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下
지민이 갑갑함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어제 눈물의 여파인지 퉁퉁 부은 눈을 버겁게 뜨자 마자 윤기의 맨 어깨와 잠에 빠진 민둥한 얼굴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엥? 맨 어깨? 지민이 윤기의 팔에 감긴 제 몸을 더듬어보았다. 아니, 얘는 왜 옷을 벗고 자. 깜짝 놀랐네. 살짝 윤기의 팔을 풀고 등을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뒤에서 제 허리를 감아왔다.
"자는 거 아니었어?"
"너 움직이자마자 깼어."
지민이 묻자 윤기가 눈도 뜨지 못하고 다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못 벗어나게 하겠다는 듯 더 가까이 제 몸을 붙이고선 뒷목이며 어깨선이며 입술이 닿는 대로 쪽쪽거렸다.
"뭐야, 우리 사귀는 사이야?"
지민이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묻자, 괘씸하다는 듯 이로 어깨를 살짝 물었다.
"그럼 뭐, 나 먹고 버리려고 했어?"
"뭘 먹어. 키스밖에 안 했는데 네가 내내 우는 바람에 달래주다 잠든 건데."
"아무튼간에."
지민이 반박하려는데 윤기가 다시 목덜미를 물고 빨며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너 어제부터 되게 자연스럽다?"
"내가 이러고 싶었던 게 언제부턴지 알면 너 함부로 말 못 할 걸."
뻔뻔하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윤기는 더 뻔뻔한 태도로 나왔다. 그래, 이게 민윤기 지... 지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제 좋아한다며 잔뜩 민둥한 얼굴로 울던 민윤기는 고등학 교 2학년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순둥이고. 뻔뻔하고 능글맞고... 아주 능구렁이야, 능구렁이. 늘 이런 식으로 시작을 주도하는 건 지민이었고, 금세 주도권을 넘겨받아 끝까지 집요하게 구는 건 윤기였다.
"이거 놔. 나 좀 씻자."
"싫어."
고집불통, 뻔뻔한 민윤기. 지민이 조용히 이씨... 중얼거리곤 제 허리를 감싼 윤기의 팔을 앙하고 물어버렸다. 윤기가 당황한 그 잠시 틈을 타 화장실로 도주했다. 윤기가 멀리서 야, 박지민 너 진짜! 소리치더니 그새 화장실까지 달려왔지만, 지민은 메-롱 혀를 내밀었다.
나란히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면서도 두 사람은 한참을 투닥거렸다. 분명히 엇비슷한 일상임에도 괜히 더 간질거리고 조금 울렁였다.
간단히 아침을 해먹은 후 티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손을 붙잡고 소파에 딱 붙어 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다 불현듯 윤기가 지민에게 물어왔다.
"근데 어제 그 종이"
"응?"
"네가 어제 들고 온 서류."
"아... 그, 네가 나한테 7년 내내 숨겼던 내용이 죄-다 담긴 그 서류?"
지민이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되묻자 윤기가 당황했다.
"아니, 그게 그... 미안하다니까... 진짜 잘못했어..."
"그게 왜?"
"그냥 할아버지 뵙고 저녁 먹고 온다더니 나간 지 저녁은 무슨 한 시간 만에 돌아와서는 울고 있으니... 갑자기 궁금해져서."
"할아버지가 주셨, 아."
지민이 말을 하다 멈춰버리자 윤기가 왜?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한 지민이 윤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나랑 결혼할래?"
"...뭐?"
"따지면 약혼이긴 한데."
"너...는 무슨 결혼하자는 말을..."
윤기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
"너는 무슨 결혼하자는 말을 만난 지 하루 만에 티비나 보고 있는데 할 수가 있어...?" "뭐야, 그래서 싫다고?"
"누가 싫대? 어디서 나온 얘긴지도 모르고 덥석 결혼하자고 할 수 없잖아."
윤기가 전혀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계속 지민을 바라보자 지민이 짧게 어제 일을 설명 했다.
"난 그런 얘기 들어본 적도 없는데."
"나도 어제 들었으니까. 네가 아버지한테 연락 드려봐."
"그래야겠네. 통화 좀 하고 올게."
윤기가 지민의 볼과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이 닫힌 침실문을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흔들거렸다. 이 아주 잠깐을 견디지 못하고 보고 싶었다. 손잡고, 끌어안고, 입 맞추고 모두 꿈이 아니었음을, 서로를 오랜 시간 같은 마음으로 바라 봐왔음을 계속 확인받고 싶었다.
생각보다 윤기는 금방 나왔다. 소파에서 양팔을 벌리고 윤기를 바라보자 씩 웃으며 다가 와 꽉 끌어안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아버지가 뭐라셔?"
"우리 의견을 최대한 따르시겠다고. 둘이 고민해보고 전달해달래."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윤기가 지민의 옆자리에 다시 자리 잡자 지민이 윤기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윤기는 한참을 생각하다 지민의 손을 붙잡곤,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으로 운을 뗐다.
"내 아버지나 네 할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과 다르게 우리가 정식으로 사귀게 된 건 사실 어제가 처음이잖아. 우리가 약혼하겠다고 해도 곧바로 진행되진 않겠지만 결국엔 결혼보다 조금 약한 제도에 우리를 가두게 될 텐데. 그러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 싶어. 만약 우리가 약혼을 진행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연인이기만 한 게 아니라 너희 기업과 우리 기업을 잇는 다리 역할도 하게 될 거야. 당연히 2~3년 내로는 결혼 이야기가 오갈 거고, 난 네가 원한다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너는? 괜찮겠어?"
윤기는 지민이 한참 고민하리라 짐작했으나 지민은 예상외로 너무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태연하게 씩 웃어 보이며.
"너는 내 마음이 어느 정도로 가볍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언제부터 이러고 싶었는지 알면 너야말로 함부로 말 못 할걸?"
제가 아침에 침대에서 뒹굴며 건넸던 말을 앙큼하게 반복하는 지민에 윤기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난 널 어차피 절대 못 이기니까.
"그래도 네 말대로 조금 이른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해.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어? 할아버지한테 연락 드리고 올게. 너도 아버지한테 다시 연락 드려."
"어?"
지민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건넨 말에 윤기는 놀라 지민을 바라봤다. 당연히 너라면 약혼도 결혼도 두렵지 않다, 정도로만 받아들인 윤기 입장에서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지민의 말은 곧 반년 뒤에 약혼식을 치르자고 집안에 전달하자는 의미와 같았으니까.
"뭘 멍하게 있어. 나랑 결혼하기 싫어?"
지민이 어깨와 눈썹을 동시에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답하려던 윤기는 그냥 일어서 지민의 허리를 붙잡고 여러 차례 입 맞추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 술이 교차될 때마다 가벼운 웃음이 터지고 지민의 허리는 뒤로 점점 넘어갔다. 으악-! 단 말마와 함께 지민과 윤기가 다시 소파로 엎어졌다.
"야아, 무거워..."
지민이 낑낑거리며 제 위의 윤기를 밀어내려는데 윤기는 지민의 허리를 더 꽉 감싸 안고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지민아."
"응"
"자기야..."
조용히 웅얼거리더니 고맙다고 연신 반복해댔다. 지민은 어리광을 부리는 윤기의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조곤조곤 다 답해주었다.
"지민아..."
"응"
"좋아해"
"나도 좋아해"
"고마워"
"뭘 자꾸 고맙대"
"그냥 다..."
"자기야"
"응, 지민아"
"사랑해."
"...내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