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본 민의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절대 거짓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알고 있지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뒤에서 민이 날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도저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못 들은 척 해버렸다.
건물에서 나와 정신없이 뛰다 보니 어느새 그 화단까지 와버렸다. 눈물은 눈치 없이 계속 흐르고 괜히 더 서러워지는 기분에 정말 목 놓아 울어버릴까 봐 이 장소를 벗어나려 했던 찰나였다. 누군가 날 덥석 붙잡았다.
“하아, 하. 너, 달리기 빠르네.”
‘엘린···?’
민에게 놀아난 나를 비웃어주려고 따라온 건가 싶어 내 기분은 더 비참해졌다.
“비웃으려고? 맘껏 웃어. 나도 그런 개자식한테 놀아난 나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니까!”
“제이, 어디서부터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지금까지 엘린의 따가운 눈초리는 수없이 나를 향해왔다.
‘그런데 굳이 따라와서 그 상황에 대해 해명을 한다고?’
갑작스러운 엘린의 태도 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정확히 민이 너한테 좋아한다고 하는 걸 들었어!”
“···네 얘기를 한 거였어.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단지 민은 지금 떠도는 소문 때문에 날 찾아온 거야.”
“······.”
엘린의 말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붙들어 간신히 섰다.
‘우연히 그 말만 듣고선 나 혼자 의심하고, 오해한 거야?’
진짜 바보 같다 나. 그냥 내가 불안해서 도망친 거야.
‘그리고 소문 같은 건 이미 신경 쓰지도 않는데, 나 때문에···.’
“나 고등학생 때부터 민을 좋아했어. 잘 보이려고 별짓을 다하면서 쫓아다녔지. 그래서 알아. 그 애는 너한테 진심이야.”
“···왜 이렇게까지 해?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못돼먹은 년은 아니거든? 민의 관심을 다 가져가 버린 네가 부러워서 그런 거야. 몇 년을 노력해도 가지지 못한 거니까. 악감정 같은 건 없어.”
“그럼 소문은···.”
“내 친구인 코트니가 날 위한다며 떠벌리고 다닌 거야. 하지만 나도 말리지는 않았으니 결국 같은 거지. 미안해.”
“·········.”
“솔직히 처음에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지 모를 호박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알고 보니 호박 마차를 타고 온 신데렐라일 줄이야. 내가 좀 더 예쁘지만, 너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왕자님이랑 잘해 봐.”
”그 말은,”
“포기했어. 지금까지 그냥 내가 오기로 매달린 거지. 민이 나한테 한 말들로 결심한 거야. 그리고 세상에 남자가 민 하나야? 민보다 잘생기고 거시기 큰 남자는 널리고 널렸어!”
결국 나는 엘린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맞아, 맞는 말이지.”
“그렇지? 그러니까 울상인 채로 기죽어 있지 마. 넌 최고의 미녀 엘린님도 못 꼬신 남자를 넘어오게 한 거니까.”
“고마워, 엘린.”
“천만에! 얼른 가봐. 너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놈한테.”
‘민, 이걸로 몇 년 동안 너를 귀찮게 했던 일은 갚은 거야.’
어느새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민이 내 눈에 들어왔고, 망설임 없이 뛰어 민에게 안겼다.
엘린은 그런 둘을 보고 돌아섰다.
“제이, 괜찮아?”
평소답지 않게 내 눈물 자국에 안절부절못하는 민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받았던 꽃의 답을 할 때가 됐다.
“오늘 준 꽃, 아직 유효한 거지?”
“어, 어?”
사실 내가 표정에서 다 티가 난다는 것을 안다. 민은 진작에 내 대답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역시, 직접 전해주고 싶다.
“빨리 대답이나 해.”
“···당연하지.”
“그 대답이야.”
나는 민의 옷을 잡아당겨 무작정 입술을 맞댔다. 민은 당황한 듯 잠시 멈춰있었지만 곧 나를 꽉 끌어안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꽃잎이 잔뜩 휘날리는 캠퍼스 한구석에서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이제는 두려움 같은 건 전부 버렸다. 누군가 말했듯이 표현하지 않으면 기회는 떠나버려.
‘그렇게 놓쳐버리기에는 이 사람, 너무 매력적이니까.’
이다음은 어떻게 됐냐고? 알 게 뭐야.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고, 다시 잡고···. 이런 것들이 무서웠으면 애초에 시작도 않았겠지. 여전히 잘 살고 있으니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다.
※페어리스타(Catharanthus roseus) 꽃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