건 이 학교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나는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뒤 내용은 들리지도 않았다. 민이 내뱉은 두 마디가 맴돌 뿐.
‘소문이 진짜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