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하루를 마주하는 법은 단순하다. 어제와 똑같이 사는 것이다. 햇빛은 여전히 내려오 지 않는 대학교 안에서 박지민은 24시간이 아직 남아있기를 바랬다. 해가 밝아온다. 또 해가 밝아서 나를 괴롭힌다. 현재 토스 잔고 243원에, 청소부 B는 여전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까? 결국 모닝 체크를 하고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화장실에서 자는 게 분명 처음은 아닌데 불행 하게도 매일 아침 풀어주던 근육이 제대로 뭉쳤다. 잠을 잘못 잔 것이다. 핸드폰은 어제부터 계속 따뜻했는데 이유는 네 명의 쓰레기가 아직 저를 못 잊었기 때문이다.
폰 충전할 시간도 없는데 멍청이들은 자기들이 눈치가 없는 줄도 모르고 잘 지내? 보고 싶 다. 연락 좀 해. 나 아직 네가 존나게 그리워. 같은 인스타 감성 문자들을 보내는 게...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것이다. 14 퍼센트는 저에게 있어 좋지 않은 숫자다. 15%도 10%도 아닌 애매 한 숫자, 하지만 아침까지 넷이서 정답게 술 퍼마신 모양이신지, 동시다발로 문자를 보내고 지랄들이었다.
익숙하게 가방에서 양치 도구를 꺼내고 세안 도구도 꺼냈다. 집이 없다. 집이 없어서 이런 거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만약 페브리즈가 없었다면 지민은 지금쯤 모두에게 멸시받았 을지도 모른다. 일단 얼굴을 반듯하게 씻어주고, 여행용 샴푸로 머리도 박박 감는다. 눈도 꼭 꼭 씻어주고 입도 야무지게 닦아주면, 모두가 매일같이 바라보는 그 박지민이 된다. 물이 뚝 뚝 떨어져 흰 대리석을 적시고 수건으로 얼굴을 어루만져줬다. 일종의 경락 코스프레다.
문을 꼼꼼하게 잠그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오늘도 당연히 잠겨있지 않은 강의실 이 있다. 지민은 그곳에서 호텔에서 가져온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물론 훔쳐 온 게 아니 다. 나름 외국물 마신 드라이기라서 흰 영어로 KOIZUMI 라고 쓰여있다. 러브호텔 직원이 제 가 너무 예뻐서 선물로 드리겠다고 준 건데, 솔직히 아직도 왜 선물을 드라이기 따위로 받았 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유용하게 쓰고 있다. 기억에 남은 건 두 번째 쓰레기와의 첫날 밤뿐 이었지만.
그 사람 참 잘생겼던 거 같은데. 하고 웅웅 하고 시끄럽게 울리는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며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했다. 요즘 들어 피곤해서 자위 하나 못 했는데, 그냥 미친 척 아무나 잡아서 딜도로 쓸까? 했으나, 접었다. 지민은 이제 더는 문제아 같은 게 아니니까. 사실 누구 하나 잡으면 다들 재워준다. 근데 어젠 너무 피곤해서 핸드폰을 잡을 기력도 없었고 술에 꼴 아 화장실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 결과 이렇게 자취를 계속하게 됐다.
사람들은 똑같다. 제가 기지개를 켜도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지나가고 새는 날아간다. 나는 걷는 법을 까먹은 적이 없고 새도 나는 법을 잊은 적이 없다. 당연하다. 애초에 인간은 한 번 배운 건 평생 써먹으니까. 예를 들어 이 나쁜 버릇은 놀랍게도 제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다. 공허한 복도를 걸어가며 처음 봤던 새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새 아빠는 아직도 못생겼고 성격도 구린 데다가 쓰레기지만, 엄마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사람이었다.
필요한 사랑이란 뭘까 싶었다. 제가 만난 것은 죄다 멍청이들이라 엄마처럼 죽임당할 정도로 매달릴 수 있는 사랑. 잔인해 보이지만 너무 절박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우는 얼굴로 입꼬리를 찢고 있었다. 사실 그냥 엄마는 살해당한 거고, 새 아빠는 살인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 마지막 순간까지 아파하면서 사랑했을까? 이걸 이해하면 심연에 빨려 들 어가서, 점점 멍청해질 것만 같다. 그래서 이해하는 걸 13년째 미뤄왔다. 아마 열여섯에 나는 집을 나왔으니까. 지금 이렇게 경영학과에 당차게 몸 담그고 있지만, 이 모든 건 누나들이 뒤 를 지켜줬기 때문이다.
지민은 외동이 아니다. 위에만 다섯의 누나가 더 있었고, 지민은 사실상 막내였다. 안 그래도 뼈 빠지게 가난한 집에 식구는 여덟이라서, 흡사 다 망해가는 공장을 보는 느낌이었으나 누나 들은 열심히 일했다. 그저 내가 예쁘다는 이유로 말이다. 방금 건 살짝 장난이 들어가긴 했어 도 반은 진심이다. 가족이 모인 술자리에서는 여전히 이쁨받고 있기 때문이다. 철도 없고 돈 도 없고 가진 것도 고작 토스 잔고 243원가량 뿐이지만, 어쨌거나 불행한 시절은 거의 기억나 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불행하다면 불행했고 행복하다면 행복하다. 정말로. 그리고 고이즈미 드라이기는 긴 시간 동 안 잘 버텨주고 있다. 그 직원 이름이 아마 하루였던가? 그랬을 거다. 두 번째 쓰레기는 부자 였다. 그래서 직원들마저도 얼굴로 뽑았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런 상상은 그만하고, 지민은 자퇴에 대해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고려해야 했다.
방금까지 러브호텔 생각에 잔뜩 전두엽을 망가트리고 있었으나, 러브호텔에서 자취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대학교 화장실에서 몰래 사는 판에 마땅히 돈을 마련해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누 나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알바를 해도 알바비가 쪼들리는 건 사실이기에. 지 민은 가방을 뒤지다 껌을 발견해서 바로 꺼내 먹었다. 꼴이 참 추했으나 대학교 문은 곧 열릴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나오는 자퇴서 양식을 벌써 달달 외운 거 같다. 가방에서 또 꺼내든 건 이미 헤질 대로 헤져 쭈그러진 자퇴서였다. 아직도 쫄려서 박지민 석 자밖엔 안 써놨다. 진짜 왜 이래.
이렇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비리 하나 없이 악착같이 공부해서 그렇게나 원하는 경 영학과 들어왔더니, 장벽은 참 높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취할 돈이 없어서 대학교를 자퇴한 다니 이 이유를 들으면 다섯 누나는 기함하며 쓰러질 가능성이 컸다. 한숨만 나오는 게 당연 하긴 했다. 오늘은 약속이 몇 개나 잡혀있지, 하고 투두리스트를 봤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하 긴 어제 배터리가 없어서 하나도 쓰지 못했다. 할 일보다는 음악감상이 먼저다. 박지민은 적 어도 그런 사람이라고 저를 정의한 지 오래였다.
“...좀 자는 게 맞겠지?”
지민은 결국 화장실 칸에 다시 들어갔다. 어제 먹은 술이 올라오기라도 하는 건지 속이 별로 안 좋았다. 나지막이 변기에 눌러앉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구역질이 몰려와서 바닥에 놓아뒀던 가방을 밟고 헛디뎌서 변기에 얼굴을 박고 구토를 했다. 참...제 꼴이 보기도 싫었다 고 해야 하나. 지민은 겨우 숨을 골랐다. 속이 안 좋을 땐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그럼 결국 잠이 오고는 한다. 가방을 베게 삼아 베고 자면 목이 아팠으나, 변기 뚜껑에 찌그러진 아저씨 흉내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학생, 학생!”
“네, 네?”
“오늘도 여기서 잤어?”
“아 뭐...그렇죠.”
“친구 집에서라도 자지는.”
“마땅히 은혜를 갚을 여력이 안 돼서요. 하하.”
지민은 변기 물을 내리며 칸에서 나왔다. 두어 명 정도가 미심쩍은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으 나, 지민은 그들을 흘겨보며 똑같이 대응했다. 애초에 화장실 칸에서 나왔음에도 몸에서 샤넬 향수 향이 난다는 데에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페브리즈 따위가 막을 수 있는 향이 아닐 까. 화장실에서 자취한다는 새끼가 왜 고급스러운 향이 나냐고 물어볼 깡은 없을 테니까. 시 간표를 확인할 겨를이 없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강의에는 늦었다. 당연했다. 어제 네 번째 쓰 레기가 다시 만나자고 술을 왕창 먹이는 데에 마음 약한 제가 걸려들어 줬기에. 후회하고 있 긴 했다. 나는 대체 왜 그깟 비싼 양주 맛이 그렇게나 궁금했을까. 손을 씻으면서 여전히 남 아있던 술집에 은은하게 퍼진 향수의 향을 상상했다.
“야, 박지민.”
김태형은 항상 아침에는 화장실에 들른다. 왜인진 몰라도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 금하단다. 정상이라면 그런 건 대충 넘겨짚고 말 것이다. 맨날 뺑글한 안경만 쓰고 다니는 변 태 새끼...시계를 확인 해 보니 9시 30분을 조금 넘어있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속은 여전히 울렁거리고만 있었다.
“뭐,”
“윤성태가 뭐라고 안 해?”
“그 새끼 거세해버릴 거 내가 그냥 참고 나왔다. 됐어?”
“아니,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어제 네가 술집에서 제대로 토낀 거 때문에 걔가 나 붙잡고 한 달 용돈 다 썼다고 존나 징징대서,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부잣집 아들내미 주제에 양주 30병에 쫄고 지랄이네.”
“...쫄 만 하네 그건. 지 애비 차 훔쳐 타서 사고 내가지고 용돈 반절로 줄었잖아.”
“아 진짜? 걍 15병 더 시켜서 바닥에 깨트리는 건데....”
“미친놈.”
작게 말하는 그 단어들은 언제 들어도 속을 벅벅 긁는다. 지민은 욕을 하려다 참았다. 오늘 부터 대인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으니까. 태형은 손을 씻고 탈탈 털었다. 강의 잘 들어라? 이 미 좆망 했겠지만.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유유히 화장실에서 사라졌다. 지민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이제 이 개 같은 학교 더는 안 다닐 건데. 지겹게 봤던 유리광이 반짝이는 대리석 벽돌이 싫었다. 오늘 박지민은 이 학교를 자퇴할 예정이다. 물론, 상의는 하나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줏대라고는 하나도 없는 제 결정이다.
한숨만 나온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까. 화장실에서 언제까지 흐린 자신을 마주 해 야 하는 지 나도 그 누구도 모른다. 대학교를 자퇴한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누 나들과 다르게 저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이젠 누가 챙겨주지도 않는데.
업보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람들을 망치고 다녀서 그럴 수도 있다. 원래 이쪽 취향이 아닌 사람을 이쪽으로 만들어버려서. 누군가를 울게 만들고 하는 게. 지난 몇 개월 동안 너무 재밌었다. 잠시 미쳐있었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복도에는 잘생긴 놈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다 고 자위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모두 나를 가지고 손가락질 해대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쳤다기엔 눈만 가린 정도지만.
그래, 나는....
- 너, 이거 박한서한테 다 말해버린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고.
누나들이 지금까지 좋게좋게 만나고 있었던 사람들을 전부 내 걸로 만들었다. 항상 저를 도 와줬던 누나들이 도와주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는 몰라도 항상 손길이 주둥이가 먼저 행동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저에게 결혼반지를 건네고 있었 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당연하게도 내 뺨을 때리고, 불같이 화를 냈다. 여전히 애정과 희망을 바라고 있는 나는 시선 속에 던져졌음에도.
이기적일 수 있다. 나는 괴로웠다. 한 시라도 애정을 쥐지 않으면 불안한...그럼 주변에 친구 가 없겠다고? 몸에서 샤넬 향수 냄새가 나던, 세인트로랑 티셔츠를 입었던. 박지민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유일하게 친구를 못 사귄 놈이다. 그마저도 다섯 번째 누나가 레즈비언이라 다행 인 거다. 만약 다섯 누나들의 애인을 전부 독차지했다면 아마 나는 매장당했을지도 모른다.
김태형은 그저 너무 오래 봤기 때문에 가끔 아는 척을 하는 거였다. 아마 걸어 다닐 때부터 쭉 같은 곳에서 대화를 나눴으니까. 동정도 어쩌면 그 애랑 같이 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건 벌써 2년 전이고, 현재에 충실해야만 했다. 신장을 팔던 콩팥을 떼던 돈을 구해서 집을 구해야만 했다. 당장 대학교에서 언제나 잘 순 없다. 매일같이 몸에서 샤넬 향수 향이 날리도 없다. 네 개의 쓰레기는 내 집 주소를 모르니까.
“야 박지민.”
“왜.”
“손에 든 거 뭐냐?”
김태형이 갑자기 에너지바를 건네줬다. 넋 놓다 옥상 올라갈 뻔했는데, 가끔 이놈은 사람을 살리고는 하는 거 같단 생각이 스쳤다. 아까 가방에서 꺼내고 실수로 변기에 살짝 빠트려서 더러워진 자퇴서가 다섯 손가락 사이에 있었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올걸. 쪽팔리게...그 멍청이는 자퇴서? 하고 크게도 말했다. 조심성은 존재하지만, 그 새끼에게서 조심성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네가 왜 자퇴를 해. 친구도 많으면서.”
“내가 무슨 친구가 있어....”
“남자친구 네...아, 아 아파!”
“그것들은 남자도 아니야. 그냥 구제 불능 구더기라고.”
“...또 갈증이 들끓으시겠어요. 옆에 사랑을 줄 누군가가 없어서.”
“갈증이 끓기 전에 더워 죽겠는데.”
“그래서 아이스크림 사줬잖아. 니 좋아하는 스크류바.”
막 사 온 듯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박지민 앞에 탁 내려놓는 김태형에, 지민은 손을 다 씻 은 다음 냅다 포장지를 깠다. 마침 배고팠는데. 근데 지민은 스크류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 다. 이유는 딱히 없지만.
“난 스크류바 별론데.”
“그럼 내놔. 어? 결국 먹을 거면서 꼭 튕겨. 탱탱볼같이 굴지 마.”
“방금 그거 존나 재미없었어.”
지민은 태형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시간표를 확인했다. 빼먹은 강의를 제외하고 들어야 할 강의는 없었다. 다른 건 다 빡빡하게 잡아놓고 오늘만 뚫어놨단 걸 잠시 까먹었다. 지민은 오 늘은 진지하게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캠퍼스 안 화장실에 서 더위에 시들어가며 살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울리지 않길 바랐던 전화가 울렸다. 이젠 8%밖엔 없는데. 이름을 확인해보니 셋째 누나였다. 받기 두려웠다. 셋째 누나 남친은 진짜로 회생 불가니까. 반은 고맙다고 했지만 반 은 내 뺨을 때렸다. 동시에 넷을 만났으니까. 정말 떨린다. 이걸 끊으면 다른 세 명의 누나에 게 전화가 올 수도 있어서...지민은 침을 꾹 삼켰다. 그래, 희망을 놓지 않으면 안 될 거다. 결 국 버튼을 눌렀다.
“지민아.”
“어, 어 누나.”
“너, 집 없다며.”
“어...어 그렇지. 이제 곧...구할 거야.”
“태형이가 알려줬어. 너 집도 돈도 없으면서 자퇴서만 있다고.”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함부로 끊을 순 없었다. 셋째 누나는 제일 서럽게 울었으니까. 아주 펑펑 울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나 대신 베개를 때렸다. 그 정도로 마음이 약하고 사람 들에게 친절하다. 그리고 셋째 누나가 사귄 사람이 제일 잘생겼고...쓰레기였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잖아. 나는 네가 그거 포기하는 거 싫어.”
“그렇...지. 포기하는 건 안 좋지.”
“이건 좀 빠른 감이 있긴 한데, 내가 아는 분 아들이랑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하고 있어.”
“아 진짜로? 어...축하해. 잘됐네. 그럼 결혼하는 거야?”
“아마 8월 초에 할 거 같아. 본론은....”
네 집에 관한 거야. 그 사람이랑 자취하는 걸 생각하고 있어.
그 말을 듣고 지민은 한동안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셋째 누나는 분명 똑똑한 사람이다. 이 결정을 하는데 네 명의 누나가 반대를 하고 내 뒷담을 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결혼을 전제로 했다면...이거 정말 미안한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상황이다. 박지민은 침을 또 어렵게 삼켜냈 다. 이 상황이 너무 좋았다. 분명 희열을 느끼면 안 되는데, 미치도록 손발이 떨려서 죽겠다고 느꼈다. 분명 셋째 누나 원픽 이라면 얼굴도 잘생겼을 거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정신이 자꾸만 흔들렸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수백 번은 되뇌었으나 주체할 수 없어서 결국 창가에 간신히 기댔다.
“...내가 또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나 그땐 정말 누나 얼굴 못 볼 텐데.”
“애가 철벽이라, 네 사진 보여줘도 별 반응 없더라. 물론 나도 처음엔 애랑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할지 걱정될 정도였어. 정말로...나랑 만날 마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애야.”
“...그럼 안 만나는 게 낫지 않아?”
“아냐, 괜찮은 사람이야.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거니까...아빠가 그러라고 했거든. 그리고 나도 마침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럼 만나야지.”
“응.”
“언제쯤 가? 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심장이 두근거리지. 그러면 안 된다고 혼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민 은 도무지 저를 알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삼초를 시행해버리는지. 한 숨이 또 퍼진다. 오늘은 세븐스타가 당기는 날이었다. 근데 첫 만남에 담배 냄새 배면 싫어하 려나? 누나가 반할 정도면 완전 깔끔한...그런 느낌인가? 지민은 셔츠의 냄새를 맡으며 아직 제 몸에 샤넬 향수 향이 남아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세븐스타는 접기로 바로 마음을 굳혔다.
“시간표 어떻게 되는데?”
“사실 나 오늘 공강이라...오늘은 들을 강의가 없어.”
“학교 끝나고 뭐 할 일 없으면 윤기 씨한테 부탁할게. 집 소개도 받을 겸. 괜찮지?”
“어? 어.”
이름이...윤기, 구나. 이건 마치 중학교 1학년 짜리가 처음으로 교생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금단의 러브스토리 같은 전개였다. 항상 선생님으로만 불리는 데다가 시간강사라서 알려줄 것 만 알려주고 가는 선생님.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고 아이러니하게 들어버린...이젠 주체할 수 없다. 중학교 때 실패한 첫사랑의 순정이 막 뛰는 거 같다. 갑자기 아다로 돌아간 느낌이라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이 뒤틀리는 느낌일까.
심장이 두근거리는 데는 이유가 다 있다. 지금 윤기라는 사람은 나를 이름만으로 아다로 돌 아가게 만들었다. 이제 자위 안 할 거다. 안 한 지 3일째이긴 한데. 아마 그 사람을 보면 중 학교 1학년이 될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찜통 캠퍼스를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또 두근거린 다...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매미 울음소리보다도 더 크게 울리는 내 심장 박동이 이렇게 박진감 넘치는 것이었던가.
“지금 윤기 대학교 앞이래.”
“아, 금방 갈게.”
말로는 금방이라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탄 이유는 거울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함이었다. 머리를 한 번 더 만지고 얼굴을 한 번 더 보는...나중엔 다 후회할 그런 것들. 1층에 엘리베이 터가 도착하자마자 냅다 달려 대학교를 나왔다. 검은색 현대 승용차가 보여서 땀 닦을 새도 없이 또 무작정 뛰어나갔다. 몸보다는 마음이 앞선 거였다. 대학교를 정말 벗어나니 창문이 내려가는 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박지민 씨 맞죠.”
“아, 네...혹시 윤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 그게. 누나한테 방금...들었어요.”
“지연이가 이름만 말해줬나 보네요. 민윤기예요.”
차 밖으로 빠져나온 희고 핏줄이 도드라진 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실망감보다는 희열이 앞섰다. 언젠가 지민에게 정말 커다란 장벽이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건 지금 다 소용없었다.
조수석에 앉으니 안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뺨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아, 하고 무의식에 담긴 소리가 갑작스럽게 새어 나왔다. 지민은 그 순간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은 지민의 인생에서 가장 긴 2초였다.
“...미안해요. 손으로 받을 줄 알았는데. 지연이가 배 아프다고 아이스크림을 못 먹는대서. 하 나 남길래 드리려고요.”
“정말요? 잘 먹을게요.”
“탱크보이, 좋아하죠?”
“네,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그렇게 또 말이 없어지려는 게 싫어서 지민은 바로 말을 걸었다. 아까 셋째 누나가 배가 아파서 아이스크림을 못 먹겠단 말이 마음에 걸렸기에...솔직히 반은 구라다. 마음에 걸리긴 해 도 이상하게 찝찝할 뿐이었다.
“혹시 지연 누나 임신...했어요?”
“네?”
“지연 누나가...혹시 임신...했,”
“그런 질문 좀 실례인 것 같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지연이가 처음에 보여줬던 게, 자기 증명사진이 아니라 지민 씨 사진이었어요.”
“...사진이랑 다르게 생겼죠?”
“아뇨, 실물이 더 나아요.”
감사합니다...하고 조그맣게 덧붙인 말은 닿지도 않았나 보다. 사실 너무 부끄러워서 안 들리 길 바라긴 했다. 지민은 지연에게 감사해야 할지 아님 그저 사죄해야 할지 전혀 알 턱이 없었 다. 여전히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동공에 초침을 박을 자신이 없었고 만난 지 몇 분이 지났 는지도 몰랐다. 그냥 내가 바로 바보가 되어버렸다. 민윤기는 박지민이 만난 이래 최고로 완벽한 남자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단정 지으면 정말 안 되겠지만, 지민은 윤기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생긴 거라던지, 살짝 그레이 톤인 헤어 컬러나 흰 손,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쥐여 줄 때의 미 숙함까지...별거 아닌 것들마저 초보라는 게 확 느껴졌다. 이 느낌은 회사원이 동료나 부하를 대할 때의 느낌과 같았다. 하필이면 고2 때 같이 살았던 삼촌이 회사원이었기에 너무나도 뼈 저리게 아는 감촉이다. 탱크보이를 반절 정도 먹었던 찰나, 차는 윤기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매너 마저도 완벽했다. 제가 안전벨트를 풀기도 전에 먼저 나와서 차 문을 열어줬다. 누군가의 벨트를 채워준 적도 없는지 참 풀기 어려웠으나 모든 건 전부 효과가 있었다. 이게 다 금방 사랑에 빠져버리는 박지민 때문이다.
“집이 좀 좁을 거예요. 내가 자취를 하는 입장이라, 돈 모으면 이사, 가려고요.”
“아니에요, 화장실보단 나은걸요.”
“...정말로 화장실에서 살았었어요?”
“...놀랍게도, 그랬어요. 돈이...돈이 정말 없어서요.”
“알바라도 하지.”
신기하게 이 사람은 땀 냄새가 전혀 안 났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백화점 냄새. 365일을 백화 점에서 사는 것처럼 그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고한 백조처럼 굴었다.
“아무도 절 안 받아줘서요.”
“요즘은 대학교 어디 나왔는지가 중요해졌더라고요.”
“...하긴 그렇긴 해요.”
“캠퍼스 생활은 어때요? 이제 2년 차잖아요.”
“아, 나름 할 만해요.”
“지연이가 그러던데요. 지민 씨 친구가 없다고. 요즘 같은 사회에서 친구는 정말 중요한데.”
갑자기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천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뭐 하나 부서지지 않았다. 그냥 내 속이 존나 말라비틀어져서 부서진 거다. 사회는 야비했다. 저렇게 생긴 놈에게 저딴 아가리를 달아주는 게, 신은 잔인하고 사랑은 부질없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 이지만...사실 이렇게까지 쉽진 않길 바랐다. 어차피 얼빠인데 뭐 어쩌겠냐 싶을 정도로.
“...그렇죠.”
“이 집에서 같이 사는 동안에는 지민 씨 친구가 되어 줄게요. 야근하는 날엔 나도 어쩔 수 없겠지만.”
“감사합니다.”
분명 즐거워야만 했다.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있어야만 했는데 도. 내 모습은 마치 교수가 D플을 줄 걸 그냥 C 마이너스로 받은 느낌일까. 솔직히 더럽다. 사과받고 싶다. 하지만 지민이 고개를 들자마자 윤기의 손이 뺨 부근으로 다가왔다. 어? 이, 이렇게 빨리? 심장이 정말 터질 것 같은데도...먼지를 털어준다는 별 개 거지 같은 이유로 온 거였다. 지민은 이딴 거에 숨이 가빠지는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따가 저녁에 봬요.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아, 오늘 저녁에 약속이...있어요.”
“그럼 집에 올 때 연락해요. 데리러 갈게요.”
“어, 가능하면 택시....”
윤기의 시선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말이다.
“...전화 드릴게요. 이따가.”
“그래요 그럼.”
전 일이 바빠서.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많으니까 심심할 때마다 드세요. 윤기는 그렇게 할 말 만 하고 사라졌다. 진짜로 자기 할 말만 했다. 호구조사도 자기 할 말만 하는 포지션도 원래 전부 지민의 것이었는데. 전부 다 그 취향 범벅 얼굴이 문제였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렇게 잘 생겨서. 마치 모든 걸 들킨 장희빈마냥 모든 게 분통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매미 소리가 겹쳤다.
지민은 윤기의 얼굴을 또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한 점 한 점 짚어봤다. 아직도 다 먹지 못한 탱크보이가 다 녹아내려 손목을 적실 때까지. 생각이 점점 민윤기 중축으로 퍼져버릴 때까지.
아마 이 애정은 어쩌면 지민에게 마지막 애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열렬하게 사랑하자는 것이다.
하늘에 맑은 구름을 전혀 닮지 않은 마음을 가졌더라도,
지민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설마, 죽진 않겠지.
창문 너머로 뜨겁게 타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삼위일체를 행했다. 그래, 내 신은 아직도 저렇 게 열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0
“지민아!”
“아, 누나.”
“이 시간에 여기 왜 있어?”
“누나랑 밥이나 좀...같이 먹으려고 했지.” “밥은 누가 사는데?”
“아, 지갑을...뒤져보니까 3만원이 있더라고.” “장난이야. 내가 살게.”
“...어. 알겠어.”
셋째 누나는 어딘가 불편하게 나를 대했다. 설마 내가 윤기 형한테 손이라도 댔다고 생각하 는 걸까. 아니? 전혀. 사정없는 배려에 이미 애까지 가졌다.
“윤기 씨는 어때?”
“잘해 주시던데. 어.”
“처음이라 무뚝뚝하게 나갈 줄 알았는데, 아무튼...우리 곧 결혼하게 되면 그 집은 네 거야.” “정말?”
물컵에 담긴 물을 반쯤 들이마셨다. 이제 그와 나의 흔적으로 얼룩질 회색 벽지와 라이트 네 이비 색 소파. 어쩌면 간접 키스의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유리컵. 지민은 입맛을 다셨다.
“모르는 사람한테 팔긴 좀 그래서, 매달 월세라도 받겠대. 할 수 있지?”
“...어? 어. 할...수 있지. 어, 할 수 있지.”
바싹 침이 말라온다. 월세를 대체 얼마나 받아 처먹을 셈인지 분간마저도 안 갔다. 이건 니 트족으로만 살던 나를 허구한 노동의 세계로 밀어 넣으려는 속셈인 걸까? 대학교 온 것만으로 동네방네 자랑해야 하는 거 아냐? 아, 자긴 유학도 갔다 왔으니까 이 정도는 자랑 건으로도 안 쳐주겠다 이거구나. 애초에 운동할 시간도 없이 빡세게 공부해서 근력도 뒤진 박지민이 뭐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있나 싶었다. 오로지 대학만 가라고 했다. 그 뒤는 알아서 보완해주겠 다면서.
“근데, 나 알바 못 하는데.”
“그렇네...하긴 그렇겠다. 그럼 대출이라도 받아.”
“누나.”
“그 앤 내 마지막 사랑이었어.”
“...지금 거기서 그 쓰, 아니 그 사람 이야기가 왜 나와.”
“그 정도로 좋아했다고. 나는 걔가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구는 게 너무 좋았어. 실제로 다 해 줬고. 지금 내 손목에 있는 이 샤넬? 이거 걔가 해준 거야. 난 아직도 걔가 눈만 뜨면 내 뒤 에서 매일 해주던 서프라이즈 해줄 거 같아.”
“...난 알바 죽어도 못 뛰어. 심장이 약하잖아.”
그래서 지금까지 못 먹고 버린 놈이 얼만데. 지민은 이를 빠드득 갈다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교내에서 흡연은 금지였나. 기억은 안 나도 갑자기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 었다.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다 들통났다.
“심장 약한 게, 섹스는 많이 했구나, 어, 그렇지?”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봤다. 이거 다 노린 건가? 민윤기는 그냥 미끼야? 힐끗힐끗 이쪽을 쳐 다보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이어폰 빼.”
또 끼어드네. 박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이래야 인생이 재밌겠지. 돈도 뜯어먹을 수 있 고 아주 좋겠다. 이 대가로 둘째 누나는 셋째 누나에게서 양주를 뜯어냈을 거다. 확실하게 박 지민은 단언했다. 하필이면 애비 피가 다 그쪽으로 몰렸으니까.
“....”
“둘째 누나 아직도 입담은 안 죽었나 보네.”
“지우가 말해준 게 아, 아니더라도 나는 이렇게 마, 말했을 거야.”
“...방금 그건 가정폭력이랑 같았어, 누나. 캠퍼스 안에서 이러지 말자 우리...여신 소리 듣는 누나랑 내가 지금 여기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존나 이상하게 보이는데. 대화에 서 섹스 이 지랄 나와 봐. 안 그래도 없는 친구 씨가 말라버리겠지.”
“....”
“솔직히...누나 말 안 더듬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그렇게 싸구려 단어를 거침없이 내뱉는 거. 누나 성격에 하나도 안 맞잖아?”
“....”
“내가 알아서 해, 내 인생. 박지연.”
이로써 나도 명분이 하나 생긴 거다. 애 이름은 뭐로 할지 벌써 기대가 됐다. 대체 언제 느 껴봤나...이 떨림을. 지민은 셋째 누나처럼 말을 더듬기 전에 새어 나오는 기쁨을 참아 냈다. 셋째 누나는 욕 같은 저급한 말을 할 때마다 입이 고장 난다. 평소엔 상관없어도 나중에는 바 로 망가진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이 집에는 결함이 많다. 이게 다 부모 탓이긴 하겠지만.
“지민아.”
“어.”
“밥은...먹고 가.”
“지민이 저랑 먹기로 했는데요?”