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
처음-中
지민이 주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윤기에게 물었다. 신발을 벗으며 지민의 물음에 답 하던 윤기가 지민을 보곤 물었다.
"뭐야, 밥해?"
"응"
지민의 뒤에서 윤기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얼굴을 지민의 어깨에 묻고 후... 숨을 뱉었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숨결과 종종 스치는 입술. 지민이 살짝 어깨를 움찔거렸다. 약속했던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 스킨십의 농도를 정해 놓지 않다 보니 이 정도는 습관이었다.
"안 그래도 너희 집에 얹혀사는데 일도 네가 하면 나는 뭐 하라고."
"넌 손님이거든? 왜 자꾸 일하려 그래."
방학에 들어선 후 지민은 자신의 집에 윤기를 초대했다. 원래도 독립해 기숙사에 살아왔고, 두 사람의 부모님이 모두 바쁘신 편이라 당연스레 둘이 함께 지내왔기에 이번 방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둘이 있을 때마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은 예외였지만.
"얼른 씻고 나와. 나 할 얘기 있어."
"몸으로 할 얘기?"
윤기가 능글맞게 물으며 허리를 쓸어내리자 지민이 윤기의 팔을 내려쳤다.
"뭐래 진짜-! 저리 가!"
윤기가 큭큭 웃으며 사라지자 지민이 손등으로 제 볼을 누르며 열기를 식혔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둘은 '몸의 대화'라고 부를 만큼의 스킨십은 한 적이 없었다. 나만 두근대고, 나만 설레지 또. 나만 의미 부여하고... 지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윤기가 이런 식으로 대놓고 플러팅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발언을 일삼은 건 한 달 정도가 되었다지만, 어떻게 저 혼 자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가끔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 뭐... 저런 애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내 잘못이지.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다가도 울컥 울컥 소리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햇수로만 8년 차였다. 냉랭하게 생겼는데 말을 걸면 민둥하니 멍해지는 얼굴. 낮고 조용한 목소리, 말투에 집중해서 들어야만 살짝 티 나는 어눌한 한국어. 몸에 밴 다정함,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씩 웃을 때. 한참을 눈을 마주치면 보이는 결핍과 왠지 모를 외로움마저 전부 지민을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이고, 몸을 베베 꼬게 만들었던 과거 윤기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둘은 많이 변했지만,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2년 전쯤 제대 이후 제 마음을 정리했다고 믿었지만... 지금 이 꼴을 보면 당연히 실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기에게는 제가 할아버지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한 이유를 오해하게 두었다. 널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아직 고백 한 번 못 해봤는데 사랑도 없는 유부남 딱지 달기 싫었다...라고 굳이 정정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니 경호실장님 얘기 를 빼놓을 수 없는데 첫째 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보시더니 둘째 주에는 이틀에 한번, 셋째 주에는 3일? 4일? 두어 시간 지켜보시다 가셨고 이번 주에 들어선 후에는 뵌 적이 없었다.
경호실장님을 처음 학교에서 뵀을 땐 할아버지도 전화를 안 받으시고, 누가 봐도 감시하 러 온 듯한 수상한 모습에 얼마나 놀랐던지. 하다못해 짝사랑하는 친구가 자기랑 만나자고 하지라도 않았음 몰라. 아주 엉망인 날이었다, 그날은. 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 기가 그 자리를 떠난 뒤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 그리고 나선 바빴지... 급한 대로 죄송하다는 장문의 문자를 할아버지에게 보내고 한참을 윤기가 한 말을 되짚어봐야 했다.
"나 왔는데. 할 얘기 있다더니."
윤기가 주방과 거실 사이 서랍장에 기대 턱을 괴고 지민에게 말했다. 잠깐 과거 회상에 들어갔던 지민을 깨어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곧 꺼내게 될 얘기를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앉아서 기다려. 거의 다 됐어."
"네~"
윤기가 장난스럽게 답하자 지민이 픽 웃어버렸다. 그러곤 저녁이 준비되기까지 실없는 대 화만 오갔다.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계속 기숙사 살 거야? 잘 모르겠어, 너는? 네가 계속 살 거면 나도 살고. 우리 졸업하고 나서 동아리는 어떻게 될까, 원래도 인원 부족인데. 없어 지면 조금 속상하겠다. 우리가 신입생 때부터 유지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러니까. 매 번 우리가 드는 동아리는 왜 이렇게 인기가 없냐
. . .
"나 내일 할아버지 뵈러 가."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지민이 꺼낸 말에 윤기가 사레에 들려 콜록거렸다. 에고... 지민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윤기에게 물을 따라 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눈에 벌겋게 핏줄이 올라오고 눈물이 고였으면서도 저를 걱정하는 표정에 지민이 작게 웃어 보였다.
"글쎄... 보통 이렇게 단둘이 보자고 부르시는 경우가 많진 않아서. 급한 일이면 전화 주 셨을 거니까. 아무튼 저녁 밖에서 먹을 것 같다고 얘기하려고."
"그래, 뭐. 얘기 잘 나누고. 들어올 때 연락 줘."
회장직 내려놓으신 지 한참 됐으면서 왜 회사로 부르신담... 지민이 생각하며 최상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은 어머니 사무실일 건데. 띵- 엘리베이터 문 이 열리자마자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표정의 어머니가 지민을 붙잡았다.
"지민아,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셔도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마. 응?"
인사도 없이 당부의 말이라니 지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는 사람이 남자라 그런가.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는 말씀드린 적 없었지. 헤어지고 선 보라고 하시려나. 지민 이 생각할 수 있는 할아버지가 주실 충격은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니까...
"네가 만나는 아이, 송월 그룹 장남이더구나,"
"네...?"
이런 식의 충격은 예상외였다. 그냥 어디 작은 회사도 아니고 송월 그룹이면 경영에 관심 없는 저는 물론이고 길에 가는 사람 열 중 일곱은 알 만큼 큰 기업이었다. 근데 뭐...? 민윤 기가...? 그 사실 자체 뿐 아니라 그걸 윤기가 여태 제게 숨겼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네가 열여덟일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던데, 그때면 네 어미한테 회장직을 넘기기도 전이었고... 여태껏 용케도 내가 모르게 잘도 숨겼군."
할아버지가 말씀을 이으시며 내민 윤기의 정보 서류를 홀린 듯 집어 든 지민은 또 한 번 큰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만... 나이가... 나랑 동갑이 아니네...? 아니 잠깐만, 여동생도 있어? 지민의 표정이 계속 어둡자 할아버지께서는 헛기침하시곤 목소리 톤을 조금 바꾸셨다.
"흠, 이 자리에만 앉으면 왜 이렇게 목소리가 무거워지는지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그쪽 회장이랑 좀 아는 사이니, 너희만 괜찮다면 약혼을 진행했으면 한다고..."
웃으며 다정한 말투로 꺼낸 얘기에도 지민이 대답 없이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지니 할아버지는 급하게 말을 덧붙이셨다.
"물론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없다. 난 네가 먼저 알았으면 해서... 물론 네 나이가 있다 보니 약혼이라도 부담스러울 수 있단 건 안다.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그 친구랑 의논을 좀 해보고..."
"저... 할아버지..."
"그래, 말해봐라."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될까요? 워낙 갑작스럽기도 하고..."
지민이 반쯤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양해를 구하자 할아버지는 더이상 억지로 대화를 이 끌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안녕히 계세요, 들어가 볼게요... 지민이 인사를 건네고 회장실 문을 열고 나갈 때도 할아버지는 붙잡지 않으셨다. 문을 열고 나와 오른편 벽에 기대자마자 어머니가 잔뜩 걱정하는 표정으로 달려와 지민을 불렀다.
"아들..."
"전 괜찮아요, 엄마."
습관적으로 대답하고 지민은 털썩 쭈그려 앉아 할아버지가 제공한 모든 정보를 빠르게 정리했다.
1. 민윤기는 송월 그룹 장남이다.
2. 나보다 한살이 많다.
3. 여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4. 큰 이변이 없다면 약혼을 진행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내가 진짜로 윤기를 만나고 있다고 믿고 있으신 것뿐만 아니라 내가 크게 거 부하지 않으면 약혼까지 진행하실 정도로 호의적이신 것도 충격인데, ...잠깐만. 아까부터 들 었던 묘한 이질감이 갑자기 구체화 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민은 윤기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할아버지는 제가 만나는 사람이 윤기인지 몰랐을 뿐이지 송월 그룹의 장남 이름 이 민윤기라는 사실은 알고 계셨다. 5년 전 회장직에서 물러나신 할아버지가 알고 계신다면 현재 회장직에 계신 어머니가 모르실 리 없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는 제 가장 가까운 친구가 윤기라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신다는 것. 어쩐지 과하게 걱정 을 하시더라니.
"어머니."
"내가 약혼은 너무 이르지 않냐고 최대한 말렸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지. 미안해, 엄마도 네가 윤기랑 만나는지 몰랐어서 대비할 시간이 없었어,"
"아뇨,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알고 계셨어요? 윤기가 그 민윤기인 거?"
"......"
"...알고 계셨네요.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주시고."
"아들, 지민아. 그게 아니라."
"가볼게요. 죄송해요. 지금은... 그냥... 죄송해요."
"뭐야, 저녁 먹고 온다더니. 벌써 왔어?"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도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작 지민을 미치게 한 장본인은 앞치마 를 입고 태연히 인사를 건네고 있으니... 왠지 모를 배신감에 제 손안에서 잔뜩 구겨진 서류 를 내밀며 이게 뭐냐고 따져 물을 생각이었는데.
"표정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었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이 온통 걱정된다는 듯한 모습에 울컥 눈물부터 났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꼴사납게 이게 뭐야. 지민이 선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 자 윤기가 당황해 달려왔다. 왜를 연발하며 허둥지둥 저를 안아 달래려는 모습에 지민은 손 이 닿는 대로 윤기를 때리기 시작했다. 울음과 뒤섞여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을 텐데 윤기는 일단 미안하다고 반복하며 지민을 다독였다.
"좀 진정됐어?"
"...나한테 할 얘기 없어?"
울음이 잦아든 후 소파에 앉은 지민에게 윤기가 물을 한 컵 건네며 물었다. 지민은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역으로 되물었다. 무슨 할 얘기? 의아해하는 윤기의 표정에 지민이 다 시 울먹거리며 여전히 제 손에 쥐어져 있었던 서류를 집어 던지듯 건넸다. 갑자기 웬 종이? 싶었던 윤기의 표정은 내용을 확인하곤 확 어두워졌다.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려갈수록 윤 기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서류를 끝까지 읽은 후 책상에 내려놓은 윤기가 지민의 눈치를 봤다. 지민은 더 말을 꺼내지 않고 원망의 눈초리로 윤기를 바라봤다.
"지민아."
뭐라도 말을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에 윤기가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뭐라고 먼저 말을 꺼 내야 할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라도 말할 권한이 없다는 거 알아."
"...7년이야."
"......"
"너랑 내가 알고 지낸 게 꼬박 7년이라고. 여태 어떻게 한마디를 안 해줄 수 있어?"
생각할수록 억울해 지민이 또 울먹이기 시작하자 윤기가 다시 허둥거렸다.
"뭐라 말해도 다 핑계처럼 들릴 거 아는데 정말 일부로 그런 건 아냐."
"......"
"너랑 처음 만났을 때는 아버지며 집안이며 조금 서먹할 때였어. 그 후부터 지금까진 도 무지 언제 얘기를 꺼내야 할 지 몰라서 미루고 있었어.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어떻게 안 중요해. 지민이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켜냈다. ...생각해보니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 윤기가 저를 친구삼은 이유가 집안이 아니듯 지민 또한 그랬으니까. 그래도 (진짜 연애는 아니지만)만나기 시작했을 때는 얘기해 줄 수 있지 않은가. 혹 이런 얘기가 오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나? 우리 감시하러 경호실장님 오신 걸 본인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봐놓고?
여전히 지민의 눈치를 살피는 윤기에 비해 지민은 생각할수록 괘씸했는지 점점 인상을 썼 다. 그러더니 대뜸 소파 쿠션을 윤기에게 집어 던졌다. 화가 난 걸 표현은 해야겠고, 다치게 는 하기 싫고.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쿠션을 받은 다음 제 무릎 앞에 곱게 내려놓은 윤기도 그런 지민의 마음이 느껴져 터질 뻔한 웃음을 꾹 눌러야 했다. 여기서 웃으면 진짜 큰일 난다... 마음을 다스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지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네가 송월 그룹 장남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실을 나한테 숨긴 게 중요한 거라고. 그리고 네가 숨긴 게 그거 하나야?"
"...아니."
"......"
"...미안."
"사과하라는 거 아냐.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듣고 싶어."
"나이는 나가서 살다 들어왔을 때 한 살 아래로 밀렸는데 안 그래도 친구 관계 다 형성됐을 시기에다 곧 수험생이었고, 외국에서 와서 충분히 어색한 상황에 나이까지 많다는 사실 을 알리고 싶지 않았어. 그래 봐야 고작 한 살이고..."
"......"
"동생이 있는 건... 조금 더 복잡한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아버지랑 집안이랑 서먹했던 이유이기도 한데. 날 낳으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셨어. 그리 고 여섯 살에 동생이 생겼지. 어머니는 나한테 잘해주셨고, 동생이랑도 가까운 사이였지만 정작 유일한 혈연인 아버지랑은 조금 어색했어. 다 크고서야 해주신 말씀이지만 날 보면 어 머니가 생각나 날 원망할까 봐 어렸을 적에 거리를 두셨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쯤 에는 아주 후회하셨고. 유대감을 형성할 시기를 다 놓쳤으니까. 내가 너무 외로워 보였대.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게 더 심해지는 것 같았대. 그래서 밑져야 본전 환경 변화라도 줘 보자 싶어 무작정 가족들이 다 같이 한국으로 들어왔어."
"......"
"그리고 내가 널 만났지. 학교 얘기를 물으면 네 얘기를 한참 했대. 매번 지민이, 지민이.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진짜 즐거워하는 게 보였대. 고작 몇 달 지났을 뿐인데, 그 긴 시간 축적된 외로움이 전부 사라진 것처럼. 그게 보이니까 더 미안하셨대. 원래는 저런 아이였겠 구나, 싶으셔서. 이미 한참 늦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용서를 빌고 아버지 노릇을 하려 들 생각은 없지만, 내가 원한다면 해줄 수 있는 선에선 무슨 지원이든 해주시겠다고 하시면 서... 그냥, 이게 전부야."
"......"
"네 앞에선 집안도, 가족 관계도, 나이도 상관없이 그냥 민윤기일 수 있었으니까. 난 그게 좋았어. 물론 다 얘기했었어도 넌 그대로였을 거란 거 다 알지만, 얘기할 의무를 크게 못 느낀 것 같아. 그 시간이 길어지니까 너한테는 상처란 거 알아. 나도 그 생각을 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알리긴 정말 싫었는데, 도무지 타이밍을 모르겠더라고."
"......"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돼. 다시 보기 싫으면 다시 보지 말자고 해도 돼. 다 내 잘못이니까."
"...그럴 생각 없어."
지민이 울망해진 얼굴로 제 무릎을 끌어안으며 웅얼거렸다. 저 눈으로 저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니까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잖아. 더 화를 낼래야 화를 낼 수 없었다.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람의 모르는 부분을 다른 사람한테서 듣게 된 충격과 배신감이 신중히 골라 내 뱉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녹아 사라졌으니까.
"일어나."
윤기가 엉거주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당장 가서 안아 달래줘야 하나 싶은 표정 으로 안절부절못하다 조심스럽게 지민에게 물었다.
"나, 뭐, 짐 싸서 나갈까?"
웃으면 안 되는데, 아직은 조금 화난 듯 보여야 하는데 지민이 픽 웃어버렸다.
"헛소리 하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윤기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쭐레쭐레 와서 옆자리에 앉더니 슬쩍 지민의 어깨에 팔을 감쌌다. 졸지에 윤기의 오른편 어깨에 머리를 기댄 꼴이 된 지민은 뿌리칠까 고민하다 그냥 그대로 안겨있었다. 코를 흥, 하고 들이마시자 이번엔 왼손이 여전히 무릎을 안고 있는 지민의 팔 위로 얹어졌다.
"너 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속상한데 오늘은 내가 울린 거라 할 말이 없네."
조용히 중얼거리는 윤기에 지민이 머리를 살짝 들었다, 콩하고 윤기의 어깨에 박았다. 작 게 웃음이 터지고 정적이 흐르는 동안 지민은 생각에 잠겼다. 윤기는 평소에도 종종 저런 얘기를 하긴 했었다. 그땐 그냥 유난이거니, 저러니 내가 오해하지 혼자 속으로 삭이고 넘어갔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살짝 고개를 들어 보니 온통 붉게 달아오른 귀하며 제 심장 박동이라 생각했던 윤기의 심 장 박동하며... 내가 완전 이성을 되찾기 전에 한 번 저질러봐? 싶을 정도로 오해하기 딱 좋 았다. 윤기는 생각보다 담력이 없고 겁쟁이라 매번 사람 착각하게 쿡쿡 찌르고 빠지기만 했 다.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니까. 지금 이성도 없고 덜 겁쟁이인 내가 하는 수밖에 없지, 뭐. 지민이 깊게 숨을 내쉬고 물었다.
"나한테 말 안 한 거 더 있지 않아?"
"응?"
지민이 윤기를 올려다보며 묻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 오는 게 제법 순진한 얼굴이라 지민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민은 더 말을 꺼내지 않고 눈만 마주치다 살짝 시선을 내려 윤기의 입술을 잠시 응시하곤 다시 눈을 맞췄다. 윤기도 제 노골적인 시 선을 느꼈는지 목울대가 꿀렁이더니 제법 티 나게 지민의 입술로 시선이 향했다. 거봐, 이렇게 티나면서. 왜 말을 먼저 안 꺼내나 몰라. 지민이 씩 웃었다.
"너, 지금 나한테 키스하고 싶지."
질문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지민의 질문에 윤기가 홀린 듯 답했다.
"...어."
"해, 허락해줄게."
지민이 마지막 말을 끝마치자마자 윤기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부딪쳐왔다.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제 허리를 꽉 감는 윤기에 지민도 윤기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몸 이 훅 넘어가고, 입술 새가 벌어지며 체액이 섞였다. 지민도 먼저 말을 꺼내며 태연한 척했지만 몇 번이고 꿈꿔왔던 일이기에 조금 벅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달뜬 숨이 살짝 멎고 지민이 눈을 뜨자 저보다 더 울 것 같은 윤기의 얼굴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귀엽고, 안 쓰럽고, 사랑스럽다. 웃어버리며 다시 윤기의 목을 꽉 끌어안자 제 목, 턱선, 볼을 다시 입 술을 찾아왔다.
"뭐가 그렇게 급해, 응? 나 계속 여기 있을 거잖아."
"...좋아해, 좋아해. 내가..."
"알아, 바보야. 나도 좋아해. 울지 말고. 착하다, 응..."
. . .
보통의 밤은 깊고 길었으나, 먼 길을 돌아 겨우 진심을 마주하게 된 날의 밤은 너무나도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